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3년] 강철민의 행동이 남긴 것

강철민의 행동이 남긴 것



1.  현재까지 경과


2003년 7월 7일  강철민 군입대

       파병반대를 생각하며 군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11월 17일 백일 휴가

       11월 18일 신문 기사를 보고 염창근 씨(최근 이라크전 파병 반대를 이유로 병역거부)와 연락

       11월 19일 염창근 씨를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을 해오던 사람들과 만남.

       11월 21일 휴가 마지막 날, 파병반대 병역거부 기자회견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이등병의 편지' 발표.

                  어머니, 삼촌 상경 및 부대 복귀 설득

                  KNCC 인권위원회에서 파병반대 농성시작

       11월 22일 0시 부대 복귀 시한 경과                  

                 스물두번째 생일축하 잔치

       11월 23일 계속된 지지방문자들과의 만남, 언론인터뷰

       11월 24일 향후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 강철민, 변호인단, KNCC, 지원단 사람들과의 회의

                 자발적인 강철민지지 문화제 시작 <심봤다! 강철민>

       11월 25일 <심봤다! 강철민> 2회, 촛불집회 시작

      11월 26일 이등병 강철민씨 향후 일정및 종교 시민사회단체 의견 발표 기자회견

             <노무현대통령께 드리는 두 번째 편지 발표>, 청와대 면담을 위해 평화행진 계획 발표

     11월 27일 3차 촛불시위 및 문화제

     11월 28일 11시 기자회견

               <저는 파병반대의 길을 계속 걷겠습니다>

                12시 <강철민과 함께 나누는 평화의 식탁>

                1시  기독교 회관앞 약식집회

                2시 “강철민과 평화를 위해 걷자” 행진 시작

                2시 10분 경찰과 대치

                2시 40분 수방사 헌병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

     12월 12일 강철민 씨 첫 공판 - 광주 31사단

               강철민 씨 “ 파병 철회때까지 병역거부할 것 ”, 군 검사 징역 3년 구형

     12월 27일 강철민 씨 선고공판, 실형 2년 선고

     12월 31일 항소, 육군교도소로 이감


※ 군사재판은 2심까지 밖에 없으며, 강철민 씨는 현재 육군교도소에 있음.

주소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3리 사서함 900-10 (우편번호 467-909) 강철민 앞



2. 농성과정


지난 해,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반전운동이 크게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반전운동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저항의 광장으로 불러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으로 시작되었던 68년을 전후로한 전세계적인 저항을 되새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대대적인 규모의 반전시위는 국익과 힘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반전 운동이 들끓었던 유럽 역시도 이라크 전쟁이 가져다 줄 국익을 계산하는 정치인들의 사고 안에서만 움직일 뿐이었다. 반면 이전과 다른 저항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다른 한 편으로 끈질기게 평화를 위해 활동할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늘어간다는 점에서 2002년의 저항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강철민을 계기로 뭉쳤던 농성단이 그러한 변화의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인 의지들이 합쳐진 농성 프로그램, 평등하고 민주적인 농성단 운영,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소통과 홍보, 평화적인 수단의 행진과 다양한 저항방식들 등등. 몇 달 전을 생각해보면 강철민 농성장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들로 농성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었다.

우리들이 농성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민주주의, 자발적 의지, 그리고 진심어린 행동들이었다. 우리는 강철민의 양심에 진심으로 동감하고 함께 행동하려고 했다. 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소외되거나 단순히 지지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의 주체가 될 때 농성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때로는 의견의 충돌이 없을 수 없었고 그것을 시시각각으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일이 항상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농성을 마무리 할 때 한총련의 조직적 개입으로 함께 토론해서 냈던 결론이 번복되고 다시 재번복 되었던 경우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또 아무리 지도부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었다고는 하나 농성장 내에서의 지도관계와 위계적인 서열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임시로 구성된 지원단 집행체계는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언론과 접하고, 더 많은 일이 몰리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항상 운동의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철민 농성은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길 것이다. 병역거부자, 아나키스트, 문화 활동가, 평화인권 행동가 등등 다양한 이들이 농성에 함께했으며 이들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 이전 대중운동의 주류에서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사람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며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냈던 강철민 지원농성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매일 문화농성단이 직접 기획하고 홍보해서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던 저녁 문화제와 촛불집회, 마지막날 장미꽃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떤 평화행진은 아마도 내 인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3. 전쟁과 선택적 병역거부


양심적 거부자들은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양심에 따른 거부를 수행하는 동기에 따라 종교적 거부자(religious COs)와 세속적 거부자(secular COs)개인적 혹은 정치적 동기에 따른 거부자들)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념의 범위에 따라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보편적 거부자(universalitic COs), 특정 전투에 반대하는 선택적 거부자(selective COs) 특정 무기를 거부하는 임의적 거부자(discretionary COs)로 나뉜다.

선택적 병역거부는 20세기 대규모 전쟁으로 때로는 아주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저항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선택적 병역거부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분명하다. 한국에서도 병역거부 운동이 시작된 지 채 몇 년 되지 않았고 반전운동이 본격화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저항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나고 영향을 주었다. 반전운동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로, 한국군이 파병되어 침략자의 일부가 되는 순간 선택적 병역거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그리고 실제로 강철민을 통해 그러한 생각이 현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되었고, 자본주의는 이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나 공황을 겪지 않고 20년간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역설적으로 전쟁을 통해 자극받은 과학기술의 발달은 마치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이 보였으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타협으로 자기 지분을 높이는 법에 익숙해졌다. 상대적인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모두가 텔레비젼과 전화를 소유할 수 있는 풍요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베이비 붐1)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되었을 때 불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서 수많은 도시에서 대학생 수가 10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비좁은 강의실과 보수적인 커리큘럼, 안정을 선호하는 숨막히는 기성제도, 성적 편견, 권위주의, 무기확장(특히 핵무기),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점철된 세계. 불만은 점점 거칠어졌고 젊은이들은 락음악에 열광하며 프리섹스를 즐기는가 하면 종종 마약을 애용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기성언론에 맞서 지하언론으로 맞섰으며 점거를 통해 저항을 표현했고 수만개의 꼬뮨을 만들어 기성 가치관에 맞섰다. 학생운동은 순식 간에 급진화되었고 폭발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2) 히피문화가 다수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저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젊은이들은 전쟁을 통해 기성의 삶의 가치 전반을 되돌아보게 되었으며, 일상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군사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백일몽으로 끝난 꿈같은 나날들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열정을 통해 보게 된 세상의 부조리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적어도 학생들은 점증하는 전지구적 군사화, 일상적 전쟁의 위협, 대학과 군수산업의 관계를 바로 보게 되었으며, 그에 저항하는 방식을 새롭게 찾아냈다.

1965년부터 미국의 지상군이 베트남에 파견되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토론회(teach - ins3))를 통해 동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적인 반전행동에 나섰다.4) 특히 반전시위가 폭발적으로 전개된 계기가 된 것은 대학생들에게 병역 면제 혜택을 대폭 철회하는 내용의 병역법 개정이었다. 1966년 2월에 병무청장 루이스 허쉬(L.B. Hershey) 장군은 모든 남자 대학생들에게 ‘병역시험’을 보게하여 성적이 낮은 순으로 징병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른바 ‘허쉬 규정’을 발표했는데 이 발표는 미국 대학생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필립 베리건(P. Berrigan) 신부는 뉴포트의 징병사무소를 습격하여, 징병 서류에 피를 쏟아붓는가 하면 대학생들은 저항의 표현방식으로 공개적인 집회에서 징병카드를 모아 태우는 방식으로 전쟁참여 거부의사를 표현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소 당한 사람이 20만 9,517명, 징역은 3,250명, 집행유예가 5,500명, 불기소 처분이 19만 7,750만명 이라고 하니 저항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간다.5) “베트콩들은 우릴 깜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람 죽이기 위해 1만 마일 날아갈 생각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알리는 알리는 1967년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한 편, 반전가수로 잘 알려진 존 바에즈는 반전콘서트를 허락하지 말라는 보수세력의 압력에 맞서 워싱턴 파크 앞에서 수만명이 참가한 무료공연으로 맞서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봤다면, 혹은 ost를 들은 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학생들은 대학과 군수자본의 관계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에 맞섰다. 국방부나 기업의 후원 하에 진행된 생물학전, 화학전 관련 연구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착취적인 투자를 지원하는 연구 등이 밝혀졌고, 대학이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데 깊이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은 저항했다. rotc 건물을 점거하거나, cia나 군수회사6)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대다수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침략전쟁은 거부한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대대적인 선택적 병역거부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의 선택적 병역거부가 계속되고 있다. 침략전쟁의 당사자인 미국과 영국에서도 침략전쟁에 항의하는 선택적 병역거부자들이 싸우고 있다. 미국은 현재 약 270만명의 남성 및 여성들이 현역병이나 예비군으로 복무하고 있다. 자신의 양심상 이라크 전쟁에 파견되기를 거부한 군 복무 장병들의 규모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집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반전 단체들은 지난 1월 군인들이 전쟁에 반대한다며 비상 전화망을 통해 상담을 타진해온 전화 건수가 3천500통에 달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에 대한 학살에 항의하는 병역거부자들이 다수 있다.7)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동족에게 총을 들 수 없다거나, 혹은 한국 정부가 파병을 하는 상황에서 이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징병을 거부하는 것 역시 적절한 의사 표시 방법의 선택적 병역거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선택적 병역거부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선택적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전쟁과 군대 자체를 인정하면서 선택적으로 특정 전쟁을 반대한다는 신념은 매우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된 어떤 지원이나 법률적 대안을 마련하기도 매우 힘들다. 그 때 그 때 상황논리, 여론, 정치권 동향 등이 해결방향을 결정 지을 수 밖에 없다.


4. 재판 그리고 이후 활동


현재 강철민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농성단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지지 서명을 받고 거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농성단이 무죄를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유인물에서 발췌, peace.gg.gg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헌법 제5조 1항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조항에 따르면 대통령(군 최고통수권자)는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 위헌적 행동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우선한다. 더욱이 군형법 상 항명은 ’정당한 명령‘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데 여기서 정당한 명령의 기준은 무엇인가? 최소한 헌법은 준수하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이 성립된다. 강철민의 경우는 헌법에 따르자면 오히려 법을 철저하게 준수한 것이 되는 셈이고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이를 어기에 되는 것이다.


2. 1998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결의안 77호를 통해 “복무중인 군인일지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 바 있다. 현재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중 1700명이 휴가를 나와 복귀를 거부하고 있으나, 쉽게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3. 2차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유죄선고를 받았다. 국가가 학살과 침략행위에 참가하고 동조할 때 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이에 저항하는 군인이 있다면? 광주시민을 진압하려는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거꾸로 어쩔 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하나 이러한 행동에 동참했을 때는? 역사적인 평가는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 역시도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고 공격해 들어왔다. 우선 이라크 전쟁이 침략전쟁인가 하는 규정부터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철민이의 경우 직접 파병을 요구받은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공격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철민이는 한국군대라는 조직의 결정에 동참할 수 없으며, 한국군대가 그러한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단 하루도 그 조직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모든 결정에 100% 동의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100%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강철민은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군사법정은 오만한 태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친구에게 진 빚을 갚는 편이냐?’, ‘미국이 한국전쟁 때 얼마나 참전했는 지 아느냐?’, ‘모르면 사지선다형으로 물어볼테니 답해라.’ 등등 재판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하나같이 훈계조다. 검사는 멍청히 서있고 중간에서 냉정하게 사태를 평가해야 할 재판부가 흥분해 있는 상황. 이 한심한 상황은 그나마 여호와의 증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에 비하면 훨씬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판사는 시종일관 철없는 애를 꾸짖는 어른의 태도처럼 오만했다. 자신의 친미적이고 호전적인 군인정신을 가르치려 들었는지 방청석에는 억지로 끌려온 이병들이 꼿꼿하게 앉아(정확히 말하면 앉혀져) 있었다. 한심할 뿐이다. 처음 군사법정에 섰다는 변호사도 이런 재판부의 강압적인 태도에 매우 놀란 나머지 최후변론에서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현재 강철민은 홀로 외롭게 군대와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런 국가기관들 못지 않게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다. 국가주의, 군사주의적 편견들.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이 되라는 요구,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는 발상, 소영웅주의로 치부하려는 냉소와 조소. 그러나, 면회에서 직접 본 철민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밖에서 농성단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