단상이라도, 꾸준히 글을 쓰자고 결심했건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개강을 했고, 전보다는 웹 접근이 나아지므로
앞으로는 꾸준히 써볼 작정이다.
개강을 했는데, 학부 때부터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까,
10여 년만에 수업다운 수업을 듣는 셈이다.
뭐 수업 자체에 엄청난 기대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다소 강제적인 형태로 공부하는 것에 관해서는 기대가 있다.
이번 주는 대략 개요이고,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될 텐데
나름 설렌다.
이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충동적으로 책을 막 대출했다.
그 중 하나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보니 호니히의 <Democracy and the Foreigner>다.
그녀의 다른 글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다
우연히 웹으로 읽게 된 이 책 1장이, <오즈의 마법사>
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걸 보고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즈의 마법사>와 <셰인> 같은 대중적 장르부터
<사회계약론>이나 <모세와 일신교> 같은 이론적 글,
<성경>의 "룻기"부터 오늘날 등장한 정치철학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기록들을 가로지르며 '외래성'(foreignness)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는
그녀의 접근 방식에 깊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해서
수월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글 자체는 재미있는 듯 하지만
한동안 제대로 책을 붙잡고 공부하지 않은 터라
다시 습관이 잡힐 때까진 시간이 좀 필요할 듯.
다만 한 가지 독서 화두는 적어두려 한다.
호니히는 이 책에서 외래성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탐색하는데
이때 그녀가 환기하는 심상 중 하나가 (<셰인> 같은) 서부극이다.
물론 나에게는 (<셰인>의 영향을 직접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나 <쓰바키 산주로>가 더 익숙하고 생생하지만.
그런데 서부극을 말하면, 적어도 나로서는,
알튀세르가 말년에 언급한 '유물론적 철학자의 초상',
'기차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달리는 기차(세계의 흐름, 역사의 흐름, 그의 삶의 흐름)를 잡아타는 사람'
이라는 심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어보긴 해야겠지만,
호니히가 민주주의와 외래성 사이의 어떤 긴장적 관계를 말하고
알튀세르가 외래성과 유물론적 철학자(또는 아마도, 마키아벨리적인 정치 행위자)
의 친화성을 말하므로
외래성을 매개로 민주주의와 (철학적인, 그러나 특히 정치적인) 유물론의 관계를
탐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자연히 생겨난다.
최근 발리바르를 읽으면서 '이방성'(strangeness)의 문제를
고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때문에 새삼 호니히의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이 문제를 중하게 다루는 사회학 전통,
한편에 '고전'에 속하는 게오르그 짐멜이 있고
다른 한편에 가장 현재적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는
이 전통을 읽는 나름의 방식을 위의 이론가들로부터 얻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난다.
이로써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조선족과 재일조선인, 탈북자 등
여러 이산민(diaspora)과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권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데 쓸모가 있는
지적 수단 중 하나를 다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