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izenship'의 번역어에 관한 단상

오늘 수업에서 'citizenship'의 번역어에 관한 토론이 잠깐 있었다.

입학 서류 중 하나인 연구계획서를 낼 때

이 문제에 관해 거칠게 고민한 게 생각났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지만, 뭐 여기는 일종의 연습장 같은 곳이니까,

앞으로 계속 고민하자는 차원에서 옮겨 놓는다.

내가 'citizenship'의 새로운 번역어로 떠올린 '시민'(市民)이란 말은

구글 검색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신학 쪽에서

제자직(discipleship)과 시민직(citizenship)을 대립시키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눈에 띄는데

논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곧 '직책/직분'으로서 시민이라는 관념)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한문으로 市民職을 치면, 중국 쪽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 예가 검색되기는 하는데

중국어를 몰라서 이게, 예컨대 '시민직(업)훈(련)' 식으로, 다른 단어의 일부로 쓰이는지,

독립적인 단어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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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시민권’(市民權)이라는 번역어가 'citizenship'이라는 서양어의 진의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최현, 2006).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ship'을 번역하기 위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채택하는 ‘권’(權)이라는 번역어다. 본래 'ship'이란 접미어는 예컨대 'kinship'의 예에서 보듯 ‘~임’이나 ‘~다움’이라는 뜻, 즉 지위나 특성, 자격 따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citizenship'의 일차적 의미는 시민이라는 ‘지위’에 있으며, 이로부터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이나 요건, 시민이 수행하는 활동 및 이를 위해 요청되는 덕성(virtue) 등 다양한 의미가 파생된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이라는 번역어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번역어가 'citizenship'의 한 측면에 불과한 권리의 측면만을 도드라지게 하고, 나머지 의미들은 부차화한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이 같은 지적이 일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으로 시민권이라는 번역어가 갖는 이점도 있다. 그것은 시민권이 무엇보다 ‘권리’의 문제라는 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리의 본질 및 조건을 개념화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권리에 대한 다른 접근법, 특히 한편으로 신분적 ‘특권’(privilege), 다른 한편으로 ‘인권’ 개념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시민권, 특히 근대 시민권은 전근대 시대를 특징짓는 신분적 특권 개념과의 단절을 통해 성립했다. 정치 공동체 안에서 모든 구성원 곧 시민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권을 부여받는다. 이 같은 ‘내포적 보편성’은 근대 시민권의 핵심을 이룬다(Balibar, 2007a). 동시에 시민권은 인권, 특히 ‘천부권’이나 ‘자연권’ 등 인권 개념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과 구별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따르는데, 아렌트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국가 없는 사람들’과 ‘권리 없는 사람들’에 관해 성찰하면서,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독립적인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민권이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는 점을 증명한 바 있다(아렌트, 2006; Balibar, 2007b). 이 때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권이란 이런저런 실정적 권리라기보다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a right to have rights), 즉 실정적 권리들을 실현․보장하는 정치 공동체에 평등하고 자유롭게 속하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이르는 것이다.

요컨대 발리바르와 아렌트 등이 재정식화한 근대 시민권 개념은, 권리 문제를 다룸에 있어 특권 개념에 대해서는 보편성의 차원을, 인권 개념에 대해서는 실효성의 차원을 강조하는 독특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특권 개념과 인권 개념의 나쁜 점을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한 이상적 개념이 아니다. 차라리 보편성과 실효성, 확장성과 안정성, 또는 운동과 제도라는 모순적 경향들 사이의 끝없는 갈등 및 일시적 균형으로 시민권을 정의하는 것이 개념의 정신 및 현실에 부합한다 할 것이다. 시민권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면, 다양한 사회에서 권리가 실현되는 양상을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시민권이 권리 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확인한 채, 시민권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비판을 재검토해 보자. 비판의 요점은 이 번역어가 'citizenship'이라는 지위에서 파생되는 권리라는 한 가지 측면만을 부각시킬뿐더러, 이 말이 갖는 객관적․제도적인 동시에 주체적․인간학적인 이중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시민권’이라는 한글 단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 서양어에서도 영어 'citizenship'과 불어 'citoyenneté'의 용법이 다르고, 더 나아가서는 일찍이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가 증명했듯이 'citizenship'의 어원을 이루는 그리스어 'politeia'와 라틴어 'civitas' 자체도 시민과 정치체, 시민의 권리에 관해 상반되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벤베니스트, 1998; Balibar, 2008). 즉 'citizenship'이라는 서양어 자체가 다양한 해석 사이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고, 따라서 문제는 이 말에 대응하는 정확한 한글 단어를 찾는 것을 넘어, 'citizenship'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관해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어를 채택하는 문제는 이 논의의 일부이지, 이것과 별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citizenship'을 공적 공동체 안에서 시민이 점하고 실행하는 ‘일차적 직책/공직’(primary office)이라고 규정하는 네덜란드의 정치학자 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신공화주의’(neorepublican)적 접근에 주목한다(Gunsteren, 1998). 이 같은 규정은 'citizenship'이 갖는 지위로서의 측면을 분명히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이 지위의 ‘공적’ 성격을 강조한다. 'citizenship'이 ‘공직’인 한에서, 이는 ‘자연적’으로는 실존하지 않으며, 오직 시민에게 이 공직을 부여하고 권한을 인정해 주는, 그리고 그 권한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동료시민들과의 ‘인공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실존한다. 또한 ‘공직’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citizenship'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본분과 의무를 유순하게 수행한 대가로 상위 공동체가 ‘하사’하는 신분적 ‘특권’―직분과 의무에 상응하여 부여되는 보상이야말로 특권의 본래적 정의다―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능동적 권한과 그에 필요한 덕목, 그리고 이 권한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등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렇듯 공직으로서 'citizenship'이라는 규정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권 및 특권과 구별되는 시민권의 고유한 의미와 잘 어울린다. 사실 휜스테렌의 이 같은 접근은, 시민을 ‘무제한적인 공직’(archē aoristos), 곧 전문적 영역이나 임무를 갖지 않으면서 모든 정치적 사안에 관해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공직자로 정의한, 시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민주주의적인 정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민권의 기원에 있는 핵심 원리를 부활시킨다는 장점도 갖는다(아리스토텔레스, 2009).

이처럼 ‘직책/공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citizenship'의 고유한 차원을 잘 포착하는 것이라면, 'citizenship'의 번역어로 ‘시민’(市民)이라는 신조어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시민권이라는 번역어가 이미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밝힌 것처럼 여기서 요점은 'citizenship'에 대응하는 더 ‘정확한’ 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citizenship'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관한 관점이다. 시민권을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된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되는 공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보장되는 권리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 공직을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배제하는 기준, 이 공직에 따르는 권한과 의무의 구체적 내용 및 그 변천 과정, 그리고 이 공직의 실효적 획득과 행사를 둘러싸고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와 갈등 등 역동적 과정을 시민권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휜스테렌이 ‘진행 중인 시민권’(citizenship in the making)이라 부르는 이 같은 접근은, 특히 시민권의 형식적 보장과 다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민권의 실질적 행사, 그리고 아직 법률 등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등장하여 시민권의 미래를 개척하는 갈등적 과정 등을 포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더불어 특정 집단을 권리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와 역으로 완전한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도 모두가 시민권의 언어를 빌어 이루어지는 역사적․정세적 현실 앞에서, 시민권에 대한 전면적 거부나 무비판적 수용 양자와 구별되는 태도를 가능케 해 줄 것이다.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천병희 옮김, 숲, 2009.

에밀 벤베니스트,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 공시언어학과 통시언어학의 만남』, 김현권 옮김, 한불문화출판, 1998.

최현 , 「한국 시티즌쉽(citizenship)」, 『민주주의와 인권』 제6권 1호, 2006.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 박미애 [공]옮김, 한길사, 2006.

Balibar, Etienne, "Debating with Alain Badiou on Universalism", 2007a. (http://www.ciepfc.fr/spip.php?article21)

Balibar, Etienne,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b.

Balibar, Etienne,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Gunsteren, Herman R. van, A theory of citizenship: organizing plurality in contemporary democracies, Westview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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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09 19:42 2010/09/0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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