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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소견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작은 행동
나동혁
저는 올 해 26살 먹은 평범한 청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남성으로서 저 역시 군대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2일로 입영날짜가 확정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고민을 던져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론은 점점 명확해졌습니다. 수많은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 길을 간 당찬 청년들이 있었기에 저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떳떳해지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전쟁 대신 평화를 원합니다.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과 순응 대신에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회 -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원합니다. 전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는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를 원합니다. 저는 이러한 제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제 양심을 투명하게 글로 보여준다는 게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간절한 마음이 닿으면 진실이 전해질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씁니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난관이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난관들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감옥에서 실형을 살아야 하고 평생을 전과자, 병역거부자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릅지만 막상 결심을 하고나니 아주 홀가분합니다. 전과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그만한 각오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결심했던 사람들과 저를 계기로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평화와 인권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 집단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제 꿈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는 학교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종종 마치 짐승을 다루듯 학생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체벌을 가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굴욕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반면, 제가 교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대신 학생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대학에 가야했고, 그 때는 대학에만 가면 탈출이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공부했는데 고등학교도 사회의 축소판이란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온 획일주의 문화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한 귄위주의, 일상화된 유무형의 폭력. 또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들. 복종과 순응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에서, 선배와 후배 사이의 관계에서, 남성과 여성 사의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권위주의는 대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알아서 대세에 적응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침묵하는 게 훨씬 일신의 안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학생회 활동은 제 인생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회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협한 시각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기본적인 문제의식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 때부터 변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사실, 현실의 모순에 눈감지 않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냉소하고 체념하는 것보다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인들과 함께한 지난 몇 년은 저에게 공부 이상의 많은 의미를 던져 주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함께했던 농민학생연대활동, 빈민학생연대활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활동과 학생회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행복과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실천이 제 삶과 일치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을 전투경찰로 만나야 하는 현실은 언제나 저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는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학생운동은 이렇게 저에게 사회와 나의 관계에 대해 기본적인 가치관을 정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긴 했지만 그것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많은 고민 끝에 3년간 휴학을 선택했고,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휴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경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3년간 공부 못지 않게 소중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특히 올해 초에는 평화인권 운동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9.11 테러 이후 지속적으로 반전평화 운동에 함께하면서 느끼는 바는 여전히 한가지입니다. 자신들의 불만을 테러를 통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로 테러를 폭력으로 보복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는 더 비참한 결과만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는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서해교전 사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긴장 속에서 계속되는 무력 대립은 무고한 젊음을 앗아갔습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평화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힘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그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에게 더 큰 아픔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이제 우리도 최근 이루어진 변화에 발맞춰 남과 북이 조금씩 무기를 줄여나가고 대립을 완화시켜 나가며 국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을 넘어 전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전쟁은 무수히 많은 인적, 물적, 정신적 피해를 남긴 채 승자도 패자도 없이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비용과 전 국민을 동원하는 총력전으로 진행된 20세기 전쟁에서 선은 누구고, 악은 누구였는지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부가 축적되고, 과학기술과 문명이 발전하여 더 없이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할 것 같던 20세기, 이 모순에 가득찬 전쟁의 세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무고하게 죽어간 수천만의 생명 앞에서 우리는 이제 전쟁 대신 평화를,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희생강요 대신에 인권과 민주주의 확장을, 끝없는 무한경쟁 대신 공존을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합니다.
또한 저는 지난 3년간 활동을 통해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구성원들의 토론을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어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국가가 강요하는 한가지 정답만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때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복지와 더 많은 인권을 위해 토론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바꿔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미쳐 깨닫지 못했던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가 오늘날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진정한 인권국가,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 또, 무조건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려 해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정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국가에 어떤 해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원칙적으로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동의 위에 세워지며 국민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발전함에 따라 낡은 관습과 제도는 끊임없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전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한 말 이후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36년간 계속된 일제 식민지를 거쳐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일방적 폭력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제 지연된 현대사를 실천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왜 서로 대립해야 하는걸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일방적인 침묵과 강요 순응과 복종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원들에 의해 국가 토대를 이루는 가치들이 새롭게 합의되고 평가받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원하는 데 사람들은 왜 서로 대립할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많은 대화를 통해 결국 저는 친구들과 제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위층 병역비리 문제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 군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군사주의 문화가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국가에 의해 주어진 정답만을 따라해왔던 수동적인 문화는 반드시 잘못된 구성원 간의 마찰을 불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구성원들이 부당하게 대립하고 생산적인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고, 상호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와 인권 확대, 군대 내 인권개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 전사회적인 민주의식 함양, 사회복지 확대 등 동일한 것을 원하면서도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오직 한가지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획일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또,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하기만을 강요하는 사회 문화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느끼는 문제점과 제 문제점이 다르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대체복무제가 개선되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 확대된다면, 이는 비단 어떤 특정 집단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와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릴 것이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군대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사회복지 확충에도 기여할 것이며, 인적자원의 재분배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할 것입니다. 실제로 대체복무제를 시행하는 나라에서 이런 효과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무엇보다 이 문제가 사회 모든 구성원과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당당히 말하려 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을 모두 설명할 능력이나 재주가 없습니다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진정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더 많은 청년들이 이 길에 함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명운동을 받으로 다니면서 저는 이러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의식과 시선이 날이 다르게 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들을 언제까지 범법자로 묶어 두어야 합니까?
저는 진정으로 월드컵 4강 진출이나 놀라운 경제적 성장 못지 않게 인권과 민주주의로 존경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저는 이후에도 계속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 더 나아가 반전평화의 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토론되고 성숙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또한, 기회가 주어지는데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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