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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술 때문이었다.
정작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서는 싫은 것을 싫다고 잘 못하고, 남 기분 상하게 할까봐 눈치도 많이 보고, 그렇다고 눈에 안띄게 요령피우는 것도 할 줄 몰라서, 억지로 술 많이 먹이는 선배나 손윗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많이 취하고 만다.
그날도 그랬다.
동문의 까마득한 선배들이 테이블 양쪽으로 주루룩 앉아있었는데,
2차였던가, 맥주집에 갔을 때 옆에 앉은 선배가 하필 위스키로 폭탄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먹어보는 그 폭탄주를 석잔인가 넉잔인가 먹여지고 나서
나는 몽롱해진 정신에도 평소 취하는 속도보다 너무 빨리 취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집에 가기 위해 무작정 자리를 떴다.
지하철로 가는 도중에도 땅이 점점 더 많이 흔들리고 주위가 빙빙 돌아갔다.
집까지 가는 지하철에 타서 맨 가장자리 자리에 앉아 철봉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나선 아마 잠이 들었을거다.
다음 순간 기억나는 것은,
누군가 나를 부축해 지하철 역사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지?' 얼핏 보니 선배 같았다.
나는 선배 이름을 부르며 집에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뭘 벌써 가냐며, 다들 이 근처에 있는데 그리로 가자고 했다. 자리 옮겨서 또 술마시러 간댄다.
바깥에 나와서 찬바람을 쐬니 정신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 때 난 그의 팔에 팔짱이 끼워진 상태로 이미 어떤 건물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술집이 아니었다.
머리속에서 알람이 울었다.
순간 그의 팔에서 몸을 빼내려고 해보았지만, 내가 똑바로 걷기도 힘든 상태라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밝은 불빛을 보자 이게,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바로 나한테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데 여긴 어디지? 이 사람은 누구지? 선배인데? 아닌가? 다들 어디간거지? 이게 어떻게 된거야! 나는 혼란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머리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어느새 나는 엘레베이터에서 이끌려나와 어떤 문 앞에 서있었고 그는 그 문에 키를 꽂고 있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왜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았냐고 물으면, 나는 너무 취해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다가 잡혔을 것이 뻔하다고 항변해야 한다. 글쎄, 그가 정말 나를 잡으러 왔을까? 그리고 나는 잡혔을까? 모른다. 하지만 잡으러 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다 잡히면 왠지 나를 죽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모텔인 것 같은 이 곳에서 어떤놈한테 죽는 것은, 그래, 저 안에 들어가 이새끼한테 당하는 것보다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도망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 할 수는 없었다. 안했는지 못했는지, 나 자신에게 자꾸만 묻지만,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질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게 한다는 것 뿐이다. 안한 것이기도, 못한 것이기도 하다. 인생 최악의 무력감을 느끼던 그 순간에도, 그래, 나는 분명 선택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될지 모를 선택을.
그런데 말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놈들은 대개 죄책감을 못느끼는 것 같단 말이다. 그래서 빌어먹을 죄책감은 그놈들 주려고 잘 놔뒀다. 늬들 분실물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 제발 좀 찾아가라고.
그래도 누군가는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할테지. '뭘, 사실 니가 원해서 도망치기 싫었던 거 아니야?'
..... 엿먹어라 씨발놈아.
그래도 팔 다리 다 달려있는 몸뚱인데 내 몸이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덩치도 커다란 그는, 버텨보려는 나를 방안에 밀어넣고, 그리고 나서 어찌어찌해서 나는 침대 위로 던져졌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리는 거의 알코올에 잠겨있는 상태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보기 위해서 불을 켜려고 했지만 그는 스위치 쪽으로 뻗는 내 팔을 결사코 막아냈다. '어쩌면 얼굴 보면 죽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에 나는 더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내게 남은 무기가 정말이지, 정말 우습게도 말이지, 말할 수 있는 입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나를 강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지만, 그가 내 몸 위로 올아와서 침이 흐르는 입술을 얼굴 여기 저기에 들이대려고 했을 때, 나는 도무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는 그에게 무작정 선배라고 부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요 선배. 좀 진정하고 저리 가봐요. 술취한 후배 데리고 와서 이게 뭐예요. 지금이야 선배도 취해서 이러고싶겠지만, 내일을 생각해봐요. 내일 아침. 쪽팔리겠죠? 아니라구? 뭐가 아니에요, 내가 다 말하고 다니면 어쩌려고. 선배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다 아는데. 그리고 선배 배나온거 봐요. 에그. 결혼 안했다 그러면 누가 믿겠다. 정말 지금 관두면 내가 아무한테도 얘기 안하고 용서해줄게요. 네? 걱정마요. 네?'
이런 소리를 푼수같이 조잘 조잘 떠드는 동안도 그는 나를 찍어누르고 윽박지르기도 했고 나는 나름 그를 밀어내려고 바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의 목표는,
'너의 발기를 막겠다' 였다.
그러던 중 그가 셔츠를 벗었는데 내 계획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는 흰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 때부터 낄낄낄 웃으며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 아 근데 웬 난닝구에요! 완전 챙피하게! ㅋㅋㅋ 선배 패션감각 진짜 죽인다. ㅋㅋㅋ 누가 요즘 난닝구 입어요! 아오 선배 진짜 실맹이야. 아, 진짜 이제 됐어요. 난닝구 입고 달려들면 어떡해요, 챙피해요 빨리 셔츠 입어요. 좀. ㅋㅋㅋㅋ 선배 나 진짜 난닝구 입는것도 비밀로 해줄게요. 셔츠 입고 빨리 집에 가요. 네?'
그러자, 그는 욕을 하면서 물러났다.
그는 날더러 앉으라고 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좀 더 하다가 나를 보내줬다.
그 방을 나오면서 그래도 그놈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이런짓 하지 마라.'
방문을 나서는데, 뒷덜미를 낚아채여 다시 끌려들어가는 환상이 내 머리채를 잡고 딸려나와
아스팔트 길바닥에 까지 따라 왔다.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한테 신경 안쓰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다리가 풀려서 웅크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짚고
눈물은 적고 숨만 요란한 이상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직후부터 또다른 충격을 경험해야했다.
내 전화를 받고 거의 정신이 나간 나를 도와주러 온, 내가 정말 믿고 있었던 사람은, 사건 전말을 듣더니 내가 주체못할 정도로,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술을 많이 마신걸 나무랐다. 그리고 내가 차마 부모님이 계신 집에 못들어가겠다고 해서 그는 다른 모텔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울다 잠든 그 다음날 나에게 자는 모습이 어땠다느니, 남자인 자기와 단둘이 모텔에 가는데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걸 보면 자기를 정말 믿는가보다느니, 요즘 어린 애들이 모르는 사람이랑 성관계 갖는 거에 대해 엄청 개방적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정신이 나갔거나 내가 정신이 나간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얼마동안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ease에서, 진단받은 건 아니니까 disease는 빼고, 대충 그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 고생을 좀 했다.
잠시라도 짬이 나면 그 때 일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분노에 차서 부들부들 떨고있고(자신에 대한 분노도 포함해서)
뒤에서 누가 날 부른답시고 건드리면 옷속에 벌레라도 들어간 것처럼 화들짝 놀라고
그리고 덩치 큰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어찌보면 그런 일 끝에 겪는 것이 너무 당연한 증상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서 바쁘게 사느라고 증상과 기억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점차 흐릿해졌다.
그런데 말이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모양이다.
정말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겪은 특별한 불행이,
어쩌면 이 술먹은 세상의 따악 보통치 평균인 것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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