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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사회주의국가에서 CO

번역글) History about Conscientious Objection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ANTON BEBLER
(번역자 : 나동혁)
이 장에서는 소위 “사회주의”라 불리며 공산당의 통치를 받았던 국가에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양상을 다룬다. 초점은 공산주의 시기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맞추어져 있지만, 그 이전 시기도 간단히 관찰하고 넘어갈 것이다.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이전 시기에 사회적 조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반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 지역의 대다수 국가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징병의 전통을 유지해왔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동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관용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으며, 정당정치가 빈약했고, 사법부 독립이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더욱이 평화주의 교단의 힘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간단히, 약간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동유럽의 사회적 상황은 병역거부에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사회주의 사회 성립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와 co conscientious object(or), 보통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줄임말.


사회주의 국가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다루는 양상은 일반적으로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현상과 꽤나 잘 맞아 떨어진다. 스탈린주의는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분적 병역거부자(patial objector)에 대해서는 종종 임의로 비전투 복무를 허용했으나 철저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서는 거칠게 억압했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co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논의되기는 더 힘들었고, co와 관련된 객관적 데이터는 구할 수도 없었다. 병역거부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분위기는 이후에 소련 이외의 사회주의 국가로 확산되어 나갔는데, 적군의 임무를 부과하던지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이런 특징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과 공산주의 스타일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몇몇 증거들을 통해 보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군사시스템이 발전했다.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군복무 의무가 주어졌으며(또한 어떤 것들은 여성들의 의무로 제한되기도 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연대라는 강력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항상 따라다녔다. 군복무와 국방의무를 묘사한 용어들의 유사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highest"(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holy“(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holiest“(폴란드), ”honorable"(동독). “정당한 조국의 방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배신자와 똑같았으며 범죄자였다. “제국주의”와 잠재적인 군사적 대결은 어떠한 공식적인 민간대체복무의 수용도 가로막았다.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은 여타의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의 특징들-예컨대 실질적인 정치적 경쟁의 제거, 반대의견에 대한 억압, 종교적/문화적 다원주의에 대한 가혹한 정책, 폭넓게 퍼진 인권침해-과 함께 형성되었다. 꽤나 다른 두 연방 국가 소련과 유고에서는 국민 방위군(territorial militias)의 폐지, 군대 내 소수민족 언어의 금지, “사회주의적 인간” 창조를 위한 문화적 동화 정책 등등과 동시에 대체로 co를 범죄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소련에서 이러한 변화는 1930년대 일어났고, 유고에서는 1940년대 전후 기간에 일어났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공산주의가 반드시 co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을 보호하거나, 또는 관용하거나, 적어도 침묵하던 기간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모국, 소련이 가장 좋은 보기다. 1918년 1월 23일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창시자 레닌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시민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첫 번째 법령에 서명했다. 1919년 1월 4일에, 소련은 모든 종교적 동기의 병역거부자들을 징집으로부터 면제시켜주는 법령을 발표했다. 1년 뒤,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정이 세워졌다.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레닌 시대 소련은 co에 대해 짜리즘보다 훨씬 관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 서유럽 국가보다 훨씬 진일보했다.
co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용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로 통합되면서 사실상 끝났다. 어떤 사람도 그런 지위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짓된 이유로 1939에 co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가 폐지되었다. 최근 1990년대 후반까지 소련의 형법체계는 입대, 등록(병적), 훈련 등등을 “기피”한 경우에 매우 강력하게 처벌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병역거부 선배들은 철저한 종교상의 병역거부와 연관이 깊다 : 러시아 정교, 오순절 교회파(Pentecostals), 나자레파(Nazarenes), 톨스토이 신봉자들(Tolstoyans), 재림론자(Adventists),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와의 증인의 오랜 신도들. 1980년대 병역거부자 수가 급증하면서 병역거부의 동기도 크게 바뀌었고,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이 가시성이나 숫자의 양 측면에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의 침식

co를 대하던 스탈리주의의 양상은 196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병역거부의 가능성이 인지된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는 동독이었다. 13장에서 윌프리도 폰 브레도우(Wilfried von Bredow)가 이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독이 1964년에 co들이 복무할 수 있는 비무장 건설부대(unarmed military construction units)를 만듦으로써 스탈린주의에  첫 번째 틈새를 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동독은 co에 대한 서구적 기준이 가장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특히나, 서독으로부터 접해있기 때문에 그랬다. 1960년대 후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건설부대(construction battalions)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72년에 이르면 위와 같은 건설부대는 소련에서도 등장한다. 일명 ‘stoybat’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뿐만 아니라, 반체제 인사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부르조아 계층의 후손들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행정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신적으로 미친 사람들로 분류함으로써 징병 명단에서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덧붙일 필요도 없이, 이런 식으로 면제된 사람들은 그 후에 계속해서 직장 배치나, 고등교육 허용, 기타 여러 가지 사항에 있어 차별을 받았다.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형태의 군복무 면제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요구받는 직업의 노동자들은 징병이 면제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불가리아에서는 제철공장, 조선소,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면제를 받았다. 폴란드 석탄 광산 노동자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이런 직업상의 면제를 받은 병역거부자가 존재하는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물론 스탈린주의 하에서도 사실상 가장 확실하게 면제를 받았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업상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사람들(예를 들면 군산복합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수의 면제 또는 징병유예가 존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세속적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 전형적인 정치적 반대는 각 정부의 군사정책과 소련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대항적인 행동은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군복무를 거부한 수십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만들어냈다. 지식인, 학생, 그리고 중간층에 속하는 일부 자영업자들이 가장 왕성한 세속적 반대 그룹이었다. 동독의 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는 잘 알려진 대로 면제를 받았고, 폴란드나 헝가리에서 카톨릭 성직자들도 일부 면제를 받았는데 동유럽에 설립된 교회들은 대체로 ‘정당한 전쟁’ 교리와 일반화된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동유럽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대체복무 도입은 명확히 서유럽의 경험, 특히 서독,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는 구성원들 가운데 평화주의자들과 반체제적인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사상적인 독단주의, 국가주의, 외국인을 혐오를(xenophobic) 강요했다.
그 때까지도, 몇몇 국가들은 어떤 양보를 결정하는 데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1977년 헝가리는 동독을 따라 평화주의적 분파의 구성원들에게 비무장 부대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에게 까지 그런 조건을 적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여호와의 증인 같은 절대적 거부자들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않았다. 1980년 폴란드는 무기나 화기(fire-fighter)없이 병원이나 사회 봉사기관 같은 곳에서 인도주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민간 복무를 조용히 도입했다. 병역거부자들은 봉급과 군복 없이 복무했다. 육체적으로 부적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비종교적 거부자들 모두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다.
몇몇 동유럽 국가에서는 정치적인 반대도 원칙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동기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헌장 77(Charter 77 1977년 설립된 반체제운동 단체인 77헌장(Charter 77) 그룹은 현 체코 대통령인 하벨(Vaclav Havel)과 체코 지식인의 상징인 하예(Jiri Hayek) 등을 포함한 지식인들과 작가, 예술가 등이 주축이 된 반체제단체이자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사회의 효시로,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개입으로 무산된 이후, 다시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새로운 봄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과 폴란드 자유노조연대(Solidarity 연대(Solidarity)는 1980년 여름 ‘폴란드 위기’ 때 일약 각광을 받았던 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 자주관리노조의 정식 명칭이다. 노동조합활동으로서 기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제1회 전국대회(1981년 10월)는 정치·사회에 이르는 ‘자주관리공화국’이라는 이상상(理想像)을 내세웠다. 이 자유노조에는 100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고 있으며, 폴란드의 민주화·자유화를 향한 조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의 대표자들이 소련의 체코침공 19주년에 맞춰 체코와 폴란드 국경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낸 공동성명에는 민간 대체복무를 수행할 권리에 대한 요구도 포함되었다. 특별히 몇몇 반체제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시행되는 의무적인 군사 교육에 대한 저항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인 반대자들은 체제의 억압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개 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을 박해했던 잘 알려진 사례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근본적인 평화주의자 그룹들은 정치적 반대 그룹들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았으며, 대신 정부를 향해 조용히 변론하는 편을 택했다.
폴란드가 여전히 군사정부의 지배 아래 있었을 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종교적, 세속적("도덕적") 병역거부자 모두에게 민간 대체 복무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단호히 평화를 지키기 위한 소비에트 군대 및 그 동맹군대와 형제로서의 동맹"이라는 징병자 선서 문장을 두고 당시 존재하던 군사시스템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이 오갔다. 징병 저항 조직체였던 자유와 평화(Freedom and Peace)에 자극을 받아, 장교 Woljciech Jaruzelski가 병역거부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단계들을 밟기 시작했다. 1988년 7월에 단호한 조처가 취해졌으며,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젊은 남성들이 2년간 의무 군복무를 대신해서 3년간 대체복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생은 졸업 후에 1년간 군복무를 대신해서 2년간 민간 복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시스템은 절대 북 대서양 패턴을 따라 설계된 게 아니었다. 양심을 결정하는 것은 군대와 경찰의 보호 아래 운영되는 위원회였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방과 식사를 제공 받았지만 보수는 없었으며 병원이나 사회봉사기관에서 불편하고 힘든 작업을 수행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처음 석 달 동안에 764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주장했고 그 가운데 480명이 인정받았다. 세속적인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보다 두 배 정도 많았다. 1989년에 병역거부자 숫자는 약 1500명이었고 그 중 오직 1%만이 군복무를 했다. 폴란드에서 일반 대중이 징병제를 지지한다는 말은 새롭게 합법화된 병역거부를 인정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8년 공산당 내 개혁주의자들의 반란에 뒤 이어, 헝가리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중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가장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1989년 1월에, "유럽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헝가리는 헌법에 민간대체복무 조항을 삽입했다. 곧 이어, 의회는 필요한 입법절차를 밟았는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보편적 권리, 민간 대체복무, 투옥 중지, 공평한 판정 기구 구성 등 유엔 인권위원회가 기본적으로 추천한 사항들을 명확히 포함시켰다. 처음 입법이 되었을 때, 헝가리의 민간대체복무는 징병 기간인 2년보다 10달이 더 길었다.
또 헝가리의 경우 1988년(옛 체계에 따라 투옥된 마지막 해)에 투옥된 병역거부자들의 배경과 수가 나타내는 특징도 매우 흥미롭다. 여호와의 증인 148명, 로마 가톨릭 신도 6명, 나자레파 1명, 안식일 재림파 1명, 그리고 비종교적 거부자 5명. 이 숫자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절대적 병역거부의 사회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대략 훑어볼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1940년대부터 1980년 티토 유고슬라비아 초대 대통령(재임 1953∼1980). 1948년 6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고 그의 정강(政綱)은 수정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그는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목표로 한 비동맹중립외교의 정책을 굳게 지켰다. 1969년에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74년 5월 연방의회에서 종신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지키며 경제건설을 추진하였다.
사망 때까지 co와 관련된 유고슬라비아의 시스템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양상을 따랐다. 유고슬라비아 사회가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교하여 훨씬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군복무 거부(징병 통지 수령을 거부하거나, 소재를 알리지 않거나, 무기 소지를 거부하거나, 기타 경우를 포함하여)는 여러 가지 형법을 통해 처벌 받을 수 있었다. 징병을 거부한 사람은 군재판관이 재판을 주재했는데 이 경우에 독립적인 변호, 공개 재판, 효과적인 호소 등 여러 면에서 권리가 매우 축소되었다.
법률상 최고형은 10년까지 가능했지만, 유죄를 선고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대개 3년형을 받았다. 중복 처벌을 할 경우 30년까지 붙잡아 두는 것이 가능했다. 명백히 이 체계의 목표는 병역거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시스템의 고의적인 잔인함은 여호와의 증인인 이반 체코(Ivan Cecko)의 사례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동일한 죄로 네 번에 걸쳐 12년이나 형을 살았다.
유죄로 판정을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유고슬라비아 군사법정에서 형을 선고 받았는데 1970년 초반 이후 평균적으로 한 해 열 명 정도 되었다. 국제 앰네스티의 보고에 따르면 1989년에는 최소 20명의 병역거부자가 투옥되었다. 물론, 일부 병역거부자들은 간단히 지역 징병 사무소(local induction board)에서 "부적합"으로 분류되어 효과적으로 소집자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여전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대하는 방식은 매우 퇴보적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일당 정치체제를 유지하던 티토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자유화의 과정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대중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가유고 연방 내에서 가장 서구적이며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슬로베이아는 병역거부자들을 거칠게 대하는 데 제일 강력하게 반발했다. 1986년 여름 슬로베니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민간대체복무 도입의 요구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연방 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방 내 전문적인 군사주의자들은 로비를 통해 훼방을 놓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방해하는 데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 별 셋 퇴역장교 Milian Daljevic였는데 그는 사회주의자 동맹(Socialist Alliance)의 단체 리더라는 새로운 지위를 이용-남용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하였다. Daljevic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는 유고슬라비아 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며 유고슬라비아의 방어지침과도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또, 유고슬라비아인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군복무 거부의 자유화를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Daljivic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들이 국토를 방어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행동이라거나,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이 종교적 병역거부가 인정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거나, 종교적인 믿음이 시민으로서 의무이행을 방해할 수 있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병역거부자가 넘쳐날 것이며, 결국 연방 군대의 토대를 허물어 뜨릴 것이라는 유고슬라비아 군부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공개적인 사전 발표 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기 위한 노력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듯 보였다. 1989년 2월, 유고슬라비아 최고간부회의 Presidium,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간부회의를 지칭한다.
(집단적인 지도체제와 최고지휘기관)에서 완강했던 소수파는 보수적인 입장을 뒤엎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합법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멤버들을 무던히 설득했다. 최고간부회의의 이러한 움직임은 Ivan Cecko의 고통스런 처지와 서방세계에 유고슬라비아의 이미지를 개선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인 듯 보인다. 어쨌든, 최고간부회의는 연방의회에 징병법 개정을 제안했다. 개정안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유고슬라비아 직업 군인 가운데 수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지역들-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좀 더 개발된 지역의 대표들은 대부분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89년 4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 합법화되었다. 오직 종교적 거부자들만이 허용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비전투 분야에서, 무장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복무해야 했다. 더구나, 병역거부자들은 징병된 사람들보다 복무 기간이 두 배나 길었다. 민간대체복무는 없었고, 다만 군대 내 지휘관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을 가졌다. 군대 외부에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이러한 병역거부 관련 조항들은 유엔인권위원회나 안보협의회(Conference on Security)등이 제시한 기준에 훨씬 못미쳤다.
유고슬라비아 붕괴가 임박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정치적으로 자유적이었던 슬로베니아는 1990년 10월에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유고슬라비아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갔다. 민간대체복무가 종교적, 세속적 거부자 모두에게 허용되었고 기간은 군복무 기간과 동일했다. (병역거부) 지원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민간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본질적으로 슬로베니아는 발전한 서유럽 국가들과 동일한 병역거부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시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실질적인 상황이 어떻게 전환될 것인가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1992년에 탈영과 징병 기피가 옛 유고슬라비아의 중심 지역이었던 세르비아에서조차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이런 군복무 회피가 대개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유고슬라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계승한 곳 구(舊)유고연방의 6개 공화국 중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2개 공화국이 합쳐 1992년 4월 신유고연방 구성.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4개 나라가 새롭게 독립했다.
에서 계속 확대될 것이다.
1989년 혁명 이후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을 따라 co의 상황도 드라마처럼 바뀌었다. 1990년 10월 동독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독일연방공화국에 귀속된 5개의 주에서 이전 서독의 시스템이 확장되었다. 1990년 5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의회가 종교적, 세속적 거부자 모두에 대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합법화했고 대체복무를 도입했다. 폴란드는 전통적인 평화 분파들과 비종교적 거부자들 모두 부분적으로 병역거부를 합법화했다. 1991년까지 오직 루마니아와 알바니아만이 오래된 스탈린주의 모델을 고수했고, 이 국가들의 경우에도 포괄적으로 보면 군개혁의 차원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합법화되면서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구소련에서 변화는 특히 중요하다. 소련 붕괴 직전, 징병 저항은 마치 풍토병처럼 번져 소비에트 군대의 기초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유력한 정보에 따르면 1989년에 소련에서 400,000만명이 군복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중에 오직 2~3000명만이 종교적이거나 또는 나름의 신념을 갖춘 병역거부자로 간주되었다. 발트해와 카프카스 지방에서는 대중적인 견해와 지역정부 당국 모두 소비에트 군대 복무 회피를 지원했다. 1990년에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군복무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복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라트비아의 경우, 새로운 대체 복무가 병역거부자 뿐 아니라, 모든 지원자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소련 말년의 거의 모든 징병 거부자들이 군복무 자체가 아니라 소비에트 군대에 대한 복무 거부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때 적군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궁극적인 구현물이었던 곳에서, 1990년에 이르면 적군은 소련이 해체되는 격렬한 긴장과 분해의 반영물이 되었다. 되살아난 (민족)국가주의 속에 새로운 공화국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완결되지 않았다. 단명했던 소련의 첫 번째 계승자 주권국가연합(the Union of Sovereign States)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연합(CIS)결성 이전에 구성된 과도적 단계
은 1991년 8월 15일에 새롭게 제정된 징병법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조항도 포함시켰다. 징병법은 징병된 복무자들보다 긴 기간의 대체복무를 인정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거부자들 모두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았다. 1991년 막판에 구성된 독립국가연합(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d, CIS) 소련은 15개국 연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발트해 3개국은 소련 시대에 1989년에 이미 따로 독립했으며 나머지 12개국이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함로써 소련은 해체되었다.
에서는 포괄적인 군개혁이 지연되는 바람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조항들이 미정인 채로 남았다. 독립 러시아 군대의 경우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시스템은 다소 이전에 사회주의 체제였던 국가들의 상태를 닮아 있는 듯하다. 완벽하게 전문화된 군대를 지향하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중심으로 한 열띤 논쟁에서 많은 부분 긴장을 완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향해

사회주의 체제 그리고 그 이후에 이러한 발전들이 이 책에서 서술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단계와 그리고 병역거부의 세속화라는 주장과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현대에 이르러 주로 세단계를 밟았던 변화를 따라 동유럽의 현상들도 일반적으로 병역거부의 세속화 경향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형적으로, 초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다가 스탈린주의로 변모한 이후에 병역거부자들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퇴보하였다. 스탈린주의 후기에 완고한 종교적 거부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비무장 부대(unarmed military service)복무를 허용했다. 1989년 공산주의 국가들이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좀 더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주의 이후(ex-socialist) 국가들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을 따라 병역거부자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정책들을 신속히 도입하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병역거부와 관련된 정책들은 이전 공산주의 국가 단계에 비하면 좀 더 다양한 형태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는 모두 좀 더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역시나, 1990년대 초반에 좀 더 발전한 국가들은 -특히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비키아, 슬로베니아, 발트해 국가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나토에 가입한 지중해 연안 국가들보다 더욱 인본주의적인 정책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특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해서 몇 몇 사회주의 이후 국가들은 남부유럽에서 오래 동안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왔던 나라들을 앞지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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