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부활 2

"3학년 때 닉은 교실을 열대 섬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실 뉴햄프셔 주에 사는 아이라면 누구나 추운 2월에 여름을 맛보고 싶을 것이다. 닉은 아이들에게 초록색과 갈색의 두꺼운 종이로 작은 야자나무를 만들어 책상 네 귀퉁이에 붙이자고 했다. (…) 이튿날 여자 아이들은 머리에 종이꽃을 달고, 남자 아이들은 선글라스와 밀짚모자를 썼다. (…) 그다음 날 닉은 집에서 가져온 작은 드라이버로 온도 조절기를 돌려 교실 온도를 32도까지 높였다. 아이들은 모두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맨발로 돌아다녔다. 선생님이 잠깐 교실을 비운 사이에 닉은 희고 고운 모래 열 컵을 교실 바닥에 쫙 뿌렸다. 디버 선생님은 아이들의 풍부한 '창의성'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 교장 선생님은 당장 모래 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디버 선생님은 앞줄 아이들에게 훌라 춤을 가르치고 있고, 웬 갈색 머리 꺽다리 녀석 하나가 웃통을 벗고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채 티셔츠 여섯 장을 묶어서 만든 네트 너머로 배구공을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 앤드루 클레먼츠, 『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p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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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집에서 아이들과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서 사용한 책인데

할 얘기도 많고 재밌는 책이었다.

구원이나 부활 개념을 너무 비속하게 만드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 대목을 보고 저 개념들을 떠올렸다.

 

여기서 벤야민을 생각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닌데

알다시피 그는 '아동(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아동의 '천진(天眞)함' 같은 개념에 별로 동의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읽고 나서 더 그렇게 된 나였지만

벤야민의 이야기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작년하고 올해, 이른바 '청소년문학' 범주에 들어가는 책들을 조금 읽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이런 책들을 읽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평범사와 계몽사의 어린이 문학 전집을 읽은 뒤

사춘기/중학교 시절에 이상하리만치 책을 읽지 않은 나는

(이런 도식을 약간 무리하게 사용하자면) '동화'의 세계를 떠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문학은, 말하자면 약간 교육적 차원에서,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기획된 책들인데, 물론 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철학적이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청소년문학

(사실 이건 흔히 '동화'로 번역되는 '메르헨'(Märch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텐데)

은 미하엘 엔데의 책들이다. 『모모』야 이제 워낙 유명하지만,

『끝없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민중의집에서 청소년 독서토론교실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썼던 책이

저 『끝없는 이야기』였는데, 당시에는 이 책을 한 번에 다뤘지만,

지금이라면 몇 차례로 나눠서 더 꼼꼼히 할 것이다.

이 책은 '자유'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그 귀결을 사람들과 토론하는 데

가장 좋은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과도.

 

성인들과 한다면, 메르헨의 문학사적 지위를 다루고,

아동기 개념(그리고 미메시스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을 검토한 다음,

엔데의 소설 말고 다른 메르헨(벤야민 전공자 윤미애 교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쓴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예컨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추가할 수 있다.)

을 함께 보는 식으로 짤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작년에 아이들 수업을 짜는 중에 든 착상인데

모르긴 해도, 특히 독일 예술/미학 등의 전공자라면, 이런 식의 커리큘럼을 이미 짰을 법도 하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만, 어쨌든 이 내용은 나중에 한 번 정리해 보고 싶다.

구원과 부활이라는 테마를 메르헨과 연결시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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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5 19:35 2009/06/1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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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루로드 2009/06/15 22:08 # M/D Reply Permalink

    내용들이 어려워서 덧글이 없는긴가. 글은 자주 쓰는구만.

  2. 아포리아 2009/06/16 14:33 # M/D Reply Permalink

    얼마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것도 수집한 글만 올려서 거의 죽은 블로그였어. 댓글은, 옛날부터 내 글엔 댓글이 잘 안 달리더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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