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부활

"폭격기를 보면서 인간의 비행에 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대를 기억하게 된다. 그가 공중으로 떠오르려 했던 것은, '산꼭대기의 눈을 가져다가 한여름 뙤약볕으로 이글거리는 도시의 거리에 뿌려주기 위해서'였다."

-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p. 317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새로운 것 일반에 매혹되진 않는다.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죽지 않는 것들',

바뀐 상황 속에서도 그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되돌아오도록 만드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이다.

대추리에 관한 나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 중 하나는 대추리 주민역사관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937)

그 곳 한 편에 주민들의 기억이 담긴 사진들을 진열해 두었었는데,

그 사진들을 감싼 액자는, 마을 곳곳에 버려져 있던 책상 서랍들을 수집한 것이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집에서 우연히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아주 옛날 사진들이 있었고, 거기엔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그 때부터 서랍과 기억을 연결시킨 작품을 언젠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런 착상에 따라 이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당시 벤야민을 띄엄띄엄 읽고 있던 나에게

그건 정말이지 놀라운 감동이었다.

잊힌 기억일 뿐만 아니라 버려진, 또는 강제로 빼앗긴 기억의 표징 자체인 '대추리의 서랍',

그것들이 죽지 않고 다시 예술 작품으로, 투쟁의 상징으로 되살아나는 장면,

벤야민이 말하는 저 '구원'(redemption)을 눈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노무현에 대한 나의 환멸이 그의 죽음에도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저 대추리를 파괴했고, 게다가 그걸 여전히 치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봉화에 온 용산 주민들에게, 자신이 미군기지 내 보낸 덕에 용산 땅값 올랐으니 고마워하라

고 말하면서 웃는 노무현을 TV에서 보고 얼마나 끔찍했던지!)

 

구원과 부활. 돌이켜 보면 이 말들은 나를 항상 사로잡았다.

기억이 닿는 한에서는, 아마 20여 년 전, 아마도 우리 또래에게 최초로 비극을 가르친,

<성모승천> 앞에서 죽은 네로를 만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와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1>

인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벤야민에게 그렇게 끌렸던 것도, 벤야민과 데리다를 '사진'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킨

카다바(Eduardo Cadava)의 Words of Light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 것도

구원과 부활의 현세적 변주라는 테마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돌파하고 싶지만 몇 년째 변죽만 울리고 있는 이 문제에 관해

더 늦기 전에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일요일 저녁에 책을 읽다 문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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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4 20:09 2009/06/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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