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강의>

미류님의 [강의] 에 관련된 글.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이라고 일축하면서도 '성찰'을 위한 고전읽기를 권한다.

 



[주역], [논어]를 거쳐 노장과 묵자, 법가까지 읽어내리는 <강의>는 선생이 말한 대로 철학에 대한 책이기보다는 도에 관한 책이다.

 

선생이 고전을 일러주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보인다.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여러 사상들에서 배울 점들을 주로 가려내어 두루두루 살피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좋은 말들을 많이 모아놓은 것에서 더도 덜도 아닌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내가 그렇게 읽은 탓도 있다. 열심히 읽는다면 고전에 대한 욕심을 자극할 책일 수도 있겠지만 선선히 읽으며 마음을 닦을 요량이었다. 한문을 읽어보라시는데 한자공부할 생각도 안하고 선생이 읽어주는 대로만 읽었으니 동양의 사상을 공부하겠다는 욕심은 애초에 없었나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선생의 비판은 슬며시 드러나는 데에도 불구하고 치열하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위한 사상투쟁을 '깨달음'이라는 말로 정리하며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붉은 글씨로 써내리지 않아도 치열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성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듯하다.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한다.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이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책에 소개되는 많은 문구와 이야기들을 읽으며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갸우뚱거려졌다. '참 한심한 사람일세'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

 

선생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라고 마무리한다. 물론, 인성의 고양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닦을 요량으로 책을 집어든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닌 듯도 하다.

 

하지만 심란한 마음에 집어든 요며칠의 책읽기는 부끄럽기만 하다. 책만 읽어서 인성이 고양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 책은 잠언집이 아니다. 그리고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록도 아닌 듯하다. 나는 문장과 문장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드러나는 선생의 성찰하는 모습, 그것을 엿보고픈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이라고 말하는 선생의 사상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된 듯하다.

 

** 주역, 노자, 굳이 덧붙인다면 장자를 이야기하는 장은 흥미롭기도 했다. 고전읽기에 대한 욕심이 나기도 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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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2 16:12 2005/08/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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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콩!!! 2005/08/12 19: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 역시 탁을 가지러 가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돌아보는 동시에.
    종종, 정말 종종, '발을 믿지 못하겠으니 탁을 가져와달라'는 요구를 듣고 사는 것 역시 현실입니다.

  2. 바다소녀 2005/08/13 15: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님 덕에 '굶주리는 세계'를 읽었더랬지요.
    (제대로 읽지는 않았어요. --;;)
    '강의'는 대에~충 괜찮아 보이길래
    선물만 주고 정작 저는 안 읽었어요.
    일단 책부터 사서 한 페이지 씩 읽어 내려갈까나 생각중.
    두뇌가 책을 받아 들이지 못한지 오래되어서 사 놓고
    안 읽을까봐 좀 그렇네요... 좋은 글 언제나 감사. ^^

  3. 미류 2005/08/16 14: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콩, 어떤 요구인지 짐작이 가네요. 발이 늘 탁에 앞서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죠. 신영복 선생인 책을 빌어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지도 않구요. 저는 다만, '돌아보는' 것에 대해 배웠답니다.

    바다소녀, 이 책은 띄엄띄엄 읽기에도 괜찮은 책인 듯해요. 저도 1년 안에만 읽자, 뭐 이런 생각으로 집어들었거든요. 어쩌다 후루룩 끝내버리기는 했는데 천천히 쉬엄쉬엄 보세요~ ^^

  4. 왕도비정도 2006/01/31 22: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두 요새 이 책 읽고 있는데.. 관계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제 인간관계들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참, 선생님의 치열함이 페이지페이지마다 녹아있어서 즐겁게 보고 있어요.: )
    같은 책 보신 분을 뵈니 왠지 반갑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