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turing Reality

 

 

 

"We will begin with the following observation: what we have called Althusser’s most productive period coincided with a new-found interest in contemporary painting and literature, particularly drama. (...) The argument emerging here would become explicit in an unfinished piece from 1968, “Sur Brecht et Marx,” in which Althusser acknowledges that far from Marxist theory helping him understand theater, it was rather that “El Nost Mila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y research. Seeing El Nost Milan I was better able to understand certain important things in Marx’s thought” (Althusser 1994b, 524)."

- Warren Montag,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2003, p.17, p.35.

 

알튀세르의 스승 바슐라르는 철학자들에게

"과학들의 학교로 가라!"고 외쳤다.

20세기 들어 한층 가속된 자연과학들의 진보에 비해

철학은 사뭇 한심한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더러

추상/구체, 사고/경험 따위의 부당한 대립항을 만들어

자연과학의 활력있고 실험적인 실천을 왜곡하는 표상을

자연과학에 뒤집어 씌우고, 그와 상관적으로 철학을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배척해 더 퇴행적인 상태로 뒷걸음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강조하면서

바슐라르의 이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거기가 어디든, 새로운 사고가 돌발하고 운동하는 곳으로 나아가

듣고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게 그의 진의였으리라.

알튀세르가 과학 개념을 양보하지 않았다 하여

인본주의자들은 그를 스탈린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선험적으로 참칭하지 말고

현대 과학들이 실천하는 과학성의 규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에 비추어 맑스주의가 진정한 과학성에 도달했는지 곰곰이 반성하며

'도래할 과학성'을 위해 힘쓰자고 외친 것이

어찌 스탈린주의일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알튀세르의 '비교조적' 특징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입각해 예술성에 대한 어떤 정상성/규격성(normality)

을 만들겠다고 정색하지 않았다(부르주아 예술 vs 프롤레타리아 예술?).

물론, 그런 유혹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스주의 곧 역사과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기존 과학(성) 개념에 개입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 예술(성) 개념에 개입하려는 생각이 알튀세르에게 있었고

이 때 그 선의와 상관없이 개입이 점령과 이용(exploitation)이 되는 그런 위험,

예컨대 스탈린주의나 인본주의와는 다르지만

자신의 이론적 반인본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전'(canon)을 정립하려는

위험이 항상 출몰하게 되므로.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사이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전통적인 의미의 '미학'이나 '예술론'에 가장 가까운,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를 완성.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예술과 알튀세르가 마주친 지배적 방식은, 위에서 그 스스로 말하듯,

어떤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사고,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정교히 하는 식이었다. 즉 알튀세르에게 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한 예술의 효과다.

예컨대 예술을 다룬 알튀세르의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를 논평하며

워런 몬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알튀세르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The final sentence of the essay, perhaps one of the most powerful Althusser has ever written, (...) suggesting that his essay is the effect of the play, the play pursuing itself, its themes, its passions in him as in so many others: "I return to myself and the question, sudden and irresistible, assails me: whether these few pages in clumsy and blind way are nothing more than this unknown play from a June evening, El Nost Milan, pursuing in me its unfinished meaning, seeking in me, despite me, all the actors gone and the sets cleared away, the beginning of its silent discourse." (For Marx, p.152)"

- 같은 책, p.30(강조는 나).

 

과학들과 예술들, 그리고 또다른 실천들을

평가하고 서열화하고 경우에 따라 작두로 내려치는

'판관'의 자리에 맑스주의를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물질적 실천들 속에서 출현하고 작동하는 사고들에 귀기울이고

그에 힘입어 맑스주의를 반성하고 변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자, 더 넓게는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제 수업 시간에

Capturing Reality: the Art of Documentary란 다큐멘터리 영화와 마주친 후

영화라는 예술적 실천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얻었다.

지금 자신을 엄습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그게 무엇이 됐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한 저 현실을 포착하려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느낀 것처럼 관객들이 체험하게 만들려면

어떤 형식과 기법(이른바 '방법')이 필요할 것인지에 관해

감독들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실험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 하는

이른바 '미학적' 대당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일반적 '방법론' 따위도 마찬가지다.

오직 구체적이고 정세적인 마주침, 독특한 대상을 포착하려는 '적합화' 노력

만이 있을 뿐이다.

 

천의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처럼

혁신적 사고 역시 그렇다. 때로 그 곳은 문학일 수도, 영화일 수도 있고,

생물학일 수도, 정치철학일 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그런 것처럼 (대중)정치일 수도 있다.

어느 곳엔가 뿌리를 두더라도,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놀라운 사고들과 마주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

서랍 속에 간직해 두고 수시로 꺼내 보아야 할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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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14 12:55 2010/09/1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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