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87쪽. 

 

...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는요, 정말." 아룬다티가 대답한다. (...) "민주주의의 기관들 하나하나가 위험한 어떤 것으로 오염돼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단 하나의 약탈적인 유기체가 되어 늘 이윤의 극대화라는 생각 주변만 맴도는 가늘고 제한적인 상상력만 남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진행을 되돌리는 게 가능할까요? 이미 변신해 버린 무언가를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요?"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 형용사는 시간적인 것인데. 어쩌면 가능한, 그리고 적절한 반응은 공간적인 것이 아닐까. 현재의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 현재에서 구원해낸 그 무엇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 이야기꾼이 종종 그 일을 할 수 있다. 

저항하는 이들의 거부는 그때 이야기 속 여성과 남성, 아이 들의 길들여지지 않은 울부짖음, 분노, 웃음, 그리고 그들을 비추는 빛이 된다. 서사는 순간을 지울 수 없는 무엇으로 만드는 또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들릴 때, 선적인 시간의 흐름은 멈추고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는 의미 없는 것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오시프 만델스탐은,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전에 이런 정확한 말을 했다.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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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8 09:02 2013/07/0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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