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가에게, 오마주

요새 <그.사.세.>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시청률이 안 나와서 속상하다. 앞으로 노희경 작가가 글 쓸 기회가 줄어들 것 같아서.

난 노희경 작가 드라마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지만,

아래 장면-대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득 기억나서 옮겨 온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낸 노희경 작가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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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58 미옥의 방안.


미옥, 벽에 기대 이불을 무릎에 덮고, 막막하게 앉아있는,
엄마, 죄지은 사람처럼 밥상 앞에서 앉아있고,
고모, 맘에 안들게 미옥을 보는,


엄 마 : 미옥아, 너 좋아하는 청국장이야, 한술만 떠봐, 어?
미 옥 : ....
고 모 : (버럭) 아, 거, 기집애, 진짜 해두해두 너무하네!
엄마, 미옥: (고모 보면)
고 모 :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벌써 몇번째 국을 뎁혔다 말았다 하는 줄 아냐, 너! 니 엄마가 기집애야, 니 종이냐!
엄 마 : (말리는) 고모...
고 모 : 언니도 애들 이렇게 키우지 말어! 이게 뭐야? (미옥 보며) 너 기집애야, 뭐가 그렇게 잘나서 식구들 전부 절절 매게 해!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영민씨는 집안이 어찌됐든 너 받아 줄 맘 있대! 그럼 끝난 거지, 니가 왜 쏘가지야! 대체 지금 누구한테 쏘가지가 난 거야, 너!
미 옥 : (엄마 눈가 그렁해 보며, 맘 아프지만, 담담하게) 엄마, 나 왜 대학 그만두라 그랬어.
고 모 : ?
엄 마 : (미옥 보며, 순간 철렁하는) ?
미 옥 : (울먹이며, 조금 큰소리로) 내가 4년제 대학 간다 그럴 때두 ..엄마가 2년제 가라 그랬지? 그나마 2년제두 엄마가 중간에 그만두라 그랬지.
엄 마 : (눈가 붉어져, 맘 아픈, 조심스레) 내가 언제..니가..그만둔댔잖어.
미 옥 : (격앙된) 엄마가 미수는 4년제 가야하는데 그러면 집안이 힘들어진다고..자나깨나 한숨쉬고 그러니까, 내가 그만둔 거잖어!
고 모 : (맘 아픈, 달래듯) 야, 야, 다 지난 일 갖고, 야, 김미옥,
미 옥 : (엄마에게,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엄마는 착한 게 아니라, 방관자야.
엄 마 : (미옥을 빤히 보는데, 눈물 뚝 흐르는)
고 모 : (맘 아픈) 미옥아.
미 옥 : 다른 엄마들 봐, 파출부를 하든 뭘 하든 죽어라 일해서 자식들 대학 보내잖어. 땅 장사다 집장사다 해서 어떻게든 돈 벌잖어! 그런데 엄마는 어땠어? 공장 가면 공장에서 쫓겨나고, 파출부 나가면 거기서 또 쫓겨나고, 덕분에 나는 대학도 못다니고, 시집갈 때까지 갈비집에서 가위질하며 돈 벌었어! 내 또래 애들 전부 잘 나가는 대학생 되고, 멋진 옷 입고 다닐 때 나는 앞치마하고 갈비집에서 일 했다구! 왜 미수만 유학까지 갔어야 돼! 나는 뭐가 모잘라서 갈비집에서 일했어야 돼! 내가 엄마 딸이지, 엄마 엄마야! 내가 왜 지금까지 엄마 생곌 책임져야 돼! 나 영민씨 아버지 집에서 돌아올 때 그 누구보다 엄마가 미웠어! 왜 날 이렇게 밖에 못키웠어! 왜, 이렇게 밖에 못키웠냐고, 왜!
엄 마 :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맘 아픈) 미안해, 엄마가 모잘라서 그래.
고 모 : (속상한, 눈가 붉어져) 언니가 뭐가 모잘라! 사람 다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미옥 보며) 야, 기집애야!


그때, 재수 화나 벌컥 문 열고 들어서서 미옥에게,


재 수 : (화난, 소리치는) 오늘 나랑 한판 뜰래!
미 옥 : (보면)
고 모 : (일어나, 재수 밀며) 넌 빠져, 자식아!
재 수 : (아랑곳없이, 미옥 보며) 지금 어디서 화풀이야! 누나 그 공치사하는 거 이제 내가 더는 지겨워서 못듣겠어! 염병, 재혼 못해 환장했냐! 그렇게 시집이 두 번 세 번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 이 난리야, 지금!


그때, 미수, 들어와 재수 끌고 나가며, 가라앉은,


미 수 : 재수 너 나와. 어서!
고 모 : (같이 재수 끌고 가며) 그래, 나가자, 나가자.
재 수 : (나가며, 큰소리치는) 지가 집에 잘했음 얼마나 잘했어! 이혼해서 엄마 그만큼 속썩였음 됐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미 수 : (재수 끌고 가며) 조용히 못해!
재 수 : 지가 못난 건 괜찮고, 왜 엄말 쥐잡듯 잡냐고, 왜!
고 모 : 나가, 자식아,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미 수 : 나와, 어서!


고모, 미수, 재수를 끌고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 들리는,


미 옥 : (맘 아픈, 눈물 닦으며, 자조적으로) 그래...나 잘한 거 없다, 그러니까 너두 나 무시해, 다들 그래, 그렇게 무시하라 그래.
엄 마 : (눈물 닦고, 밥 떠 미옥의 입에 대주며) 한술만 떠.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속상한)
엄 마 :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밥 한술이라도 좀 떠, 어?
미 옥 : (엄마 막막하게 보는,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다)


씬 61 엄마의 거실, 아침.


엄마, 졸린 얼굴로 눈 비비고 나오다, 순간 달그닥거리는 소리에, 멈칫하는, 조심스레 주방 쪽으로 가면,
미옥, 쪼그리고 앉아 물에 말은 밥과 김치를 바닥에 놓고 먹고 있는,


엄 마 : (마음이 조금 풀리는, 어색하게 작게 웃고, 미옥의 앞에 앉아서) 아이고, 밥 먹네, 우리 애기?
미 옥 : (엄마 보고, 미안한)
엄 마 : 왜 밥을 이렇게 먹어, 청국장 뎁혀줄까?
미 옥 : (어색하게, 눈가 붉어져) 어제..미안.
엄 마 : (맘 짠해지는, 끄덕이며, 애써 웃으며) 괜찮어. 니가 엄마 아니면 어디 가서 그렇게 소릴 질러, 안그래?
미 옥 : (눈가 붉어져, 작게 웃으며) 맞어, 나는 엄마가 젤로 만만해.
엄 마 : 알어. (하고, 김치 찢어 미옥의 입에 넣어주며) 아, 해!
미 옥 : (입벌리면)
엄 마 : (넣어주고) 꼭꼭 씹어, 큰애기.
미 옥 : (받아먹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어.
엄 마 : (손가락 빨아먹으며, 미옥 보고, 눈가 붉은 채, 씩 웃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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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강조 표시는 내가 한 것이다)
 
씬 58, 굵은 표시를 한 고두심의 대사가 나왔을 때,
특히 '엄마한테 할말 다 했음 제발 한술만 떠'가 나왔을 때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 느낌을 도저히 여기 옮겨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흥수의 '오늘 나랑 한판 뜰래'로 시작하는 연기다.

이게 없었다면 그후 고두심의 대사는 훨씬 덜 감동적이었으리라)

 
한편
씬 61의 저 대화를 고두심과 배종옥이 한다고 생각해 보라!
모르긴 해도 국내에서 저 대화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 두 장면만으로 난 이 드라마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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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14 15:10 2008/12/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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