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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월

1월 26일

연휴 때 다운받아 본 영화 목록


- 우리는 액션배우다.

흔히 스턴트맨이라 불리는 액션배우를 지망하는 젊은 남녀의 (주로 남자의) 이야기.

다큐멘터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 나래이션이 맛깔 난다.

학원 샘중에 한예종을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꽤나 깊이 관여해서 만든

영화. 놀랍다.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노래나 영화를 볼 때마다 살짝 감탄이

작품의 오라에 따라 그걸 만든 사람도 달라 보인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액션배우를 지망하게 되었고 그 결과도 제각각인, 그래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진부하면서도 하나도 진부하지 않은, 짠하고 놀랍고 서글프고 그리고

평범한 이야기. 보통 사람들의 특별했던 삶의 한 순간. 을 담은 이야기.


- 공각기동대 2

오시이 마모루가 실사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살짝 들었던 기억이. 작년 전주 국제 영화제

다녀온 친구들이 했던 말인데...그냥 신작 애니가 나왔다는 말을 잘못 들은 것인지??

공각기동대 2를 봤다. <블레이드 러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에 대한 회의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인간이 '정보의 집합체' 그 이상이 아니라면 과연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끝없는 질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섬세함의 덧칠을 가할수록 질문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제는 아예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넘어서 인간과 네트워크화된 프로그램의 차이를 묻는다.

자가 증식하면서 진화하는 단계로 들어선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자립을 원하고,

그 순간 인간은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어 버린다.

조금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전쟁과 과학의 발전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대할 때마다, 이 쯤에서 발전 따위는 아예

집어던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더 필요하긴 한가?

그냥 mp3플레이어니 인터넷이니 pmp따위 정도의 소소한 욕망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가지려 할수록 마음은 비어간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생겨난 욕망은 사라질 수 있을까?

예전에 읽었던 만화 [총몽] 생각난다.

'기억이나 관념을 빼고 나면 넌 뭐가 남지?? 기억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면 인간이란 무엇이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기억과 몽상과 사색을 빼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는 요즘이라 그런지

유난히 저런 대사들만 기억에 남는다. '넌 무엇으로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거야?'라고 재촉하는 듯

들려.



인간보다 더 인간이기를 원하는, 인간보다 무엇이 인간인지를 더 많이 고민하는, 오히려 그래서

더 인간같은 그들이 차라리 작가의 아바타 같다.



- 다세포 소녀

한국 사회에 대한 조롱인가? 현실비판적인 작품이 점점 환타지에 많이 기대는 이유는 ....

촌스럽다, 부담스럽다 따위의 비판을 빗겨가기 위한 궁여지책 혹은

상상력의 작동 혹은 아이러니나 우화 따위??

뭘로 생각해도 이 작품은 실패다. 감동적이지도, 재밌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물론 중간 중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도 한 서너번 그 뿐이다.

피라미드에 빠진 엄마의 돈을 갚지 못해 모텔로 끌려간 김옥빈. 교복을 입히고는 ....

같이 여고생 복장을 하고 사진찍고 수다 떨고 노는 걸 즐기는 크로서 드레서 조폭.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하는(M to F)동생에게 포르노를 보여주고 발기하자 이게 현실이라고

외치는 상황 설정.

왕따가 된 외눈박이가 축구부 주장에게 동성애 상대로 묘사되는 장면 등등....

이건 뭐 참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묘한 서글픔이나 날카로움 따위도 없고.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고..

블랙 코메디는 더더욱 아니고. 그냥 조잡한 코드와 조합과 난기류의 연속이다.

구성도 엉망이고 서로 다른 이야기 서 너개가 중구난방으로 배치된 느낌이고...

등짝에 가난이 붙어 다니는 익숙한 코드 말고는 친밀감을 표시할 무언가가 없다.

[좋지 아니한가]를 볼 때도 그랬지만, 구질구질한 일상에 똥침을 날리고 싶어했던 영화들은

막연한 마지막 한방을 기다리게 만들다가 이도저도 아닌 허탈한 결말로 끝나버린다.

감동도, 웃음도, 날카로움도, 그 무엇도 아닌.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환타지도 아니고 뭐야??


환타지는 <지구를 지켜라>, 드라마로는 <천하장사 마돈다>





1월 23일

확률/통계 수업을 한다.

'남학생 4명과 여학생 3명이 원형 테이블에 앉는데...' '남학생 4쌍과  여학생 3쌍이

자원봉사를 하는데...' '남학생 5명과 여학생 3명이 토너먼트로 경기를 진행하는데....'  등등등.

모든 문제가 남학생이 먼저고 여학생은 나중에 나온다. 확률/통계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경우를

나누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언제나 기준이 되는 것은 남학생이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문제가 불편해서, 내 반응은,

'여학생들도 수학과에 많이 가서 문제를 바꿔라.' '왜 늘 남학생이 더 많은지 이상하지 않느냐?'

'수학 교사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라 늘 문제가 이런 식이다.' 따위의 반응을 한다.

더러는 웃고 대부분 아무 생각 없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남학생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껏

적극적인 동의를 표하는 학생은 딱 한 명 있었다. 그 학생은 영원히 까칠하단 소리를 들으며 클 것이고

그걸 즐겁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맘이다.





메일을 확인했다. 가자 지구에 보내는 2차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는 메일이었다. 1차는 대체 언제

했었지? 부끄럽고 미안하고...2차 후원금을 보내야겠다.

돈만 보태는 건 아닌데...미안하지만...마음도 보낸다.





한겨레 목요일 섹션은 고민상담 코너가 있어 즐겁다. 격주로 카운셀로가 바뀌는데 오늘 고민은

대략 이랬다. 자기는 32 여자랜다. 능력도 있고 외모도 괜찮고 20대에는 연애도 자주했고....

그런데 지금은 조금 불안하고 결혼을 할 건 아니고 그렇다고 매달리지도 않고 ...

이거 말투가 점점 .... 난 외로울 뿐이고...근데 까칠하단 소리 듣고... 타협할 마음도 없고....

뭐 이런 식이다. 카운셀러의 결로은...황당하지만...귀여운 여자가 되라는건데...

(지난 주에는 김어준이 비겁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용감한 신세대 마초가 되라하더니...)

지금 검색해보니 꼭지 제목이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이고 이번 주 제목은

<누가 귀여운 여자를 퇴짜 놓으랴> 였군.


뭐 다 공감하긴 어렵지만

"드세면서도, 머리에 든 게 많으면서도, 자립한 어른이면서도, 의식 있는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여자는 동시에 얼마든지 귀여울 수 있습니다."란 말을 들으며

이걸 남자 버전으로 바꾸면 뭘까 고민해봤다.

암튼 정말 잘나야겠군. 잘났다 잘났어. 카운셀러 잘났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일테고....

그러면서도 살짝 공감이 가는 것은... 그러면서도 참 피곤한 삶이군. 삶은 언제나....

이기적이야.




1월 19일

줄거리 전체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흐름은 기억나고 몇몇 장면이나 대사는 분명히 기억나서

꼭 본 것 같은, 근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대사는 어디 영화정보

프로그램 같은 데서 봤을 거고. 이런 영화는 미뤄둔 숙제처럼 언젠간 봐야지, 언젠간 봐야지 문득

문득 떠오르지만 막상 볼 생각을 하면 지겨워진다. 대충 알고 있어, 영화는 보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들고. 그런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이건 감상이 아니라 투자라는

기분이 든다. 숙제를 하자, 숙제를 하자. 이 영화를 봤다는 지적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뜩이나 산만한 터에. 이젠 동영상으로 다운 받아 보는 시대가 되니.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창을 조그맣게 줄여놓고 인터넷을 하기 쉽상이고 익숙하다 싶은 장면은 건너 뛰는가 하면

(곰티비 같은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은 정말 동영상 세대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
케이블 TV도 그렇고 정서안정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산만함만 더할 뿐. 너무 많고 넘쳐서
오히려 가볍고 헤프다.)

졸다가 되돌려보기 일쑤니 어지간해서 감정 몰입이 안 된다.



그런 영화 리스트 제일 꼭대기에 자리한 [봄날은 간다]를 봤다.
(홍상수나 김기덕 류의 작품이 이 리스트에 많다. 왠지 봐야할 거 같고 또 보면 그러저럭 괜찮은데
마음 단단히 먹고 봐야할 거 같은 이유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제법이다. 사랑 영화를 보고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이후 처음인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둘 다 허진호가 만든 것이더라. 그 뒤로 찍은 영화들이

그다지 댕기지 않는 이유는 초반 영화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어눌한 말투와 너무 큰 키에서 나오는 싱거운 이미지에 유지태 특유의 처진 눈.

이 작품이 <주유소 습격사건>과 더불어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찌질이 역을 이보다 더 잘 소화할 순 없을 것 같은 느낌. 배우 제대로 골랐다. 완전 100%다.

이영애 역시 마찬가지다. 영원히 늙을 것 같지 않은, 젊을 때도 어려보이지 않았을 것 같은

이영애.(요새 뭐하나?) 피부가 작살이다. 남자를 요리하는 능력 또한. 쥐었다 폈다. 거두어 들이시고

다시 내팽개치시고 끝내 다시 찾아가도 하나도 찌질해보이지 않는 그 세련됨.

이와 비교되는 혼자 울고 불고...술마시고 매달리고...전화하고 버림받고...끝내 열쇠로 차를 긁다가

들켜버리는 유지태의 막장 포스. 그런데 막판에 이영애가 유지태를 다시 찾아가 찝적대는 모습은

좌절한 남성들을 향한 화해의 메세지인지 아님 감독의 환타지인지. 쩝....

'떠나간 여자랑 버스는 붙잡지 말라고 했다.'는 할머니의 유언이 무색하게스리 되돌아오는 이영애라니..

그래도 남자들은 그걸 바랄테니. 일부러 위안을 주려한 듯. 그러고보면 영화들이 죄다 순정파 남성을

앞세운 감독의 특성상, 한우물만 파는 남자에 대한 애착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아무리 허대가 좋아도 유지태처럼 말 안 통하고 답답한 사람 별루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건 하도 많이 들어서 그냥 그랬고, 오히려 유지태가 오바하고 난 다음날

헤어지면서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없지?'라고 말한 장면에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끝까지 후까시

접지 않는 남자의 오기라니. 처절하고도 처절하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쳐 운다. 빙신~~

이영애가 다시 찾아온 장면에서도 끝내 거절하더니 보내놓고 또 질질. 나 같음 낼름 붙잡을 거 같은데.

암튼 자기가 차놓고는 남자가 궁해지니 다시 연락해서 만나자 마자 '오늘 같이 있을까?'라고 직접

질러대는 이영애의 용기. 오 부러워~~

(이영애가 산다면 강릉 가서 살 거 같다.)



노망난 할머니의 처절한 남편 기다림도 상당히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 같은데. 유지태가 차인 시점과

할머니가 이뿌게 차려 입고 나가서 끝내 세상을 뜨는 시점이 일치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어떤 한 국면을 넘어섰다는 뜻인지. 남편을 기다린다고 수색역 대합실에 죽치고 있던 할머니가

유지태에게 사탕을 건내고 마루에서 혼자 울고 있는 유지태를 다독이는 등. 유지태의 상처를 가장

잘 알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할머니라는 것도 조금 애틋했다.




이 외에도 술쳐먹고 찾아가서 재워달라고 땡깡부리는 장면, 열쇠로 차를 긁는 장면 등등 유지태의

찌질이 포스가 너무 강력해서 마지막에 유지태가 갈대숲을 찾아 미소짓는 장면이나 시냇물 소리와

같이 녹음된 이영애의 허밍 따위는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빗소리는 참 이뿌게 들리더라. 누군가를 애타게 그립게 만드는 그런 소리. 듣고 싶다.

반지하를 탈출하자. 엉뚱한 마지막 교훈.





1월 14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 지구 접경 지역에서 폭격 장면을 구경한다는 뉴스를 봤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무기력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 계속 그 생각이 날 때마다 멍해진다.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수치고 모욕이다. 같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짐스럽고 역겹다.

전쟁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재미있지만 한 편으로는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는 구경꾼의 인터뷰에

토가 나오려고 한다. 욕 보이고 싶다. '너도 당해보라.'고 '너도 사람이냐.'고 ...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바닥을 보이는 인간의 추악한 심성에 절망감만 커질 뿐이다.

사/람/이/싫/다.






1월 13일

요즘 뜨고 있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와 '달이 차오른다'를 들었다. 장기하 스스로 <산울림>이

모델이라 했다. 기타 사운드는 <산울림>인데 목소리는 오히려 송창식을 닮았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노래를 자꾸 듣고 있으면 정말 어디론가 가야할 거 같다.

그런데 왠지 저 노래는 어디론가 갈 수 없는 사람의 푸념으로 들린다. 10년 전 패닉의 UFO가

버림받은 자들의 노골적인 복수를 노래한 환타지라면 '달이 차오른다'는 88만원 세대가 잠 못 드는

불면의 새벽에 읊조리는 넋두리 같다.

애초부터 되돌려 줄 생각 따위는 포기한 무기력하고 지친 자들의 긴긴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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