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무엇인가?'는 본질의 문제설정을 규정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 같은 본질주의는 여러 가지 인식론적, 정치적 문제를 갖는데
이를 비판할 때 우리가 흔히 부딪칠 수 있는 반론은
'그렇다면 ~을 ~이 아닌 것과 구별하는 개(별)성이 전혀 없단 말인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성립한 개(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럴 때는 대개 문제를 얼버무리거나 절충하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본질이 아닌 '경계'(border)의 문제로 제기하고
그 기원적 자의성과 사후적 물질성, 곧 '역사성'을 사고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 중 하나가 (근대) 문학이다.
(하지만 철학이나 예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히 문학이라는 것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것을 어느 하나의 본질로 약분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게 다 '문학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면
문학을 통해서 노리고자 했던 모종의 효과가 다 무화되는 것 같고...
최근 문학에 관한 데리다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한다.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말하도록 허용하는 제도화된 허구이자, 허구적 제도'라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신의 관습과 규칙 등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제도, 또한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규칙을 자유롭게 깨뜨리며, 규칙을 전위시키고, 이로써 자연과 제도, 자연과 관습적 법, 자연과 역사 사이의 전통적 차이를 설립하고, 발명하며, 심지어 의심하는 힘/권력을 부여하는 허구의 한 가지 제도/설립"(Jacques Derrida, This Strange Institution Called Literature -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p. 37, Acts of Literature, Routledge, 1991)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한 권위부여' 및
'근대적인 민주주의 이념의 도래'와 결부되어 있다고.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예컨대 고급 문학 / 대중 문학 등의 구별을 써서 후자를 배제할 순 없는데
왜냐하면 문학은 하나의 경계이자 제도이지, 어떤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예컨대 이 같은 제도가 설립되기 이전에 쓰인 기록,
예컨대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은 그 자체로는 문학이 아니다.
다만 이들이 문학이라는 근대적 제도 안에 들어와서
이 제도에 고유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해석되는 한에서,
들뢰즈를 흉내내 말하자면 '문학-되기'(becoming-literature) 운동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문학이 된다.
또 일차 목표가 '정치적 효력'의 발효에 있지, '표현의 자유'에 있지 않은 칙령 같은 기록 형태 역시
그 자체로는 문학이 아니다. 물론 그 칙령이 문학이라는 근대적 기록 형태에서 영감을 길어 오고,
또 문학 제도 안에서 그 본래 목표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유될 수 있는 한에서,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나아가 특정 과정을 통해 문학으로 탈바꿈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접근이 다양한 문학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으면서도
동시에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 역시 갖는다는 점이다.
이는 여기서 사용되는 개념이 '본질'이 아닌 '경계' 또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경계/제도는 한 편과 다른 편을 구별하고
사후적으로 자신의 경계/제도에 속한 것들 안에 심지어 본질 비슷한 것을 (재)생산할 수도 있지만,
설립 때 자의적(arbitrary, '자연적/본성적'(natural)이 아니라 '인공적'(artificial)이라는 의미에서)이고
자신 안에 다양하고 심지어 적대적인 경향들을 포함할 수 있으며
(기원적 자의성을 갖기 때문에) 정치적/역사적으로 변화가능하다.
말하자면 발리바르가 루소에게서 취한 질문,
곧 '인민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가?'처럼
'~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을 ~으로 (재)생산하는가?'라고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곳이야말로 정치와 철학이 만나는 곳이다.
레닌, 그리고 그를 읽은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정치는, 그리고 철학은 다름 아닌
선을 긋고, 선을 지우며, 다시 선을 긋는 끝없는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와 철학에 고유한 윤리 역시 나올 것이다.
'적법한 강제력'을 정치의 특수한 수단이라고 정의한 막스 베버는
이로부터 '정치의 모든 윤리 문제가 지닌 특수성'이 나온다고 말했다.
곧 '모든 강제력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에 관한 반성과 책임이 그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착상을 얻는다면,
이 편과 저 편 사이의 선을 긋는 (자의적) 행위를 정치와 철학의 정수 중 하나라 규정할 때
그 행위자들에게 부과되는 윤리적 문제는 그 무엇보다,
저 편과 이 편이 '적(敵)과 아(我)', 곧 군사주의적 용어로 번역되고,
여기에 적에 속한 이들에 대한 절멸 충동과 아에 속한 이들에 대한 획일화 충동이 달라 붙는 것
을 반성하고 책임지는 것이리라.
곧 정치적 갈등과 적대가 군사(주의)적 갈등과 적대로 전환되는 것을 막고,
그렇다고 비폭력과 절대적 평화의 유토피아(아마도 실제로는 디스토피아)
에 따라 정치적 갈등과 적대를 해소하는 것도 아니라,
갈등과 적대를 정치적 형태로 '지속'하고 '보존'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구조를 혁신할 새로운 대중들과 정치적 주체가 항상-아직 입장할 수 있는
정치적 틈이 결코 닫히지 않게 투쟁하는 것,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스스로 역사의 메시아로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치가 아니라
메시아의 도착을 기다리며 그/녀들이 들어 올 문을 열어 놓는 세례자 요한의 정치,
(물론 이는 너무 이분법적이며, 사태는 아마 훨씬 더 내재적이고 변증법적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해하는 '시민인륜'(civilite)의 정치의 정수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