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다녀오다

#1.

의미없는 번호가 되리라는 걸 알지만 그냥 아무 말이나 하게 될 것 같아, 이럴 때는 이런 게 편하다. 맥주 몇 잔인데도 좀 취했다.

 

#2.

집에 다녀왔다. 급하게 다녀왔다. 2박3일이라는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물리적인(시간이 과연 물리적인 건가?) 시간을 떠나 급하게 다녀왔다. 왜?

 

#3.

집에 내려가서 잠만 자다가 온 셈이다. 둘째날.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먹고 잤다. 코고는 소리가 하루종일 끊이지 않았다며 엄마는 쉬엄쉬엄 살라셨다. 피곤해서 잔 건 아닌 듯한데 속상하다. 애써 내려가서 걱정만 시키고 왔다.

 

#4.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에 닿는다. 공항까지 오가는 시간 쳐도 두세시간. 그래서인지 집에 다녀오는 것이 일상을 많이 벗어나는 것 같지 않은데 괜히 오늘은 집 생각이 난다. 집이라기보다는 엄마아빠 생각.

 

#5.

내가 사는 집은 서울 구석에 따로 있는데도 집은 늘 그곳에 있다. 집. 그게 집인가보다.

 

#6.

별을 보려고 나갔던 텅빈 학교운동장에는 달무리만 무심하게 있었다.

 

#7.

<유랑가족>을 읽었다. 영주가 찾아가려던 남쪽나라 푸른바다에는 검은 바다만 있었다는. 그 검은 바다는 슬쩍 내비치려는 눈물까지 핥아가더군. 공선옥. 소설가라기보다는, 빈한한 이들의 이야기를 감히 눈물 흘릴 수 없게 끊임없이 말하는 이야기꾼 그녀가 좋다.

 

#8.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돌았다. 널찍하게 잔디가 깔린 곳이 예전에 포장마차들이 즐비하던 곳이라는 아빠의 말. 철거되는 과정에서 그럭저럭 보상을 받았는지, 멀찌감치 보이는 횟집들이 모두 그 포장마차가 흘러간 곳이란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이런 데가 장사가 잘 되어야 할텐데. 이런 데가 영세민들이 하는 곳인데' 한다. 왠지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은 느낌이 잠시 스치기도 했으나. 그/녀들이 어디로 갔는지 놓치지 않는 아빠가 좋았다. 그래도. 주욱 늘어선 횟집의 마지막 집 하나에 손님이 겨우 보이더군.

 

#9.

그렇다구. 여전히 술이 적당히 오른 듯하고 집에 왜 다녀왔는지는 모르겠고 왜 다녀왔냐고 묻는 나는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구. 그런데. 집에 왜 다녀왔냐고 묻는 나를 모르겠다고 묻게 만드는 이 세상에 꼬장부리고 싶은 마음은 마지막 취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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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8 00:39 2005/08/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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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슴벌레 2005/08/18 01: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기분 좋게 취한 거 같은데요. ^^

  2. 미류 2005/08/19 12: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헤헤... 히히... 스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