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첫 번째 권리로 설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다음의 것을 덧붙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강제를 부과할 수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타인이 매우 자주 그것을 인정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은 전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의 용법들」, p. 11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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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대목을 보고, 어디선가 저런 태도가, 아주 인상적인 형태로, 상연된 적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디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다가
오늘 문득 떠올랐다. <파이란>.
강재를 대한 파이란의 태도가 저런 것 아니었을까?
언젠가 <파이란>에 관해 끄적이면서(그 글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파이란(장백지)을 대하는 송해성 감독의 태도가
은수(이영애)를 대하는 허진호 감독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고 적었던 것 같다.
여성을 '타자', 곧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통상적인 이해가능성의 경계를
넘는 존재로 그린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 쪽은 남성을 파멸시키는 존재고, 다른 쪽은 남성을 구원하는 존재지만,
결국 남성들이 가진 판타지를 투영해서 만들어낸 불가능한 존재라는 게
그 때 내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허진호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가장 탁월한, 특히 영화적인 비판은, 여전히 정성일 평론가의 것이다)
하지만 <파이란>에 관해서는, 분명 내가 틀렸다.
<파이란>은 말하자면, 사랑이 (랑시에르적인 의미, 곧 '탈동일화'라는 의미에서) '주체화'
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또는 뒤집어 말하면,
'주체화'의 효과를 산출하는 한에서 사랑은 다른 모든 위대한 실천들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냉소주의가 판치고, 그렇고그런 시시한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파이란이 남긴 기록은 참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기록과 마주치면서 냉소적이고 야비한 3류 깡패 강재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말한 것처럼, '양아치에서 인간이' 된다.
곧 파이란이 상징하는, 인간과 시민의 '공통 세계'와 '공통 언어' 안으로 들어온다.
<파이란>은 이 냉소적 시대에 위대한 사랑,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힘을 말한다. 이 이상과 판타지의 차이점, 그러나 또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어려운 질문 앞으로 나는 되돌아온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