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서일까

나이 들었다는 얘기를 하는 건,

특히나 훨씬 더 많이 든 사람들이 들을 게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개인 블로그니까, 그냥 적는다.

 

전에도 약간의 조울증은 있었지만,

서른이 넘고 나니 빈도와 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것 같다.

아직 그리 많이 먹은 나이는 아니니, 이 나이 들어서 뭐 하나 이룬 게 없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진도로는 몇 년 뒤에도 제자리일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 같다.

 

스무 살 무렵부터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 얘기는 아예 차치하고,

대학 마치고 군대 다녀와서 막바로 사회에 나갔다 치면,

내 나이엔 대략 7~8년차 정도가 된다. 이건 좀 빠르다고 쳐도,

취직한 내 동기들이 5년차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다들 뭔가를 이룰 나이는 아직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나이이고,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뭔가를 할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20대의 적어도 어느 시점에 시작한 일에서 다소간 결실을 보고,

30대 내내 매진할 일에 적어도 '진입'은 했어야지 싶다.

작년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쎄...

 

때때로 인간은 개별자로 회귀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부정적인 건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그를 위해서나 그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나

좋은 일일 수 있다. 특히 '타락'이나 '관성'에 일침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랬을 때 문제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다른 방식의 조직에 속하는 데,

또는 기존의 삶과 조직에 다른 방식으로 속하는 데,

이 개별자가, 적어도 잠재적이라도, 다소간의 능력, 또는 차라리, '기술'

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내가 우울한 진짜 이유는, 아마 그렇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기회일 수도 있다.

나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게을렀다기보다는,

다른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여,

다양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반작용할 수 있는 '변용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고,

그렇다면 문제는 나태보다는 '여유부족' 쪽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대의 터널은 어두웠다.

그런데 어쩌면 20대는 너무나 밝아서 눈이 껌껌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불이 가장 활활 타오를 때라서 그 빛에 눈이 머는 것이다.

[그러니] 터널 안이 어둡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상은의 이 말을 들은 게 2004년이었다.

몇 년 전에 이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다들 30대가 되면 슬프다고 말했지만, 20대의 나는 이 시간만 지나고 나면,

뭔가가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차, 20대를 허송했으니까.

또는, 20대에 내가 하던 그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일을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분명한 것이지만, 내 일만의 책임은 아니다. 문제는 좀더 복잡하며, 나 자신의 책임이 실은 크다.

나 이외의 다른 것을 원망하는 걸로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덜 우울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문제는, 나의 주된 욕망이 아직 '학생'이나 '도제' 쪽에 있는데,

나의 나이는 내게 좀 더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명쾌한 해결책은, 좀 더 책임 있게 살거나, '도제'로서의 욕망에 좀 더 충실하거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기억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잊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태를 정식화한다고 할 때, 여기서의 문제는

내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도제의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내가 무책임하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배움에 대한 욕망을 누르거나 또는 일을 이유로 그것들을 배반하며 살다가, 언젠가

더 강한 욕망을 더 늙어서 만나서,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도 없는 우울증

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실 정답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이제껏 이런 문제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이렇게 결론짓곤 했다.

하지만 30대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나는 별다른 제약과 규율 없이,

나의 여러 욕망들을 위해 열심히 살 만큼 성실하고 활력 있는 위인이 못 된다.

나에게는 영웅적인 자제력 따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이 '배움'이라기보다는 '도제'인 것은,

나에겐 내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자극하며 때때로는 강제하기까지 하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치에 진입하려면, 시간(책임있게 살려면 이런 곳에 허비해서는 안 되는!)이 필요하고,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지금껏 대개는 허비하고 말았지만, 전보다 시간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여전히 나이에 걸맞는 책임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지지만,

그것과 부분적으로는 겹치고, 부분적으로는 타협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가능하거나 적어도 눈감아줄 만한 욕망을 도모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때 아주 구차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돈이다.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내 우울함은 조금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결심을 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적어도 일주일간은 그런 결심의 시간조차 없긴 하지만.

이번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삼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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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04 17:32 2009/06/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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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험가 2009/06/22 07:35 # M/D Reply Permalink

    잘 읽었다! 책임, 허송(?!), 우울, 가난, 돈 모두 절절한 단어다.

  2. 아포리아 2009/06/22 10:23 # M/D Reply Permalink

    ㅋ 넋두리에 맞장구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짱님 들으시는 데 나이 얘기해서 죄송하기도 하구요. ^^; 머리는 복잡한데, 미뤄뒀던 일들과 새로 해야 할 일들이 겹쳐서 더 우울해지네요. 어쨌든 7월이 되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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