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님의 [[포럼] 차별과 표현의 자유의 경계]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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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글 쓸 시간을 기다리다가는 밑도끝도 없이 시간이 흐를 듯, 그래도 포럼 전에 잠깐이라도 고민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pause. 진보불로그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반여성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잘 살피지도 못하고,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괜히 빚진 마음도 쌓이고. 어쨌든 일단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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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은 주로 어떤 '표현'을 둘러싸고 시작된다. 그래서 대략, 차별적 표현이니 안된다와 표현의 자유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건 차별에 대한 성찰도 가로막고 자유에 대한 성찰도 가로막는 구도. 그러면 어떻게? 그건 모르겠다. 적어도 '표현'만이 쟁점이 되는 건 피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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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표현은 그 표현을 만들어낸 맥락 안에 놓여 있다. 누군가가 "나는 외국인이 싫어"라고 말할 때, "나는 호모포비아야"라고 말할 때, 문제는 그 표현들 뒤에 숨어있는 맥락들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혹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떤 조건에서, 이 표현들은 차별을 선동하는 표현일 수도 있고 개인적 소회를 밝히는 표현일 수도 있다. 개인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라고 문제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한 가수가 '호모포비아'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고,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호모포비아인 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얘기를 한 걸 봤다. 그러면서 그건 표현의 자유래. 웬. 호모포비아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억압에 기반을 두고 번성하는 차별이기도 하고, 특정집단을 대상화해(이런 경우 대상화되는 집단은 주로 사회적 소수자) 그 집단에 불이익이나 부당한 대우 인격적 모멸 등을 정당화/선동하는 것이기도 하고, 등등 어쨌든 문제인데, 호모포비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표현의 권력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성애포비아라는 말은 없는데(없다기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거나 일반화되지는 않았는데) 호모포비아라는 말은 번성하는 조건을 봐야지. 그러니 그 '표현'에 '표현의 자유'를 갖다붙이는 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엉뚱하다. 그건 그냥 니맘대로 표현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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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표현에서 차별을 읽게 될 때(특히 표현의 자유랑 엮이면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 대체로 문제는 표현 자체보다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차별인 것 같다. 그래서 표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디선가 미끄러지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표현의 자유'가 마치 쟁점인 것처럼 부각되면서, 오히려 그 표현에서 드러난 차별의 문제는 자유로운 생각의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흔히 듣게 되는 말처럼, "차별적으로 들렸다면 미안한데 난 그냥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류의. 그러면 사상양심의 자유? 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또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 맥락에 문제를 느끼는 건데 어떡하니. 그러니 이건 차별적이라고 문제제기된 표현을 삭제하더라도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이 마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구도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러면서 그 '표현'을 한 사람들은 소신을 지키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 문제가 되었던 차별을 지워버린다. 그러니 이런 건 니맘대로 표현하는 것일 뿐더러 오히려 차별에 문제제기하는 표현을 억압하는 것. 억압도 자유니. 억압에 맞서는 게 표현의 자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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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예저어언에 어떤 소설을 읽다가 에이즈에 대한 편견에 기댄, 그리고 편견을 심화시킬 수 있는(나는 그렇게 읽었다) 표현을 보고 소설가에게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책 읽고 글쓴이에게 이메일을 보낸 건 그때가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인데, 두세번 메일을 주고받은 것 같다. 그 소설가는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나 감염인에 대한 차별을 걱정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끝내 자신의 글이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에이즈가 사실 성적으로 문란해지면서 생긴 것 아니냐는 말도 했던 듯. 허걱하고 더이상 메일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책을 다시 인쇄하게 되면 수정해서 인쇄해주길 바란다는 얘기를 했다. 소설 제목이 기억 안 나네, 참. 손석춘이 마르크스의 삶을 재구성해서 쓴 거였는데. 어쨌든 그때 참 갑갑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은 잘 팔리고, 난 일개 독자일 뿐이고,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하는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는데.

물론 그가 문장을 약간 수정했다면, 해피엔딩이기는 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문장의 수정이 작은 이벤트밖에 안됐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와 에이즈인권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을 테고 적어도 수정 이후의 판본을 읽는 독자들 중 감염인이 있다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테고, 적어도 편견이 심화될 수 있는 표현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책 밖에서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넘쳐나고 지금도 질병관리본부에서는 기가 차는 계획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적어도 문장의 수정이 차별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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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니 표현을 문제삼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표현을 문제삼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 표현을 못하게 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지 않을까. 대개의 경우에도 어떤 표현에 문제제기하는 경우는 그 표현에서 드러난, 당신의 인식이나 습속이나 특징이나 또는 사회적 맥락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걸 '표현'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라며 성찰의 장을 봉쇄하려는 의도 또는 무의식적 방어. '표현'을 삭제 또는 금지하는 방식의 접근 역시 성찰의 장을 봉쇄하는 효과를 낳을 뿐. 이건 전형적인 표현의 자유 억압 문제에서 확인되는 거니까.

그러나 모든 공동체는 어떤 표현을 금지하거나 삭제할 수 있다. 어떤 표현은 표현 자체로도 차별을 선동하거나 억압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금지될 수도 있는 표현의 경계는 공동체마다 다를 테고 금지하는 방식도 다를 테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중요한 목표는 표현의 금지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에서 드러나는/선동되는 차별에 대한 성찰이 아닐까. 그리고 표현을 금지한다는 것의 의미는 사실상,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기 싫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결국 '표현'을 넘어선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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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시간이. 흑. 정작 진보불로그에서 오가는 얘기들이랑 잘 만나지는 못했넹. 사실 읽은 글이 몇 안돼서 분위기 파악은 안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라론의 첫 글도 별로였지만 사과문이라는 글이 초큼 많이 아쉬웠다. 첫 글에서 드러난 반여성적 맥락은 다만 그 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데, 표현들 뒤에 버티고 있는 것에 작은 틈도 벌어지지 않은 느낌. 쩝. 그 표현들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은 결국 다시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 힝. 그 몫을 나누지 못하는 게 빚진 마음의 뿌리인 것 같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응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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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0:49 2010/08/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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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10/08/11 13: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도 적극 참여하지는 못했는데 빚진 마음은 갖지 않으려고. 관심이 없다면 하는 수 없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굳이 덧글이나 포스팅 안하더라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관련글 한 두 가지 읽어보는 것만 해도 이 더위에 쉽지 않은 일일 듯.

  2. 미류 2010/08/12 12: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응 빚진 마음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내 자리에서 나름의 고민들을 풀어보려는 건데 그 자리와 블로그의 관계가 고민인 듯해. ㅎ 어렵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