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살던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당시 집주인은 집을 크게 수리하려는데 기간이 오래 걸릴 듯하니 아예 이사를 가라고 전화를 했다. 이사 다니는 데에 질린 나는 그냥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공사 기간 동안 친구 집에서 지내고 다시 살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막무가내, 보증금을 빼줄 테니 이사를 가라는 말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집에 도둑이 드는 일이 생기고 똑같은 얘기를 전화로 반복하는 것도 귀찮아진 나는 살던 집에서 나왔다. 몇 년 후 들른 그 집터에는 고급빌라가 눈부시게 올라서 있었다.

임대차계약기간은 물론 남아있었지만 나는 당시에 임대차보호법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집에 계속 거주할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계속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공사로 인한 불편함을 내가 감수하겠다는데도 나가라는 이유를 꼬치꼬치 따져 물을 생각도 못했다. 이제 임대차보호법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으나 그 법이 아무 도움이 안됐을 거라는 사실까지 알아버렸으니 차라리 다행일까. 

 

계약기간이 2년으로 정해져있으니 법적으로 거주할 권리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대개는 ‘합의’를 내세운 이사비용 약간을 받고 세입자들이 쫓겨나게 된다. 나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미련하게 쫓겨난 세입자도 억울하지만 적당히 돈을 받고 쫓겨난 사람들도 속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계약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집주인은 계약기간이 끝나기 한 달 전까지 나가라거나 돈을 더 내라거나 그대로 살라는 통지를 할 수 있다. 세입자 역시 말은 할 수 있다. 나가겠다거나 돈을 덜 받으라거나 그대로 살겠다거나. 그러나 모든 권력은 집주인에게 있다. 나가라면 나가야 하고 돈을 더 내지 못해도 나가야 한다. 세입자의 주장이 우선하는 경우는 집주인이 계속 살아달라는데 나가겠다고 하는 경우뿐이다. 어느 경우든 세입자가 나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직 집주인의 ‘자비’가 있을 때만 세입자는 계속 거주할 수 있다. 

그러니 너도나도 집을 사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당연하다. “집은 소유가 아니라 거주”라는 공익광고는 얼마나 무안한가. 가난할수록 ‘내집마련의 꿈’은 절박하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어떤 수익이 발생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자주 쫓겨나고 주거비 때문에 허리가 휘고 그러면서도 장마철이면 비새고 겨울에는 외풍이 드는 집에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벌써 60년 전에 보편적인 약속으로 자리 잡았다. 그 내용은 누구나 안다. 집을 구할 때 따져보는 모든 것, 그 중에 기대수익만 빼면 그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에서 정리한 주거권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부담할 만한 비용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내 발로 나가기 전에는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이제 ‘내집마련의 꿈’에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탈바꿈해 질타당하거나, ‘능력’으로 칭송받으며 부동산시장을 떠돌다가 오히려 스스로를 밀어내는 그 꿈에 주거권의 실현이라는 제 옷을 입혀주자.

못된 집주인들이 문제가 아니다. 집주인들이 언제든 못되게 굴 수 있는 구조가 문제다. 임대료를 통제하거나 보조하거나 임대기간에 대한 우선권을 세입자에게 주는 정책들은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거다. 2년마다 이사 다니는 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되기는커녕 당연히 여겨지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인권침해’ 경고카드를 날려야 한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국민이 정부를 상대로 살만한 집을 내놓으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까지 법으로 만들고 있다. 가랑이 찢어질까봐 당장 따라하라는 얘기는 참지만 살고 있는 집에서 내쫓기지 않을 권리는 보장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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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 에 보낸 기사. 색깔을 입힌 부분이,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부당한 건데,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날라갔나 보다. 윽. 원고 분량을 정확히 확인했어야 했는뎅... 쨌든 세입자의 주거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많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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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3 13:23 2008/08/1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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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류 2008/08/13 13: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버뜨... 쫓겨난다는 느낌이나 서럽다는 정서가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조차도, 참, 음...

  2. su 2008/08/13 16: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론들은 지면이 모자랄 때, 꼭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짜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크

  3. 미류 2008/08/13 19:0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짤린 부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기도 하죠. 큭. ^^;;

  4. 안티고네 2008/08/20 18: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 나도 중요한 부분이라서 미류가 표시해둔줄 알았는데...이런이런~

    자취하면서 이사다녔던 그 경험들...정말...ㅠㅜ
    쫓겨난 적은 없지만,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는 그 서러움의 감정은
    분명 느꼈던거 같아요.
    심지어 나는 임대차보호법도 알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중요한 순간에는 이런 류의 '보호법'은 무력하다는걸 알고 있었달까~


    마지막 문장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