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항소이유서

from 잡기장 2009/05/29 11:32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 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 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 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 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슬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시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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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11:32 2009/05/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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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다큐] 50년 후의 미래 - 인체, 도시, 에너지 (3부작) / 071010~071101

 

[1부]  50년 후의 미래 - 인체

 

O 50년 뒤의 미래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면 진짜 세포로 만들어진 새로운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고, 뇌와 마비 부위를 연결하는 컴퓨터 칩 덕분에 전신마비 환자의 재활도 가능해진다.

 

 - 컴퓨터가 내장되어 건강정보를 즉시 전달하는 옷, 날아다니는 자동차

 

 - 부상자의 체온을 섭씨 -10도까지 떨어뜨려 가사상태로 만든 후 병원으로 옮겨 치료

 - 조직공학 : 세포를 인공배양하여 각종 장기를 만듬

 

 -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유전자.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뇌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스트레스를 받음. 미각만이 아니라 유전자도 속여넘길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있음.

 

 - 체지방이 늘어난 유전자 : 특정 단백질을 더 많이 분비하는 특징이 있음.

 

- 뇌에 이식된 컴퓨터 칩을 통해 척추를 다친 사람도 움직일 수 있음.

 

- 컴퓨터 수술

 

[2부]  50년 후의 미래 - 도시

 

O 50년 뒤 10명 중 1명은 80세 이상, 3명 중 1명은 60세 이상. 출생률은 감소하여 고령화 사회가 되고 황폐화된 도시가 늘어나지만 구직난과 주택난은 감소할 것임

 

O 3차원 입체 영상을 통해 컴퓨터를 포함한 모든 영상을 활용

 

O 도로에는 수십억개의 센서가 있어 자동항법장치로 100km로 달려도 사고가 나지 않음

 

O 컴퓨터망이 지금보다 훨씬 더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해킹은 미래사회를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요소가 될 것.

 

O 현재의 카메라는 시민들의 움직임을 녹화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다. 미래의 카메라는 대상을 자체적으로 찾아 분석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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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14:58 2009/05/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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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21319&hisBbsId=total&pageIndex=5&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저는 모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이번 노통 서거 사건에 관련되어 여러가지 의문사항이 있습니다.

 

아침 기상 시점부터 시작해서 추락할 때까지의 여러 의문점들도 다 풀린 것은 아니나 일단은 노통의 신체에 손상이 가해져서 의학적인 처치가 필요하게 된 이후의 상황들에 대해서만 글을 써보렵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하겠습니다.(사실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다만 언론에 의하지 않은 개별네티즌의 글이나 댓글들에 보이는 내용은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전 6시 40분 ~ 오전 7시 (부엉이바위에서 추락이후 세영병원 이송 전)

 

노통이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한 이후 산위에 있던 경호원은 20분만에 산을 내려와 쓰러져 있는 노통을 찾은 후 환자를 들쳐업고 인근의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양산부산대병원장의 발표를 보면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이 관찰되었으며 두개골의 골절과 기뇌증이 확인되었는데 두부의 외상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간략하게 머리쪽은 해부학적으로 바깥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두피, 두개골, 경막, 지주막하 공간, 뇌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의학적 관점에서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과 '두개골의 골절 및 기뇌증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자. 두정부는 머리의 정수리 부근을 의미한다. '열상'이란 피부가 찟어져서 생긴 상처를 의미하고 기뇌증이랑 두개골 안의 공간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어의 의미와 발표문에서 나온 환자의 상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두부의 두정부 부위로 엄청난 외력이 작용하면서 두피를 파열시키고 두개골을 골절시킨다. 두개골 골절이 발생하면서 찟어진 피부를 통해 외부의 공기가 그 틈을 통해 두개골 안으로 들어간다.(기뇌증의 발생) 그런데 두개골 골절이 있다고 모두 기뇌증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뇌증이 발생하려면 경막이 뚫려야 하고 경막이 뚫리면 지주막하공간이 손상을 받는다.(두개골 골절이 생기더라도 경막이 뚫리지 않으면 경막외출혈이 되고 이 경우 기뇌증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지주막하출혈이 발생하게 되는데 외상에 의한 두개골 골절이 동반된 지주막하출혈은 엄청난 양의 출혈을 야기한다. 영화에서 보셨을거다. 등장인물들이 땅에 떨어지거나 서로 싸우다가 땅에 머리 부딪힌 경우 땅에 쓰러진 등장인물의 머리 뒤로 서서히 피가 흘러나와 동심원이 커지는 모양으로 땅을 적시는 모습을...

 

 결론은... 추락한 부위의 혈흔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또한 그런 상황에 처한 환자를 들쳐업고 뛰었다? 머리에 피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무의식적으로 지혈부터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뭐 물론 지혈을 하려고 노력해도 지혈은 잘 안된다. 저정도 출혈이면.. 양손으로 눌러막아도 지혈은 안된다. 어쨌거나 그 상황에 진짜로 일단 데리고 내려가자는 생각에 들쳐업고 뛰었다면 그 경호원은 온몸에 피칠갑을 했을거다.

 

 밝혀야 할 문제점1

 노통이 추락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혈흔이 없을 수 없다.!! 혈흔이 없다면 그건 노통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밝혀야 할 문제점2

 당시 경호원이 착용했던 의복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피칠갑된 의복의 상태를 보면 경호원이 어떤 방식으로 노통을 옮겼는지 알 수 있다. 경호원의 의복은 어디 있나? 설마 빨아버린 건 아니겠지??

 

 밝혀야 할 문제점3

 의식 잃은 대통령을 들쳐업고 내려와 경호차량으로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당시 경호차량은 어떤 차였고 탑승했던 사람은 전부 몇명이었나? 차량 내 좌석은 어떤 식으로 배정되었고 노통은 어떤 좌석에 어떤 자세로 태워졌나?

-> 차량탑승자에 대한 개별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차량 내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차량에서 분명히 혈흔과 함께 추락지점의 흙이나 나무조각, 풀 등이 나와야 한다.

 

  

 오전 7시 ~ 오전 7시 35분 (세영병원)

 

 내 생각으론 노통은 양산부산대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거나 혹은 세영병원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

 

 오전 7시경에 세영병원에 도착한 노통은 거기서 심폐소생술을 시행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어 상급병원인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이 정지한 환자의 소생을 위해 시행되는 술식이다. 여기서 환자의 소생이란 사실 환자 심장의 소생이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으나 호전될 기미가 없다는 말은 멈춰버린 심장이 아예 안 돌아왔거나, 심폐소생술로 인해 심장박동이 되살아 났다라도 금방 다시 멈춰버렸음을 의미한다. 이 상황은...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손을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번째 세영병원에서 사망하고 나서 의전상 대형병원으로 옮겼을 가능성, 두번째 이송하다가 사망한다는 것을 100% 확신하면서도 의전상 대형병원으로 옮겼을 가능성이다. 어쨌거나 세영병원에서는 노통이 곧 사망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의사입장에서..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어 타병원으로 이송하였는데 그 상태라고 하는 것이 거의 심폐소생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심장사에 준하는 상태였다면.. 그건 의사 자신이 환자의 사망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 역시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1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상태였다면 바이탈 유지하면서 즉시 뇌CT 및 X-ray 촬영 시행 -> 뇌CT상 심한 두부손상 관찰되어 상급병원 전원 필요하나 환자 상태 점차 나빠짐 -> 심장기능 정지하여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지속적인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환자 상태 호전 없음 -> 이후 환자는 세영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이송도중 사망가능성이 아주 높으나 세병병원에서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2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 좋지 않아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불구하고 심장기능 정지 상태를 유지 혹은 잠깐씩 심장박동 돌아왔다가 얼마 안가 심장기능 정지 상태로 회귀 -> 이후 환자는 세병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내 생각엔 '가상기록1'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유는 노통이 입은 환자복 및 세영병원에서 시행한 X-ray 기록 때문이다. 언론보도를 보면 양산부산대병원 내원시 노통은 세영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한다. 응급실로 이송되어 온 그 상황에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면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또한 3차 진술에서 의사는 노통에게 두부외상 외에 척추 및 오른발목 골절 등이 있었다고 한다. 두부외상과 골절 여부를 알았다는 것은 CT와 X-ray를 촬영할만큼의 생체징후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영병원 의사는 인터뷰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었고 호전기미가 보이지 않을만큼 상태가 위독했었므로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언론보도로 재구성해 본 당시 세영병원에서의 상황

 내원 당시 노통은 심각한 외상에도 불구하고 바이탈싸인은 유지되는 상태였으며, 두부외상을 제외하고 신체 다른 곳의 외상 여부를 알기 위해 노통의 의복을 잘라내고 수액라인을 확보하고 기타 필요한 처치 후 뇌CT 및 X-ray 촬영을 갔을 것이다.(세영병원의 CT가 몇채널짜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통상 CT 찍는데 시간은 5분 정도면 되고 X-ray도 금방 찍는다.) 이후 환자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심장기능이 정지해 버렸다. 즉각적인 심폐소생술이 시행되었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의사는 신경외과적인 처치를 위한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송할 수 있을 정도로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송 도중 사망할 가능성이 거의 99%이다. 하지만 환자 보호자(경호팀)들은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을 강력히 요구한다. 의사는 이송 도중의 사망가능성을 경고하고 이송을 지시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1

 세영병원에서 시행한 의료적인 처치는 무엇인가?

-> 의료기록 및 검사내역에 관해 전부 공개해야 한다. 그러면 세영병원 내원 당시의 환자 상태를 알 수 있다.

 

 밝혀야 할 문제점2

 노통이 당시 착용한 의복은 어디 있는가?

-> 언론보도에 의하면 노통의 외투가 사고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경호원이 추락한 노통의 외투를 벗기고 병원으로 이송을 했다고 진술했다는데... 외상환자의 의복을 함부로 탈의하고 심지어 업고 가는 건 다른 네티즌들이 많이 지적을 했으니 넘어가고.. 난 세영병원으로 노통이 이송되어 올 당시 어떤 의복을 착용한 상태였는지가 궁금하다.노통 추락사에 대한 의혹 중에 '피 묻은 노통의 외투가 발견된 지점에 혈흔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누군가가 외투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이 의혹은 세영병원 내원 당시 노통의 의복 상태를 알면 바로 해결될 의혹이다. 또한 의복의 피묻은 상태로 노통의 외상여부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더.. 병원에 내원한 외상환자의 의복은 응급실에서 벗겨내는 것이 아니다. 가위로 의복을 전부 잘라서 제거한다. 외상환자는 함부로 몸을 움직여서는 안되므로...

 

 밝혀야 할 문제점3

 이송시에 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헬기를 동원하여 이동하지 않았는가? 또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전직대통령급의 VIP에 저 정도의 응급상황이면 당연히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으로 가장 빠른 이송수단을 이용해서 가야한다. 신경외과가 있는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은 마산삼성병원이었다. (세영병원-마산삼성병원 16km, 세영병원-양산부산대병원 52km) 아무리 환자가 사망에 준한 상황이라도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는 경우 신경외과가 있는 대형병원으로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필요하다. 양산부산대병원이 마산삼성병원보다 더 좋은 병원이라서 그 쪽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빨리 신경외과적인 처치를 시행하는 것이므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또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경호팀인가. 통상 상급병원으로 환자를 전원할 때 어느 병원으로 이송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이다. 왜냐하면 이송할 병원에서 그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송할 환자가 생기면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상급병원에 먼저 전화해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보내도 되는지 여부를 물어본다. 그래서 보내도 된다는 허락을 맡으면 그 때 환자를 보낸다. 당시 노통을 담당했던 의사는 누가 이송을 결정했는지, 자신이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지시했으면 왜 그렇게 지시한 것인지에 대해 공개해야 한다.

 또한 전직대통령의 응급상황에 왠 자동차??? 헬기 불렀어야 한다.(의료장비가 탑재된 구급차량이 더 낫지 않으냐는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시 상황에서 필요한 장비는 휴대용 산소통, 심실제세동기, 환자상태 감시할 감시모니터, 수액 및 기타 의약품, 그리고 동승할 의료진이 전부다. 헬기에 다 실을 수 있다.)

 

 밝혀야 할 문제점4

 두부의 상처는 어떤 상태였는가? 그리고 신체 내 다른 부위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 두부손상에 있어서 두부에 작용한 외력은 그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긴다. 예를 들어 기다란 작대기에 맞은 상처와 망치로 맞은 상처는 모양이 다르다. 추락시에 바위에 부딪힌 상처와 땅바닥에 부딪힌 상처는 모양이 다르다. 노통은 부엉이바위에서 추락사하였는데 부엉이바위는 경사가 70도라고 한다. 경사 70도의 바위라면 멀리서 도움닫기를 하고 뛰지 않는 이상 떨어지다가 바위에 몸이 부딪힌다. 당연히 낙하도중 바위에 부딪히고 나서 튕기고 다시 다른 바위에 부딪히고 구르고를 반복하다가 산의 흙바닥에 떨어진다.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부손상이 발생하였으면 두부열상의 가장자리가 단단한 바위에 부딪히면서 으깨질 것이고 상처의 표면에 주로 흙이 묻어있거나 할 것이다. 바닥으로 직접 추락한 경우는 두부열상 깊숙히 흙이나 풀 등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직접사인으로 지목되는 두부외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신체내 다른 외상의 정도를 알아야 한다. 당연히 온몸은 긁힌 상처로 가득해야 하고 팔다리의 일부분은 거의 꺽이거나 적어도 깊은 열상 정도는 있어야 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5

응급실 CCTV를 공개하라.

->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응급실에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 이를테면  응급실에서의 난동, 환자 사망시의 책임여부공방 등에 대한 증거수집을 위해 CCTV를 가동하게 된다. 노통 내원 당시의 CCTV를 공개해서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6

 권양숙 여사는 노통의 상태를 언제 처음 보고받았나? 왜 세영병원으로 직접 오지 않았나?

-> 권양숙 여사는 9시 30경이 되어서야 양산부산대병원에 도착했다는데... 도대체 오전 6시 40분 사고 이후 세영병원으로 노통이 이송될 때까지 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인가? 혹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인가?

 

밝혀야 할 문제점7

세영병원 내원 당시 현재 세영병원 내과과장말고 다른 당직의사가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먼저 노통의 상태를 살펴본 의사로서 그 사람의 진술이 꼭 필요하다.

 

 오전 7시 35분 ~ 오전 8시 13분 (이송중)

 

 차량을 통한 양상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밝혀야 할 문제점1

이송 중의 노통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 당시 동승한 의료진은 이송시의 의료기록을 공개해야 한다.

 

 

 오전 8시 13분 ~ 오전 9시 30분 (양산부산대병원)

 

언론보도에 의하면 노통이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내원하였을 때 다들 DOA(death on arrival)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망한 채로 실려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응급실 의사들은 어쨌거나 소생술을 시행한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여도 반응이 없어서 9시 30분 경 심폐소생술을 중단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사망시각을 의사가 사망선고를 한 시간으로 잡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실려온 환자의 상태가 DOA라 하더라도 심폐소생술을 끝내는 그 시점을 사망시간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환자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에 보도된 사망시간은 그래서 오전 9시 30분이다. 오전 9시 30분에 양산부산대병원의 어떤 의사가.. 노통에게 사망선고를 내렸을 것이다....

 

 

 

 

결론..


 

1. 증거를 토대로 결론을 내리십시오. 사건의 중대성에 비해 도무지 증거가 없습니다!!!! 수사당국은 증거부터 수집하십시오. 길가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까지 수집해야 합니다!


 

2. 노통의 시신은 부검해야 합니다. 전신의 상태에 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3. 사고현장감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현장에 대한 증거 없이 자살로 결론내리면 안됩니다. 모든 증거를 총괄하여 자살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 전까지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입니다.

4. 사건관련자들은 모두 다 재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이 번복되는 상황입니다.

5. 상기 2,3,4에서 나온 자료들을 토대로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야 합니다. 몇시에 어디서 어떤 자세로 어떤 바위들에 충격 후 추락했는지까지 모든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의혹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수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사를 맡은 경남지방경찰청은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하려 했습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님.. 편안하시길 빕니다.

 

p.s.)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니 인근의 회사원이 등산 도중 경호원을 만났었다고 하더군요. 그 회사원에게 노통을 경호한 사람의 사진을 보여 주고 그 때 만난 경호원이 그 사진 속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게 하십시오. 만약에 두 인물이 다르다면 그 날 산속에는 노통과 경호원 두 사람말고 또 다른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글은 마음대로 퍼가셔도 됩니다. 일개 소시민 의사가 그냥 답답해서 쓴 글입니다. 저작권 어쩌고 그런거 모릅니다. 퍼가시려거든 그냥 퍼가세요.

 

죄송합니다만 퍼가실때 출처는 좀 써주셨으면 합니다. 진술이 계속 번복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글의 내용이 최종 보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updated by PM11:10)

 

글을 퍼가실 때 제가 글에서 썼던 논지는 바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의 요지는 노통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추락사라면 그에 해당하는 증거들을 제시하여야 하고 그 증거들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게시판에는 '노무현 전대통령 추락사 아니다', '현직응급실 의사, 노무현 대통령 추락사망 아니다' 등의 제목으로 글이 달려 있더군요.

 이런 식으로 글 전체의 내용이 호도되면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쓴 글이 편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즉 부실수사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의혹제기가 엉뚱한 음모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가급적 글의 제목은 바꾸지 마시고 출처는 명기하여 주십시오. (updated by 5/28 00:36)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21319&hisBbsId=total&pageIndex=5&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원본글)

 

덧글1>

언론에서 노통 사고 당시의 혈흔을 공개했네요. 가소롭습니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외상성지주막하출혈을 야기할 정도의 두개골 골절 및 11cm 두피열상이면 적어도 수도꼭지를 쫄쫄쫄 들어놓은 듯한 출혈이 발생합니다. 저 사진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저 혈흔 주위로 대량의 혈흔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2. 두피손상은 떨어지는 도중 언덕 중턱 바위에 부딪히면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낙하예상경로 주위로 흩뿌려진 여러 개의 혈흔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3. 혈흔의 모양이 원형이고 주위로 튄 듯한 양상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을 보아 혈액이 튄 방향은 바위면에서 봤을 때 수직 90도 방향이며 바위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높이에서 혈액이 떨어졌을 것이다.

4. 혈액을 채취해서 DNA 감식을 의뢰하여 혈액의 주인이 노통인지를 알 수 있다.

5. 서거 다음날 봉하마을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어떻게 저 혈흔은 그대로 있지?

 

덧글2> 혈흔 관련해서 추가사항

1. 제가 위에서 말한 바위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높이라 함은 말 그대로 몇십센티미터 높이입니다. 혈액은 구성성분 중 40% 정도가 적혈구 등의 고체성분입니다. 물보다 점성이 좀 있는 편이죠. 그래서 바닥에 떨어져서 튀는 피가 다시 주위로 튈 때는 좁은 반경 내에 대부분 있게 됩니다.  응급실에서 외상환자들 받아볼 때 경험으로 볼 때 혈액 한 방울이 30센티미터 위에서만 떨어져도 좁은 반경을 가진 피 튄 자국이 나타나게 됩니다. 공개된 혈흔은 꼭 바위 바로 위에서 살며시 떨어뜨린 것 같더군요. 마치 그 혈액을 떨어뜨린 사람이 자기 몸에 그 피가 튈까봐 걱정하면서 떨어뜨린 것처럼....

 

덧글3> 세영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것은 맞는가?

1. 상기 질문에 대해 저는 일단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을 걸로 생각합니다.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노통이 내원할 때 기도삽관(intubation, 자발호흡이 없는 사람에서 저환기 및 저산소증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기도에 관을 집어넣고 강제로 호흡을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글을 저도 다른 네티즌이 쓴 글을 읽고 알긴 했는데 언론사 보도로 확인한 내용이 아니라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응급실에서 이루어지는 심폐소생술의 경우 기도삽관 상태에서 시행하는 것이 정석이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죠. 예를 들어 의사가 기도삽관에 실패하거나, 경추손상 가능성으로 통상적인 기도삽관이 불가능한데 코를 통한 기도삽관을 할만한 장비가 없거나 등...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에 따라 심폐소생술 시행 여부는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련 의무기록 및 CCTV 공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덧글3-1> 기도삽관에 대해 부가 설명

1. 통상 환자 이송시 특히나 중환을 이송할 때는 기도삽관을 반드시 하고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왜냐하면 이송중에 어떤 이유에서건 호흡곤란이 발생하면 구급차 안에서는 대처 자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분께서 지적하셨듯이 정말로 기도삽관 없이 자가호흡이 없는 심한 두부외상 환자를 52km 거리의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은... 제 짧은 식견으로 비추어 봐서는 거의 환자의 소생가능성을 0%로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덧글4> 부검에 관해..

1. 부검에 대한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부검은 사인이 불분명한 사체에 관하여 그 사인을 밝히기 위한 작업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망한 경우 우리나라는 주로 의사가 망자를 1차적으로 검안하고 그 사람이 평상시 가지고 있었던 질병이나 사망에 이르게 된 외인(external cause)을 판단기준으로 사인을 작성하지요. 하지만 의사가 봤을 때 사인이 정말로 불분명하거나, 사인이 명확한 듯 해도 망자의 유족이 그 사인에 반발하여 경찰에 변사신고를 하면 부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노통의 경우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두부손상을 사인으로 판정하였으므로 일단은 부검의 케이스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유족이 원할 경우는 가능하지요. 부검은 신체 내외를 총괄하는 아주 자세한 신체검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체 내부의 모든 공간(머리속, 목, 가슴, 배 등)을 열어서 그 내부 장기를 적출하여 장기의 상태 관찰 및 약물반응검사 등을 진행하는 과정입니다. 유족의 입장에서는 망자를 두번 욕되게 하는 것이라 여겨져서 꺼려할 수 있는 작업이죠. 하지만 노통의 경우 부검이 필요하다면 단순한 신체관찰 및 방사선학적인 촬영 등 최소침습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검사만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일뿐이고 결정은 유족들이 해야 하는 겁니다.

 

덧글5> 노통 추락후 28분간 방치되었다는 기사.(기사의 행간을 주목하세요.)

1. 6시 14분~17분 사이에 노통이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했고 이후 28분여간 혼자 남겨져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네요. 노통의 두부손상 상태로 보았을 때 노통의 사인은 두부손상이 아니라 과다출혈일 수도 있겠습니다. 의식소실상태에서 지혈시도조차 없이 30여분을 그 상태로 있었다면 출혈양이 상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인체의 혈액응고작용으로 피가 저절로 멎어서 경호원이 발견할 때까지 노통은 살아계셨겠지요.

일단은 출혈은 많았으나 목숨은 붙어 있었다는 가정하에... 지금 상태에서는 추락한 현장이 더 이상 손상되기 전에 그 장소를 빨리 찾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식소실상태에서 과다출혈하면서 한 자리에 머물렀으니 분명히 과다출혈의 흔적을 간직한 혈흔의 흔적이 부엉이바위 아래에 있을 겁니다. 상황이 저런데 현장조사에서 혈흔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노통의 사인이 추락사가 아니거나 경찰이 초동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덧글6> 자살이 아니라서 의문사인 것이 아닙니다.

1. 의문사가 꼭 타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의문사라는 말의 성격을 명확히 해야 할 듯 합니다. 제가 사용한 '의문사'라는 용어는 사인에 상관없이 사망 당시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노통의 죽음은 일단 자살로 생각되고 있지만 자살까지의 행적이 불분명하고 경찰의 공식발표로는 해결되지 않는 점들이 너무나 많아서 의문사인 것입니다. 모든 증거들이 수집되어 노통의 그날 행적이 명확해지면 이 문제가 해결될 듯 합니다.(정말로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의문사'라는 용어는 '사인이 불분명하다' 라는 말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인이라는 것은 망자를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사망 당시 행적과는 독립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3. 결론을 말하자면... 경찰에서는 노통의 의문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그날의 노통의 행적을 모두 추적해야 합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노통의 진짜 사인을 밝혀야 합니다. 현재까지의 노통의 사인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내린 '두부손상'입니다. 하지만 환자가 거의 사망한 상태로 내원하였으므로 응급실에서 진짜 사인을 밝히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노통은 추락사하면서 두부손상을 입었지만 즉각적인 지혈시도가 없어서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추락하면서 입은 심장파열로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 상황이라 따로 사인을 밝혀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노통의 행적이 불분명한 이 때 노통의 진짜 사인을 밝히는 것은 노통의 죽음에서 의문사를 굴레를 벗기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족들이 용기를 내어 시신을 부검토록 했으면 합니다. 역시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덧글7> 장파열 가능성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1. 제 글의 댓글은 아니고 다른 분이 제 글을 퍼다가 올린 글이 베스트로 올라가 있어서 그 쪽 댓글을 좀 읽어보았습니다. 장파열의 가능성을 제기한 글이 있더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복부손상에 대해서는 관통상과 둔상 두가지로 배운 것 같습니다. 관통상은 말 그대로 칼에 찔리거나 총 맞는 것이고 둔상은 둔탁한 외력이 복부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손상입니다. 복부둔상 발생시 장파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손상받는 장기는 복부 우상부의 간과 좌상부의 비장입니다. 특히나 간은 복부 내 장기 중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가장 크므로 복부손상시 가장 먼저 의심을 해야 하는 장기입니다. 간손상에 관해서만 본다면 외력의 크기에 따라 간좌상(간에 멍이 든 것)에서부터 간이 찢어지는 것까지 상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부검에 대한 의견을 지속하는 것은 그러한 신체의 모든 상태들이 사인을 밝히고 그 날의 행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늑골골절과 혈흉이 발생할 정도로 흉부손상 있었고, 골반뼈가 골절될 정도로 골반부 손상이 있었는데 흉부와 골부 사이의 복부는 손상이 전혀 없다면 그건 좀 이상한 거죠. 이러한 정보는 모두 부검에서 나옵니다. 

 

덧글8> 경호원의 진술번복 (updated by PM11:10)

1. 의학적인 부분은 아닙니다. 그냥 경호원의 진술번복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수사를 맡고 있는 경찰은 경호원의 진술번복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전직대통령에 관련된 상황이란 것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처음의 진술을 번복하고 있는 사람의 진술을 또 그대로 받아적기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그건 수사할 의지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 경호원의 진술이 나중에 또 바뀔 줄 어떻게 압니까? 중요한 것은 그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겁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당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팅을 하십시오. 각각의 시각에 어떤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실제로 진술한 것처럼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지 각각의 순간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것들인지, 각각의 시각에 만났다는 목격자들의 인원을 파악해서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지 목격자들과 경호원의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모두 파악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거짓이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정리된 글 : http://blog.daum.net/cleansoul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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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11:20 2009/05/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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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668005&hisBbsId=total&pageIndex=1&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2009.05.23 토 12:45

그자가 어떤 인생을 살았건,이유가 무엇이건,죽음으로 무엇을 말하고,이루려 했건 자살은 옳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자살이란 선택을 한 당사자가 전직 대통령이라면 그건 더욱 더 옳지 못한 행동인 것이다.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으니 세상이다.
충격받을 일도 아니고,감싸고 이해해줄 일은 더더욱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짜 자살을 했다면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으며,책임감이 결여된 비겁한 도피일 뿐이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발표를 믿지 않는다.
차분히 유서까지 남기고 준비된 자살을 할 사람이
조용히 집에서 죽을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뒤로 한 채
하필 단 한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뒷산으로 향했다는 얘기는 마치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 바로 앞에 있는 물병뒤에 숨어있던 간장을 마셨다는 얘기처럼 비논리적이다.
물론 목이 마를 때에도 물대신 콜라나 우유를 선택할 수는 있다.
두명의 경호원을 대동했다거나 조용히 혼자 산에 올라가 뛰어 내렸다면 자살발표를 믿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일기가 경호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아니다.
내 머리가 지금보다 조금 나쁘다면 그렇게 의심하겠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동한 단 한명의 경호원] 이란 정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상상을 사전에 불식시킬 역 알리바이인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로 얼마전 헬기를 거부했다.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함께 죽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달전 유시민 전 장관을 만났다.
어떤 방향으로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불행을 예감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아침먹고 멀쩡히 출근했던 가장이 들어올 때는 시신이 되어 돌아오고,
어제 웃으며 안부 전화를 했던 아들이 오늘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오던 시절이었다.
 
다시 역사가 되돌려지고 조만간 최루탄이 컴백하신단다.
그때처럼 의문의 죽음이 생겨나는 것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
'노무현 죽이기' 를 하더니 진짜 죽인 것일까?
그런 귀여운 질문은 하지 말아라!
답은 나도 모른다 이니...
 
분명한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 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은 영원히 둘로 갈라져 둘중에 하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만 할 운명인가 보다.
불행한 나라에 태어난 국민에게 불행을 헤쳐나갈 용기는 선택이 아닌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인 것이다.
 
 
2009.05.23 토 20:53

역시 나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군!
친필유서가 아니라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파일유서.
그것도 서거 당일날 몇시간 전에 작성.
내용은 급조한 것이 확연히 들어나도록 짧고,조잡한데 제목은 길기도 하지!
파일명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영혼에 베인 습관은 변할 수 없는 것!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리 인터넷을 좋아했어도 나이가 육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유서를 한글타자로 남겼다는건
월드컵 경기를 본 날 야구 꿈을 꿨다는 얘기만큼 독특하군!
내가 범죄심리학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죽기 바로 직전 유서를 남기는 자살자들은 99.9% 손목을 긋거나,목을 메지!
음독자살을 하거나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유서를 당일날 작성하지 않아!
왜냐하면 음독과 투신이란 방법에는 사전준비(약,장소)라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이 아무데나 가서 뛰어내리는 것 같지?
그건 나이아가라 폭포나 금문교 같이 물이 끌어당길 때의 얘기이고
사람은 점찍어 두었던 익숙한 장소로 걸어가게 되어 있어!
결국 음독과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사전에 계획했단 얘기이고 유서를 미리 작성해 놓는다는 뜻이지!
기네스북에 오른다면 가장 긴 유서제목이 되겠군!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렇게 모르나?
만약 진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자살하러 나가기 전에 급히 작성한 유서의 제목이라면
그 제목은 분명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였을거야!
유서제목이 신기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바람을 대변해주는군!
정말 신기한 일이지!
유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썼는데 왜 유서제목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대변할까?
세상은 속여도 나는 못속이지!
 

2009.05.24 일 16:08

역시나 의학적 정황들도 나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네요!
올해 63세의 당신은 일명 자살바위라 일컬어지는 30미터 높이 70도 경사각의 암벽에서 추락했어요!
그곳은 30대인 내가 떨어진다 해도 즉사할만큼 위험한 장소이죠!
암벽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뛰어 내리지 않아요!
인간은 암벽을 보면 반사작용으로 주춤하게 되기 때문에
자살자는 무의식적으로 먼곳을 보면서 최대한 멀리 뛰어 내리죠!
그렇게 뛰어내려 바위에 닿는 1차 충격으로 뼈가 부서지면서 장기가 파열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직접 사인은 두개골 골절 등 두부의 손상 이예요!
즉 당신은 떨어져서 구른게 아니라 구르면서 떨어진 것이죠!
스스로 뛰어 내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밀쳤다는 얘기예요!
당신은 분명 평소의 트레이드 마크대로 양팔을 위로 들고 손을 흔들다가
뒤에서 미는 충격으로 푸쉬업의 자세로 암벽을 짚으며 굴렀어요!
그 충격으로 양팔이 골절된 것이죠!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이 당신을 살게 했지요!
스스로 뛰어내렸다면 즉사했을텐데
누군가 뒤에서 밀어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암벽으로 부터 최대한 자신을 방어했죠!
경호원은 분명 거짓증언을 하는게 아니예요!
처음 떨어졌을때 당신은 분명 살아있었어요!
의식이 분명했고,경호원과의 대화도 가능했어요!
당신의 정확한 투신 시간은 23일 오전 6시 45분이었어요!
당신은 멀쩡했고,경호원은 당신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했기에
경호원은 초인적인 일념으로 당신을 들쳐업고 달려 자동차를 이용해 30분만에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한 거예요!
여기까지가 1단계예요!
문제는 병원을 옮기는 과정이죠!
당신은 처음 도착한 세영병원에서 청와대에 보고를 한 직후 부산대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23일 오전 7시 34분 까지 당신은 경호원 한명이 부축해 병원을 데려올 수 있을 만큼 멀쩡한 상태였어요!
김해의 세영병원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시골병원이 아니예요!
충분한 의료시설을 갖춘 현대식 병원이죠!
그런데 당신은 이상하게도 조금의 의논도 없이 부산대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마치 그곳이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것처럼...
결국 당신은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부산대 병원 도착 1시간만에 숨을 거두었죠!
정말 신기하죠?
젊은 사람이 실족을 해도 즉사를 할 만한 암벽에서 63세의 노인이 자살을 하려 뛰어 내렸는데
척추등 모든게 멀쩡해서 경호원 한명이 살릴려고 번개처럼 날라다 병원에 모셔다 놓았더니
죽지도 않았는데 청와대로 보고부터 하고 당신은 도토리 키재기같이 비슷한 병원으로
응급처치 기능도 없는 조그만 앰블런스에 실려 느릿느릿 옮겨져
마치 죽을 장소에 도착한 사람처럼 쓸쓸히 눈을 감았죠!
그 나이에 자살하려고 암벽에서 뛰어 내렸는데 어떻게 몇시간 동안이나 살아있었나요?
그래요! 당신은 옛날부터 초인이었으니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죠!
당신 죽으면서 어이가 없어 웃었군요!
요즘 대한민국에 쓸만한 조폭이 없어요!
특A급들은 다 연희동으로 갔거든요!
대통령씩이나 지냈으면서 당신은 왜 세상을 몰랐나요?
그들은 알고 있었는데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갔을 때는 사설경호부대를 운영해야 안전하다는 것을
경호원은 분명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만 기억의 퍼즐조각들을 잃고 있어요!
선진국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당장 최면수사에 들어갈 겁니다.
당신의 죽음은 타살일 가능성이 90% 를 넘어요!
타살이 아니라 해도 이건 분명 의문사라고 봐야죠!
당신이 죽어서 누가 이득이냐구요?
그럼 당신이 살아있다면 누가 손해를 볼까요?
김해세영병원에서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옮겨지는 40분동안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맘먹고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이 암벽에 머리를 부딪히면 절대 3시간이나 살아 있을 수 없어요!
그것도 그 자리에서 당장의 치료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말이죠!
풀밭에 떨어졌다 해도 피가 흥건해서 혈흔을 일부러 고생해 찾을 일도 없거니와
투신자살을 한 사람을 업고 병원으로 옮기면 옮긴 사람의 옷에 피가 가득 베이게 마련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을 위해 당신이 품고 있는 블랙박스를 보여주세요!
어떤 것이 먼저였습니까?
암벽에서 굴러 떨어져도 불굴의 의지로 살아있던 당신.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이 나중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머리를 둔기로 맞고 떨어진건가요?
두정부는 검도를 한 조폭들이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휘두를때 많이 노리는 곳이죠!
암벽에서 구른 사람이 왜 하필 머리 위쪽 부분에 11cm 정도의 찢어진 상처를 남겼나요?
머리가 찢어지는건 각목으로 맞았을 때이죠!
먼저 때리고 암벽에서 굴리는건 조폭들에겐 이미 고전이 된 살해 방법입니다.
 

2009.05.24 일 05:41

후후후~ 왕거니가 하나 걸렸군!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문사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해줄 증거는 바로 경호원이 증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몽고인이 아닌 이상 300미터 밖의 사람을 보고 사람이 지나간다라 말하지는 않지!
산에는 나무가 있고,5월은 나뭇잎의 무성함이 절정에 달할 때.
아무리 높은 산정상에 서있다 하여도 사람을 보는 것은 바로 밑의 코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곧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 바로 아래쪽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는 뜻!
첫째 부엉이 바위의 구조는 뒷편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한쪽면으로만 투신이 가능한 구조.
결국 그 얘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래를 보며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라고 말을 하면
경호원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자 여기선 두가지 상황이 성립되지!
먼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 가까이로 걸어가면 직책상 요인보다 뒷편에 서있는 경호원은 직분상
"각하 위험합니다." 라고 만류하게 되고 (뛰어내리는 것이 불가능 해짐.)
다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호원이 발걸음으로 이동없이 바로 뛰어 내릴 수 있는 위치까지 간 것이라면
이는 100% 경호과실인 것이지!
즉 한눈을 파는 사이 뛰어 내렸다는 증언은 전혀 말이 안된다는 것.(경호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뒷쪽에 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기 때문)
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 앉아 책한권을 읽고 뛰어 내린 것이 아니야!
경호원은 분명 바로 뛰어내렸다고 증언했지!
부엉이 바위의 높이는 30미터.
30미터 절벽위에서 성인남자가 떨어지는데 저기 지나간다던 그 사람이 그걸 몰랐을리가 없지!
봉화산이 서울 시내에 위치한 남산이었다면 저기 지나가던 그 사람은 겁많은 도시청년일 수도 있지!
무서운 생각에 그냥 도망갔을 수도 있어!
그러나 경남 김해의 가파른 암벽 및을 꼭두새벽부터 혼자 걸어가던 그 사람이 소심한 여고생일리는 없는 것!
30미터 절벽위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도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는건 전혀 설득력이 없어!
정리하자면
한눈을 파는 사이 뛰어내렸다는 경호원의 증언은 100% 거짓이며,
이 경호원이 인생을 종칠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혼자서 노 전대통령을 수행하며 초긴장을 했을 텐데
그런 경호원이 달음박질 없이 바로 뛰어 내릴 수 있는 위치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면
그건 경호원이 노 전대통령을 죽였다는 얘기나 진배없는 것이라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목격자부터 찾는 것은 수사의 기본.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는데
서거 직전 전직 대통령의 입으로 직접 언급한 '저기 지나가던 그 사람(목격자)은 왜 수소문해 찾지 않나?"
어째 일제시대부터 우매한 대한민국 국민들 쉽게 속여가며 권력을 유지해오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부 닭대가리로 보이던가?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나?
가끔은 돌연변이로 대한민국에 나같은 사람도 태어나는 것이거든
차라리 "저기 비행접시가 날아가네!" 라 말하고 경호원을 따돌렸다 주장해라!
 

2009.05.25 월 15:50

이놈들이 전직 대통령을 폭행 살해하고서 대국민 사기극을 꾸미고 있네!
그러나 트릭은 아무리 치밀해도 결국 깨어지게 마련이지!
김해 세영병원 손과장이 말한 세영병원의 도착시간은 오전 7시경.
경남지방경찰청이 24일 오전 2차 브리핑을 통해 밝힌 노 전 대통령의 투신시간은 오전 6시 45분.
양쪽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결국 거짓말은 경호과장이 하고 있는 것이지!
부엉이 바위 위에서 세영병원까지 단 20분만에 도착했다는 얘기인데
경호과장도 부엉이 바위에서 굴러 내려왔나?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오는 시간 + 노 전 대통령을 업고 차로 가는 시간 + 차로 세영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 = 20분? 절대 불가능 하지!
노전대통령이 오전 7시 35분에 김해 세영병원을 출발해 양산 부산대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13분이야!
엠블런스에 싣고 도로를 달려가도 40분이 걸리는데
그 많은 일들을 겪으며,놀라서 손이 부들부들 떨려 사고가 안나면 다행인 상황에
부엉이 바위 위에서 세영병원까지 도착하는데 그 절반인 20분이 걸렸다고
니가 무슨 슈퍼부엉이냐? 아니면 본래부터 죽일 계획이라 심장이 평온했던 것이냐?
혹시 너도 고향이 봉하마을이라 세영병원 가는 길을 통달했던 것이냐?
아니면 범행전에 미리 동선 코스를 답사해놨던 것이냐?
봉하마을 택시기사가 가도 니보다는 느리겠다.
결국 답은 하나.
최종적으로 일을 마무리한 장소가 부엉이 바위 아래가 아닌 세영병원에서 가까운 장소였다는 뜻이지!
더 간이 오그라들게 만들어 줄께!
거기에 세영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과장과 노전대통령만 왔던 것이 아니라
경호실 차량에 비서진과 경호팀이 동승했다고 증언하고 있어!
이건 무엇을 증명할까?
이동시간이 플러스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사저를 나갈 때는 둘이서만 나갔는데 비서진과 경호팀이 동승해서 세영병원에 왔다는 말은
결국 이과장이 노전대통령을 싣고 사저에 들러 비서진과 경호팀을 태웠던지,
아니면 이과장이 무전을 해서 비서진과 경호팀이 사고장소로 왔다는 뜻이지!
어때? 부엉이 바위 꼭대기에서 세영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20분이 아니라
이 시간만 해도 20분은 걸리지!
결국 답은 하나.
틀린 그림을 찾았나?
그렇지 바로 그거지!
노전대통령과 이모과장은 차를 타고 나오지 않았어!
즉 이모과장이 무전을 해서 사람들을 불렀다는 뜻이지!
다음 과정을 볼까?
심장이 멈추도록 만들어 주지!
경남지방경찰청은 이렇게 발표했지!
"수행 경호과장이 사고 직후 무전 등으로 문모 비서관에게 연락했고 문 비서관으로부터 다시 연락받은 박모 비서관이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유서를 처음 발견했다."
유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동행한 이과장으로부터 무전을 받은 문 비서관에게 연락을 받은 사저의 박모비서관 이었어!
이거 완전한 그림이 나오잖아?
이과장은 현장에,박모 비서관은 사저에,그럼 문 비서관은 어디에 있었던 건데?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서 이동시간이 빨랐던 것!)
그리고 노전대통령이 추락했다는 무전을 받고 노전대통령의 컴퓨터 바탕화면부터 확인한 박 비서관은 뭐하는 새낀데?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닌가?
세상에 어떤 상식있는 인간이 전직 대통령이 암벽에서 추락했다는 무전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부터 확인하나?
상식적으로 경호원이라면 추락했다는 무전을 받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거 아닌가?
방으로 들어가려면 권여사에게 먼저 알렸어야지!
처음부터 컴퓨터 조작하는게 임무가 아니라면 어떤 미친놈이 추락했다는 무전받고 노전대통령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부터 확인해?
이건 완전히 책을 나눈 조폭들이야!
현장(행동대원)조,운송대기조,마무리조.
다시 현장으로 이동해 볼까?
너희들은 한가지 사실을 간과했지!
거기엔 노전대통령을 진짜 지켜주려는 착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
경비3초소에 있던 순진한 전경 1명이 오전 6시 20분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했어!
25분 전에 부엉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목격한 전경,
그리고 25분 전에 부엉이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을 보고받은 경호실 요원들이 모두
200미터 뒤 30미터 암벽에서 성인남자가 추락하는 것을 보지도,듣지도 못했다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며느리 들인가?
세영병원으로 가보지!
세영병원에 도착했을 당시 노전대통령은 피범벅 이었어!
게다가 피가 많이 묻은 노전대통령의 상의 또한 발견됐지!
어머!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노전대통령은 피범벅이 되어 세영병원에 실려오고,노전대통령의 피묻은 상의는 발견이 되었는데
어째 현장에서 노전대통령의 혈흔은 하루가 지나도록 발견을 못한거야!
아직까지도 어디서 얼마만큼의 혈흔이 발견되었다는 정통한 소식이 없네!
참 신기하기도 하지?
피범벅이 된 사람,피묻은 상의가 벗겨진 사람이 왜 현장엔 그토록 혈흔찾기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
답은 하나.
노전대통령은 그곳에서 살해된게 아니었기 때문이지!
후후후~ 범인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줄 아는 놈이었지만 법의학 상식이 부족한 놈이었어!
암벽에서 추락을 해도 상의는 벗겨지지 않는 단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
멍청한 범인은 노전대통령이 이곳에서 굴렀다는 증거를 꾸미기 위해
상의와 등산화 한짝을 이용했지!
그런데 바보같은 놈이 상의의 위치를 잘못 잡은 거야!
상의는 낙하지점으로부터 1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어!
나무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상의가 벗겨져 11미터 밖으로 도망가 버리는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왜 11미터 일까?
답은 두개야!
하나는 부엉이 바위 위에서 상의를 던진 것이지!
둘은 다른 곳에서 급하게 그 지점에 상의를 갖다 놓느라고 아무데나 놔버린 것이지!
경찰은 상의가 이과장이 노전대통령을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졌을 것이라 말했어!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결국 경찰도 추락하는 동안은 상의가 벗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인데
추락하는 동안에도 벗겨지지 않던 상의가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져?
그렇다면 그것은 떨어진게 아니라 일부러 벗긴 것이지!
범인이 피해자의 옷을 벗기는 이유는 단하나.
피해자가 항상 품에 간직하고 다니던 물건을 노릴 때이지!
여태까지 내가 올렸던 모든 추론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을 대충대충 넘겨 빨리빨리 끝내기 위해 국민들을 속이려고 하지만
미리 서로 입을 맞춘 것이 아니고 사건의 진행동안 변수가 생겼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이 어긋나고 있는게 분명해!
먼저 노전대통령을 수행한 경호과장의 진술은 100% 신빙성이 없으며
그에 따라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23일 오전 6시 45분에 뛰어 내렸다는 부분부터 다시 재고가 되어야 해!
일단 떨어진건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게 밀려 떨어진 것인지,아니면 위협을 피해 뛰어 내린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아!
분명한건 단 한가지 사실 뿐이야!
노전대통령과 이모경호과장이 단둘이 사저를 나갔다는 것!
그게 산책이었는지,그 방향이 부엉이 바위였는지,둘이서 밖으로 나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무 것도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개판.
수사법이 바뀌어야 해!
사건이 일어나면 지방경찰은 국과수가 올 때 까지 현장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일체의 출입을 금지 시켜야 해!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는데 동네경찰이 수사를 한다는게 말이 되나?
정말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졌다면 사저의 경호원들은 바로 통제에 들어가야지!
23일 오전 6시 45분 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들락거리고 사건현장을 오갔나?
무개념.
그 자체가 이미 범행인거야!
 

2009.05.25 월 08:32

난 대한민국 경찰의 노력과 양심은 믿지만 실력은 인정할 수가 없어!
노력이고 양심이고 간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건 지능이고,실력인거야!
미국이나 영국의 수사팀이 와서 조사후 자살발표를 하기 전에는
내 홈피에서 만큼은 타살로 잠정 결론 내리겠다.
추리는 상상이 아니라 검증과 실험을 통한 과학적 인과론이야!
추론을 음모론이라 칭하는 무식한 나라는 미개한 후진국 한국이 유일하지!
내가 가진 최고의 의문점은
63세의 노인이 자살을 마음먹고 30미터 높이 70도 경사각의 암벽 위에서 뛰어 내렸는데
과연 3시간 동안이나 특별한 조치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게 가능할만큼 살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야! (그것도 사인이 두부손상인데 말이야)
지금 많은 네티즌들이 가장 의문을 갖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이 추락했으면 척추를 비롯 온몸의 뼈가 다 절단이 났을텐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경호원 혼자 업고 가서 승용차로 병원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인데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야!
즉 척추도 온몸의 뼈도 멀쩡했다는 뜻이지!
추락해서 절단난 사람을 어떻게 혼자 업고 갔느냐? 가 아니라 멀쩡했으니 혼자 데리고 간 것이지!
여기선 두가지 결론이 성립되는 거야!
하나는 자살하려고 뛰어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보호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은 처음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암벽에서 추락한게 아니라는 것이지!
봉화산은 경남 김해에 위치한 시골산이지만
부엉이 바위는 사저에서 2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알잖아? 당시 사저 주변에 얼마나 많은 기자들과 사람들이 24시간 눈을 부릅뜨고 특종거리와 볼거리를 노리고 있었는지
그런데 30미터 높이에서 먼지가 아닌 성인남자가 추락하는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어!
시골마을 고요한 아침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져도 그 소리는 상당한 파장력을 소유하지!
사람은 자살을 한다 해도 긴 비명은 아니라도 충격으로 인한 단말마의 소리라도 내지르게 되어 있어!
아무도 보지 못했고,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
덧붙여 새로운 사실 하나가 나왔지!
권양숙 여사도 산행에 동행하려 했어!
분명 혼자 올라간 남편이 궁금해서 봉화산 쪽을 수시로 쳐다봤을 거야!
아니 일부러 쳐다보진 않았다 해도 신경이 봉화산 쪽으로 쏠려 있었겠지!
왜 암벽에서 떨어진 사람이 머리가 깨져야지 하필 정수리 부분에 찢어진 상처를 남기나?
궁금하면 머리통을 바위에 박아 보라고 과연 정수리가 찢어지나?
박은게 아니라 맞은 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것은 어떤 분야로도 논리적인 설명이 안돼!
범죄 심리학적으로 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분명 몇주전부터 계속 우울한 기미를 보였다고들 증언했어!
그런데 유서를 자살하러 나가기 20분전에 남기나?
법의학적으로 살펴 볼까? 3백미터 암벽에서 추락해도 점퍼는 벗겨지지 않아!
점퍼가 벗겨지려면 팔을 벌려야 하는데 추락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팔을 웅크린다고
성인남자가 떨어지는데 나뭇가지 정도에 걸릴 거 같나?
걸리더라도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점퍼가 찢어지지!
나무에 걸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았어야지!
나무에 걸려 살아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점퍼를 벗어 버리고 도망치는데 쫓아가서 각목으로 후려쳤다면 말이 되지!
지능이 모자라기 때문에 추론이 나오면 소설을 쓴다고 빈정대는 거야!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이번 사건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그려 원래 계획대로 죽었어야 하는데 안죽었으니 어쩌겠나?
범인은 목표가 어긋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후회가 밀려 오는거야!
죽일 사람이 멀쩡하니 최선을 다해 살리는 수 밖에
그런데 살아있던 사람이 진짜 죽었어! 언제?
청와대에 전화하고 병원으로 이동해서 도착하는 동안에
40분전엔 가망이 있어서 큰 병원으로 옮기는데
40분뒤엔 이미 심폐소생술도 못할만큼 저승사람이 되어 버리나?
누굴 바보로 아나?
그건 니들같은 닭대가리들이나 속아 넘어가는 것이고
죽을 사람이면 세영병원에서 죽게 내비두고 사저의 권양숙 여사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게 순서이고
옮겨서 살 사람이 40분만에 송장이 됐다는건 옮기는 40분동안 죽였다는 뜻이지!
처음부터 세영병원은 예정에 없던 돌발수였지!
암벽에서 추락해도 바로 죽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변수였으니까
원래 계획은 암벽에서 추락. 즉사하거나 의식이 없었다면 바로 부산대병원으로 가는 것이었지!
그러니까 니가 바보인 것이지!
청와대에 중간 보고는 왜 하나?
그러니까 니가 똥줄타는 아마추어인 거야!
봐라!
청와대에 보고를 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완전히 서거한 다음에 하는 것이 정상이지!
그게 아니고 그토록 급하게 먼저 해야 했다면 떨어지자 마자 했어야지!
세영병원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는건 뭔가?
일이 틀어졌단 얘기 아닌가?
마지막으로 내가 여기다 싸인하나 해주지!
난 이모과장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제 3 의 인물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임무를 완수하면 니놈은 살 수 있을 것 같나?
니놈도 삼년안에 죽을테니 두고 보라고
그리고 집착해서 기다릴 필요도 없어!
내가 아무리 베플을 즐겨한다 해도 이런 내용을 공론화 시키지는 않으니까
중요한건 어떤 글이냐 하는 것이지,어디에 쓰면 어떠한가?
내가 쓴 글은 돌고 도는 동안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엔 들어갈 사람 귀에 다 들어가더라고
 

2009.05.25 월 03:54

많은 사람들이 고 안재환 씨의 누나를 욕했지만
난 안재환 씨의 누나와 타고난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기에 그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분이 동생의 불행과 의문의 죽음을 해결할 수 있기를 아직까지 응원하고 있다.
무기력하고 무지하며 가증스런 인간들.
그게 한국인들의 공통점이다.
국장? 꼴값떨고 있네!
자살한 전직 대통령이 무슨 명예가 있다고 국장을 치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자살로 끝나면 노무현의 명예는 없는 것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 누가 이득을 보냐고?
노무현이 자살을 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노무현 자신이다.
국민들 가슴속에 영원히 측은하고,불쌍한 대통령으로 남는 것은 명예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분향소를 찾아가지만
그 눈물과 발걸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민들이 흘렸던 그 눈물과 발걸음이 아닌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서거가 되고 노무현의 명예가 지켜지기 위해선 그의 죽음의 본질적 원인 자체가 격상 되어야지
장례형식 따위가 격상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명복은 무슨 얼어죽을
허구한 날 명복을 빌면 죽은 사람이 살아오나?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눈물 흘리고,아쉬워 하고,명복 빌고 다 부질없고 가증스런 짓거리들이다.
진짜 애정은 그런게 아니다.
진짜 애정은 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떠난 자의 영혼이 잘됨을 비는 것이 아니라 떠난 자의 이름이 잘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잊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분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루트를 답사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먹으로 발로 심장으로 하는 것이지! 세치 혀로 하는게 아니다.
장난하나?
노무현이 담배 못피워 한맺힌 사람인가?
유시민이 대표로 한대 피게 했으면 됐지!
뭘 줄나라비를 서서 담뱃불을 붙여놓나?
한국인들은 그저 모든게 형식. 오직 같잖은 형식일 뿐이다.
모든 추측을 미루고서 라도 본래 경찰의 공식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지금이야 공식발표가 나왔지만
이 나라는 어찌된게 경찰의 공식발표가 나오기도 전까지 사람이 죽기만 하면 무조건 다 자살이다.
야 이거 진짜 죽어도 한국에서는 죽지 말아야지!
나처럼 자살을 혐오하는 사람이 어느날 죽어도 이 나라에선 바로 자살로 종결 처리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절대 자살을 안할 사람들은 미리미리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죽으면 그건 절대 자살이 아니라고 알려두어라!
그래야 당신이 죽었을때 주변 사람들이 자살이 아님을 알거 아닌가?
이 나라에선 꿀먹은 벙어리처럼 살다간 어느날 억울하게 죽어도 당신은 분명 자살자로 처리된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자가 죽어도 이토록 사건을 빠르게 종결하지는 않는다.
언제 제대로 된 수사라도 한번 해보았는가?
이건 완전히 "죽었다. 끝났다." 이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은 것처럼,이미 죽어있던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지지자들 마저 집단최면에 홀린 듯이 총체적 무지에 빠져 깊은 영혼의 웅덩이를 헤메고 있다.
무기력한거 착한거 아니다.
대가리 나쁜거 자랑 아니다.
남들하고 똑같이 사는거 올바르게 사는거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된 새끼들,죽으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새끼들이 바로 음모론을 펴지 말라는 놈들이다.
사이버수사대는 인터넷에서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주자] 는 놈들을 전부 잡아다가 조사를 해야 한다.
역사는 증명한다.
"대대로 입다무는 것들 치고 죄없는 놈 없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머리가 좋은 죄 뿐!
무식한 인간들이 내글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내글이 틀린 글이 되는 것은 아니요,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내글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3년 뒤에 이민갈 계획인가?
한나라당은 3년 뒤에 대통령 후보 내세우지 않을 작정인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여당을 위해 전직 대통령의 죽음엔 한점 의혹도 없는 객관적 수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건 타살이 아니라도 의문사이다.
제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물어보라!
예순 넘은 우리 어머니도 노무현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 했다.
이 나라엔 젊어도 늙은 놈들,무기력하고 무식하고 착한척 하는 역겨운 위선자들로 가득차 있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라면 인터넷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 줍시다."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주자는 놈들 글과 내글은 이미 문장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
사람들이 니놈보다 할일이 없어서 의문을 제기하겠는가?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대충 대충 좋은게 좋은거 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을 전부 쓸어내야 이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걱정마라!
니가 죽었을 때는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줄 테니...
 

2009.05.26 화 05:21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아마추어가 노전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제 무덤을 파고 있네!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25일 발표하기를
노전대통령이 서거 당일(23일) 정토원에 갔었다고 말을 했네!
대한민국엔 범죄심리학자가 단 한명도 없단 말인가?
이렇게 완벽한 증거가 나와도 그냥 자살로 처리하고 화장을 해?
봐라!
정토원이란 곳은 노전대통령이 뛰어 내렸다는 부엉이 바위에서 2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야!
그리고 노전대통령과 경호과장이 정토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6시 30분.
그런데 내가 앞선 글에서 분명히 언급했었지!
경비3초소에 있던 전경 1명이 오전 6시 20분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했다고
그렇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자살하는 사람이 일단 부엉이 바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정토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부엉이바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렸다고?
푸하하하~ 플로리다에서는 그렇게 증언하면 정신병동행이다.
자살하는 63세의 전직대통령이 혼자도 아니라 경호원을 대동하고 일단 부엉이 바위 위로 올라가서
전경에게 자신이 부엉이 바위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다시 200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정토원으로 내려가서 "저 자살하는거 맞습니다." 하고 흔적을 남겨주고
또 다시 200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부엉이 바위 위로 올라가서 뛰어 내렸다고?
천만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
첫째 자살자가 자살할 장소에 왔다가 그곳을 벗어나 다시 그곳을 찾아와 자살을 했다는건 범죄심리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얘기이고,
둘째 무슨 유격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몸도 안좋았다는 63세의 노인이 험한 산길을 25분안에 왕복했다는건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돼!
봐라!
오전 6시 20분에 부엉이바위 -> 오전 6시 30분에 정토원 -> 오전 6시 45분에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컨디션도 안좋은 63세의 할아버지가 무슨 바쁘게 자살할 일이 있었나?
만약 진짜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까지 올라왔다 내려가 정토원에 들러 다시 부엉이 바위로 올라가자 말했다면
그순간 바보가 아닌 정상적인 경호원이라면 모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거야!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노전대통령을 그대로 절벽가까이 가도록 놔둔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이미 중대한 경호과실이지!
이 트릭을 깨주지!
너희들은 언제나 한명이야!
대동한 경호원도 한명,부엉이 바위위에 있는 노전대통령을 목격한 전경도 한명.
내가 저번글에 언급한대로 노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진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노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 가지 않았어!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위에 가지 않았다면 경호원이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오는 시간은 없어지기 때문에
세영병원에 얼마나 빨리 도착했건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지!
6시45분에 투신을 했는데 세영병원 도착시간은 7시라는건 도저히 말이 안되지만
6시40분에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폭행을 당했다면 세영병원 도착시간이 7시라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이지!
처음 계획은 노전대통령을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 버리는 것이었지!
그래서 뛰어내렸다는 정황을 만들기 위해 전경 한명이 목격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
그런데 변수가 생겼어!
자신의 위험을 직감한 노전대통령이 갑자기 정토원으로 발걸음을 돌려버린거야!
확실한 공포가 엄습해 올 때 피해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만
위험이 직감적으로 느껴질 때 피해자는 싸인을 남기는 법이지!
정토원은 노전대통령이 남긴 표식이야!
어떡하나? 따라가는 수 밖에!
그런데 거기서 부처님의 도움이 계셨지!
선진규 정토원장은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이렇게 물었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사람이 정토원에 찾아오면 그 첫인사를 "무슨 일이 있으시냐?" 로 하는 원장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만큼 무슨 일이 있어보였던거야!
그런데 재밌는건 선원장은 자살하려던 노전대통령을 보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던게 아니라
따라온 경호원과 눈을 마주친후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어!
왜 그랬을까? 경호원이 자살하려고 맘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경호원의 눈에서 뭘 느꼈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을까?
그런데 여기서 경호원의 대답이 해답을 말해주지!
무슨 일이 있냐는 선원장의 질문에 경호원은 이렇게 대답했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게 상식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경호원의 정상적인 대답이라면 "네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였겠지!
아무 것도 아니다란 대답은 뭔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
누가 갑자기 "너 뭐하냐?" 라고 물어오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것이지!
한마디로 사람은 상대방이 나에게 많은 말을 걸어오지 않기를 바랄 때,빨리 이 상황이 끝나주기를 바랄 때
바로 아무 것도 아니란 대답을 하게 되어 있는 거야!
어디까지 연결되고 누구까지 엮여있니?
24일 있었던 경찰의 브리핑에선 노전대통령이 정토원에 들렀다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어!
경찰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은폐한거니?
그건 아니었겠지!
그런데 왜 25일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발표가 나왔을까?
목격자인 정토원 원장님은 매수를 못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어떻게 할까 고민해보니 정토원에 들렀다고 발표를 하는게 자살의 당위성을 높여줄거라 착각했던거야!
그러나 너희들은 대한민국에도 나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
여기가 만약 미국이나 영국이었다면 뒤집어질 일이야!
한국에서 권력을 누리는걸 하늘에 감사하고 겸허하게들 살아라!
내가 왜 이런 글을 자꾸 올리냐고?
자존심이지!
내 머리에 대한 자존심.
난 내가 억울하게 죽는건 용서해도,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는건 절대로 용서못해!
뭘 고개를 갸우뚱 거리니? 미련한 놈아!
나를 죽이는 남은 용서해도,속아 넘어가는 내 자신은 용서하지 못한다고...
 
 
2009.05.27 수 00:27

하하하~ 어떠니? 핏덩이들아^^
몸에 힘좀 있으니 사람 죽이는게 쉬워 보였지?
*만한 핏덩이들이 이 넓은 세상에 어떤 잘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깝치고 있네!
나원 같잖아서
내가 얘기했지?
위협을 직감한 노전대통령이 발길을 정토원으로 돌렸다고
거기서 니가 정토원장이랑 눈마주쳐서 버벅대는 사이에 노전대통령이 자살하러 부엉이 바위로 혼자간게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을 친 것이지!
놓쳐? 뭘 놓쳐?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작당을 한게 아니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전을 왜 치나?
노전대통령이 자살할 거란걸 미리 알고 있었어? 아니잖아!
니가 무전을 칠 그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때 였어!
그런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무전을 왜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잖아!
넌 깜짝놀라 무전을 쳤지?
왜 쳤을까?
바로 유서를 맡은 놈 때문이었지!
난 처음부터 왜 유서가 바탕화면에 떠 있었을까? 생각했어!
바로 이제 그 이유를 알게됐지!
사저에 남아있던 공범은 노전대통령의 컴퓨터가 있던 방에 두번을 들어간거야!
한번은 유서를 작성하러,그리고 또 한번은 놓쳤다는 무전을 받고 유서를 삭제하러
그런데 인기척이 들리자 미쳐 유서를 삭제못하고 급하게 컴퓨터도 못끈채 방을 나와버렸지!
무전의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
넌 형사가 아니라 경호원이야!
전직 대통령이 무슨 범죄자니?
니가 쫓아가서 뭔가를 해야할 입장이 아니라면 놓쳤다란 무전은 맞지가 않지!
폭행치사가 아니라면 노전대통령의 시신을 일본인 의사에게 정밀검사 하도록 맡겨봐!
한국은 독립할 지능이 안되는 나라.
난 일본인 만큼은 믿는다.
그래!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 고 치자!
그리고 노전대통령이 널 따돌리고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고 치자!
그럼 너는 정말 용한 점쟁이로구나!
부엉이바위는 정토원 바로 옆에 있는 바위가 아니야!
아무리 봉화산이 뒷산이라도 거긴 서울이 아니지!
녹음이 우거진 5월의 시골산에서 200미터나 떨어진 부엉이바위 아래 노전대통령이 쓰러져 있을 줄 넌 도대체 어떻게 알았던 것이니?
내가 치명타를 날려 줄께!
너희들은 한놈이 아니었던 것이지!
도망치던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다른 놈과 마주쳤던 거야!
바로 등산객이 만났다던 혼자 거닐던 경호원은 니가 아니라 그놈이었지!
정토원에서 놓쳤다고 무전을 치던 니가 부엉이바위 아래 쓰러져 있던 노전대통령을 찾았다는건 말이 안돼!
넌 뒤에서 쫓아가고 한놈은 부엉이 바위 아래 숨어 대기하고 있었지!
왜?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버리는게 애초 계획이었으니까 그놈이 거기 있었던건 본래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거야!
만약 노전대통령이 정토원에 들렀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셨겠지!
그런데 도착해야 할 시간에 도착을 안하니 궁금해서 숨어있다 나온 것이지!
그래서 등산객을 만나게 된거야!
너더러 사람들이 순간이동 했냐고 하더라!
어떻게 부엉이 바위에서 세영병원까지 20분만에 노전대통령을 옮기며 도착했는지
이젠 답이 나오잖아!
처음부터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고,너흰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분명 세영병원에 도착했을때 너희들은 한명이 아니었다고 증언이 나왔지!
먼저 각목으로 두정부를 내리쳤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노전대통령의 양발을 붙잡고 배쪽으로 내리 눌렀니?
그래서 등산화를 양쪽다 벗겼다가 생각해보니 이상해서 한쪽은 다시 신겼니?
노전대통령이 도망치는 사이 메모라도 남겼을까봐 주머니를 뒤지려고 상의를 벗겨니?
직접사인은 두부손상,그리고 뼈들은 이곳저곳 부러졌는데 신기하게도 장이 파열됐다는 소견은 듣지 못했거든!
난 처음부터 의심을 했었지!
암벽에서 자살하려 한 63세의 노인이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으며,혈흔 찾기가 힘이 들었을까?
니가 한번 30미터 암벽에서 죽기로 마음먹고 뛰어내려 볼래?
니몸이 어떻게 되고 추락장소에 혈흔이 얼마나 남나?
그래서 니들은 아마추어.
폭행으로 추락사를 꾸미려니 대충 모양새는 유지했는데 장들 파열을 못시키고,뼈들을 분산시키지 못하고,피를 많이 뽑지 못했던거야!
하지만 의사들이 바보는 아니야!
언제 의사들이 제대로 된 정밀검사라도 할 여유가 있었니?
그대로 세영병원에 남아 있었다면 의사들도 의문을 제기했을 거야!
그런데 병원을 옮겼지!
왜?
세영병원은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세영병원으로 갔을까?
엔딩타임 오전 7시 20분을 초과했기 때문이지!
원래 계획은 오전 6시 30분에 노전대통령을 부엉이바위에서 밀어버리고
곧장 양산부산대병원으로 가는 것이었지!
그런데 도망친 노전대통령 때문에 시간이 초과되니까 일단 세영병원으로 갔던 것이지!









경찰 브리핑 자료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159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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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6:40 2009/05/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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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04867&RIGHT_DEBATE=R2

 

0.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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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 국가의 최정상급 정치인이다.
당신은 평생동안 청렴함과 도덕성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정치를 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신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신의 정치적 지위를 본 수많은 정/재계 관계자들이 로비와 청탁을 시도했고, 당신의 배우자, 두 자녀, 당신의 형, 당신의 친구가 모두 부적절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찰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를 시작했으며, 끝내 당신의 주변인들이 돈을 받은 단서와 정황증거를 모두 확보했다.

 

하지만 검찰은 실질적인 피의자로 당신을 직접 지목하며 당신의 배우자와 두 자녀가 받은 돈은 사실상 당신이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서 기소하려고 한다. 검찰은 배우자와 두 자녀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에 불과하며, 배우자와 자녀에게 돈을 준 사람은 당신을 보고 돈을 준 것이지, 그들에게 돈을 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당신이 직접 받은 돈은 단 하나도 없다.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하려면 당신이 당신의 주변 가족들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알았음을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검찰은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상식적으로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 1.) 나는 결백하다. 무죄를 주장한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공인으로서 나를 믿어왔던 나의 지지자들을 배신할 수 없다. 설령 내 배우자, 내 자녀가 감옥에 간다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돈을 받지 않았으며, 돈을 받은 것은 내 배우자, 내 자녀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죄가 없다.

 

(선택 2.) 죄를 인정한다.

평생을 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 배우자, 그리고 나의 자식들을 버려가면서까지 나의 명예를 지켜야만 하는가? 여기서 내가 받았다고 말만 하면 내 배우자도, 내 자녀도 모두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차라리 나의 명예를 포기하고 나의 가족을 살리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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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나?

 

많은 외국분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외국 언론은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검찰의 비리수사'에 따른 심적 압박감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대로라면 이 사건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로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은연중에 간주해버리게 됩니다. 진짜 노무현이 고뇌한 것은 무엇인지, 진짜 노무현을 괴롭힌 것은 무엇인지, 진실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저는 '노무현의 딜레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2. 배경 법률지식의 이해.

 

법률적으로 보면 (대개 다른 외국도 똑같습니다.) 불법행위 / 위법행위를 저지른 피의자는 직접적으로 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 범죄 사실에 대해서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범죄자와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법률상 용어로 '선의와 악의'라고 합니다.

 

'선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몰랐거나 모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지칭하고,

'악의'는 국어사전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당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사람을 '악의'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법에서는 '선의'인 제3자는 철저하게 보호하는 반면, '악의'인 제3자는 가해자/피의자와 준하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게 됩니다.

 

검찰이 굳이 돈을 직접적으로 받은 권양숙씨나 받은 돈의 실질적인 이익을 취한 노건호, 노정연씨를 피의자로 잡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을 피의자로 잡은 것은, 사실상 이번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며 노무현 일가에 간 뇌물은 실질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보고 준 것이지, 그 가족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준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주변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양숙씨의 소환 조사, 노정연씨의 아파트 계약서, 노무현의 1억짜리 시계와 같은 것들을 예를 들며 '박연차가 이렇게 여러가지 형태로 돈을 줬는데 노무현 당신은 이것을 하나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검찰은 반문합니다.

 

검찰이 실질적으로 제시한 증거는 '박연차'의 구두 진술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에 물증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증에 준하는 증거 또한 거의 없으며 그나마 물증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환갑 선물인 1억짜리 시계 2개인데 이것을 권양숙씨는 잃어버렸다고 진술합니다.

 

그래서 검찰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박연차의 구두 진술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소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구속/구속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소와 구속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구속을 하는 이유는 기소하는 과정에 있어서 피해자가 도주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기타 구속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 사유가 있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한해서 구속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1) 검찰은 제시할 증거는 확실하게 없으며,

2) 그나마 구두로 증언하는 박연차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변인들이 돈을 받은 사실을 알았고, 나아가 '상대가 대통령인만큼 자신이 돈을 주지 않으면 불측의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로비에 대한 처벌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는 법적 이해관계자인 만큼 그의 진술에 진정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법정 공방에서는 자신의 결백함과 무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 왔구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끝까지 괴롭힌 것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가져다주는 결과는 결국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노무현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3. 검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목적

 

검찰은 처음부터 노무현 대통령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가족들이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주변 가족들을 피의자로 잡지 않았습니다. 분명 권양숙씨를 상대로 100만 달러 (+40만 달러) 에 대한 기소를 했으면 권양숙씨는 거의 100% 불법자금 수수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또, 노건호씨와 노정연씨는 나름대로 해당 수수자긍메 대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한 자로서, 혹은 '악의'의 제 3자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끝까지 노무현만을 피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이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노무현 대통령인 만큼 그들은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연관시킬 무언가를 찾는 표적수사만 계속했고, 그들이 원한 것은 '죄인' 노무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 노무현이란 법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도덕적인 '죄인' 노무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과 도덕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법적 잘못은 처벌을 받지만 도덕적 잘못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잘못은 잘못이다.' 는 것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인정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4. 검찰이 만들어낸 '노무현의 딜레마'

 

글머리에서 밝힌 예제와 같은 상황에서, 당사자인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결국

(선택 1) 결백함을 계속 주장한다.
(선택 2) 억울하지만 죄를 인정한다.

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선택했었던 (선택 1) 결백함을 계속 주장한다를 선택할 경우, 법정 공방을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높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입으로 자기 자신의 가족들의 죄를 고발해야 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 대통령은 '그래, 넌 직접 네가 돈을 받은 사람은 아냐. 그러니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죄가 없는 결백한 사람이야. 하지만 넌 너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가족을 고발했어. 넌 가족을 팔고도 네가 (평생 주장해왔던, 신념이라고 여겨왔던) - 결백하다고, 도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니?' 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우자도, 가족도 팔아버린 비양심적인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노무현은 작년 말 노건평이 세종증권 비리로 수사중일 때, 왜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형이 지금까지 죄를 부인하고 있는데, 동생된 입장으로 먼저 대국민 사과를 해버리면 형의 죄를 인정하는 형태가 되므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 가족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무현에게 자기 자신의 입으로 가족들을 팔아넘기는 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택 2)를 고를까요? (선택 2)를 고르게 될 경우에는 가족들이 지은 모든 죄의 최종적 책임,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이 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보호한다는 보장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시켜서 내 가족을 통해서 돈을 받게 했다.'는 그림이 그려지는데, 이 경우 가족들은 범행의 주체는 아니지만 최소한 공범으로서 처벌은 받게 됩니다. 이 경우 노무현 대통령은 '평생 도덕과 청렴함만을 부르짖던 자가 전가족을 동원해서 비리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만약 제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저 역시 (선택 1)을 선택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선택 1)이 그나마 자신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전 가족을 동원한 비리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선택 2)보다는 그나마 (선택 1)이 최악이 아닌 차악의 선택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지도 결국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파멸을 불러옵니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의 딜레마입니다.

도덕과 청렴함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될 경우, 자신은 법적으로 무죄를 증명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팔아야 하는 과정은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가족을 기꺼히 팔고자 할까요? 그렇다고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배반하고, 자신의 명예를 버릴 수 있을까요?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몇주간을 매우 고통스럽게 보냈을 것입니다.

 

 

 

4. '노무현의 딜레마'에 숨겨진 무서운 메커니즘 경제학의 이론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검찰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과 청렴함이라는 브랜드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구속을 하든 법적 처벌을 받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평생 도덕으로만 먹고 살아온 노무현을 '도덕적으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검찰을 존경하고 싶습니다. '대통령 주변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라는 사실(fact)에서 '주변인이 아닌 대통령 본인을 기소한다.'라는 행동(Action) 단 하나만으로 검찰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메커니즘을 조성하여 (시장) 참여자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애릭 메스킨 교수의 '메커니즘 경제학 이론'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존 내쉬의 게임이론(역시 노벨 경제학 수상, 죄수의 딜레마가 대표적인 케이스)을 한단계 더 발전시킨 최신 경제학 이론이지요.

 

메커니즘 경제학의 진정한 무서움은 과거 수많은 경제 이론들이 시장 참여자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때' 나오는 결과만을 설명한 것인데 비해 메커니즘 경제학에서는 시장참여자가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항상 최선으로 나옵니다.

 

성경에서 나온 내용인가요?

두 아이에게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눠주려면 한 아이가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한 아이는 자른 케이크에 대한 선택권을 주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메커니즘 경제학의 기초입니다. 이 경우, 어느 한 아이가 비합리적이고 착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어서 케이크를 불공평하게 자르거나, 더 작게 잘린 케이크를 선택하거나 해도 그 결과는 항상 두 아이를 만족시킵니다. 설령 두 아이 모두 비합리적인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경우라도 결과는 항상 아이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검찰은 기소 대상자만을 바꾸는 행위 하나만으로 노무현을 자신들의 승리 메커니즘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노무현을 딜레마에 빠뜨림으로서 노무현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자신들에게는 이익만을 가져다 주도록 한다는 이런 잔혹한 메커니즘을 만든 검찰이 정말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고, 그는 항상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검찰이 만들어낸 이 승리의 메커니즘에 빠지게 되자 그는 어떠한 선택도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뇌 속에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이 자살이, 검찰이 만들어놓은 '완벽에 가까운 메커니즘'을 깨는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의 케이크의 예에서 부모가 만들어놓은 완벽한 공평의 메커니즘을 깨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이는 부모가 준 선택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거나, 케이크를 아예 먹지 않겠다고 하거나, 케이크를 바닥에 엎어버리거나, (섬뜩한 이야기입니다만) 다른 아이를 사라지게 하거나 자기 자신이 사라지면 메커니즘은 깨집니다. 애시당초 목적(두 아이에게 공평하게 케이크를 나누어준다)을 가지고 만든 메커니즘이 더이상 그 목적을 위해 작동을 하지 않게 되어버리지요.

 

그가 선택한 자살의 결과 검찰은 더 이상 노무현 일가를 몰아붙일 수 없게 되었고, 노무현의 도덕성에 더이상 흠집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일가의 비리는 영원히 의혹으로만 남게 되었고, 재판으로 판결이 확정되는 일이 없어진 만큼 노무현이 뇌물을 받거나 받는데 방조, 혹은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포괄적 뇌물죄의 적용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노무현이 도덕적으로 죄인이 될 가능성도 아예 사라졌습니다. 또 가족들이 기소될 가능성도 사라졌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노무현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지켜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국민 그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슬퍼합니다. 애도합니다. 오열합니다.

 

 


5. 반드시 검찰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이유.

 

 

법에서는 간단하지만 절대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는다.'

 

이 명제는 간단하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겠지요. 또, 그 잘못을 주체적으로 행한 사람인지, 아니면 직 간접적을 관여한 사람인지, 혹은 무관한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행위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첫번째로, 100% 기소 + 처벌 가능한 권양숙, 노건호, 노정연이 아닌 불확실한 노무현을 피의자로 잡은 점.

                (잘못한 자의 선택)
두번째로, 100% 입증가능한 확실한 잘못을 입증하기보다는

               오히려 입증하기 어렵고 그 결과가 불확실한 노무현의 혐의를 계속 입증하려고 한 점 (잘못의 입증)
마지막으로, 150% 이해 가능한 불법자금 수수 등등... 정말로 일반적(?)인 죄명이 아닌,

                  '포괄적 뇌물죄'라는 불확실한 죄명을 적용하려고 한 점 (잘못에 대한 결론)


 

이러한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메커니즘 경제학이라는 툴로 설명하면 은근히 쉽게 풀립니다.

 

1. 어디까지나 노무현 대통령만을 노리는 표적의 고정.
2. 행위의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브랜드 훼손으로 이어질 것.
3.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

 

이상의 전제 하에, 검찰은 완벽에 가까운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습니다. 무죄라고 주장해도 도덕적 죄인이 되고, 유죄라고 인정하면 법적 죄인이 되는 무시무시한 메커니즘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 메커니즘안에 노무현 대통령을 집어넣기만 하면 어떤 형태로든 노무현 대통령은 죄인이  됩니다. 무시무시한 메커니즘이지요? 이 메커니즘을 위해서 검찰은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 것입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메커니즘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이고 완벽한 재료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분명 검찰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 권양숙씨가 정상문 비서관을 통해서 박연차로부터 돈을 수수했습니다.
노건호씨와 연철호씨도 박연차로부터 투자자금을 받았습니다.
노정연씨의 집도 노정연씨 혹은 권양숙씨가 주도적으로 돈을 받아 산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잘못들은 모두 명백하고 확실한 '사실' 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그 사실에 관여하고 행동한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권양숙씨가 돈을 받았으면 권양숙씨가, 노무현 자녀들이 돈을 받았으면 노무현 자녀들이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이번 사건을 '원칙'과는 어긋나게 핵심과 몸통찾기에만 주력했고, 수사 흐름을 시종일관 '노무현'을 중심에 두고 진행해 왔으며, 언론에 공개하는 내용도 어디까지나 주체는 노무현인 것으로 흘렸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입니다. 나아가, 기소 대상을 노무현의 가족들 혹은 노무현을 포함한 노무현 가족 전원으로 잡지 않고 모든 사태에 대해 뭉퉁그려서 노무현으로 잡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검찰의 명백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검찰은 정말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했다고 확신합니다.

 

앞서 설명한 메커니즘에 대해서 검찰은 우연의 일치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반문합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인간이 고도의 정신행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의도가 없이, 정말로 우연히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 딜레마에 빠뜨릴 가능성은 0%입니다.

 

만약 검찰이 정말로 우연히도 노무현 대통령을 메커니즘속에 몰아넣었다면, 2007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애릭 메스킨은 노벨 경제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이나 물리학상 혹은 사회과학과 관련된 상을 받았어야 합니다. '위대한 이론'을 창시한 것이 아닌 '위대한 발견'을 한 게 되니까요.


애시당초 수사에 목표를 설정한 자.
그리고 그 수사를 설계하고 계획한 자.
마지막으로 그러한 수사를 하도록 처음부터 의도를 가진 자.

이 모든 사람들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 신분인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하니까요.

 

 

Ps 1.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사건에서 '무죄' 혹은 '유죄'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받았건 가족이 받았건 노무현 일가는 분명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최소 100만 달러 이상) 분명 공직자로서는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고, 이러한 잘못을 추궁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을 수사하고 추궁해나가는 검찰의 수사과정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노무현 대통령을 딜레마에 빠뜨려야만 했을까요? 왜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줘야만 했나요?

 

검찰은 분명 이번 사건을 '노무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이기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수사기간이 작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그리고 주변인, 지인, 정치적 동지 모두를 훌어내는 데다가 자신의 신념까지도 부정하도록 만드는 수사방법. 그리고 소환조사 후에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언론에 노출시키는 시간은 최대화했습니다.

 

이러한 수사방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분명 이러한 수사방법은 '노무현이 진실이다 아니다'를 가리기 이전에 노무현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게 됩니다. 무죄로 추정되는 피의자 보호는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검찰이 매번 언론의 의혹제기에 사실을 확인해주는 형태로 수사 중계를 해 왔습니다.

 

강호순같은 연쇄살인마가 경찰에 붙잡히면 그들에게 마스크를 씌워줍니다. 그것은 강력범죄 현행범도 최소한 법원의 판결 전까지 그의 인권을 존중해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그 최소한의 마스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의 비리 여부 이전에 수사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명백하게 검찰이 져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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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0:01 2009/05/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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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프라임, 동과 서 (080421)

 

제1편   명사로 세상을 보는 서양인, 동사로 세상을 보는 동양인

 

O 우주가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서양인과, 우주가 기(氣)로 가득차 있으며,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동양인의 차이가 현재 인식의 차이의 근원이라 볼 수 있다.

 

서양인은 두개의 물체가 서로 떨어져 있다면 서로 영향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음. 공간은 비어있기 때문. 동양에서는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가 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음.

 

동양인은 2500년 전부터 중력의 작용을 알고 있었음. 파장이나 자기장, 조수의 원리도 이해하고 있었음.

 

(실험) 나무로 만든 원기둥(닥스)을 두고 똑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원기둥과 직육면체 나무기둥을 놓고 어느 것이 닥스냐고 묻자, 서양인은 모양이 같은 플라스틱 원기둥을 선택했고, 동양인은 재질이 같은 직육면체를 선택.

 

O 서양에서는 물체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단수와 복수의 구분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동양의 언어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일일이 구분하지 않는다.

 

서양인은 사물의 개체성을 강조. 전체라는 개념은 개체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합의 의미.

동양인에게 전체란 하나의 덩어리와 같은 상태, 일체의 개념으로 이해.

 

동양인들은 사진을 보면 전체를 보는 쪽으로 뇌가 활성화됨.

서양인은 같은 경우 개별적으로 물체를 봄.

 

서양인 엄마는 아이들과 놀면서 '명사'를 많이 사용

동양인 엄마는 같은 경우 '동사'를 더 많이 사용 

 

서양사람들의 말에는 명사가 많이 사용됨. 그런 식으로 훈련.

동양사람들은 행동을 요구하는 동사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발견.

 

O 왜 서양에서는 명사가 발달하고, 동양에서는 동사가 발달했을까?

 

차를 더 마실거냐고 물을 때, 서양에서는 'More Tea?'라고 묻고 동양에서는 '더 마실래?'라고 묻는다. 마시다는 사람과 차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서로 연관). 서양에서는 사람과 차가 독립된 개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차라는 명사를 통해 질문의 의미를 표현(개체성 중시)

 

서양 : 개체성 중시 = 명사 (명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동양 : 관계성 중시 = 동사 (동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동양 : 모든 존재가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결과물이라고 인식. 수많은 인과관계에 통해 사물이 생겨남. 불교의 연기(=Arising 생겨난다. 동사적 의미)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양 : Being(존재한다. 고정적 존재)

 

한 물체가 파란색이면,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서양 : 그 물체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

동양 : 이 물체를 만들어낸 주변의 기 때문임. 주변의 다른 사물과도 서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인과관계에 의해 파랗게 됨.

 

때문에 동양인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양인보다 훨씬 더 많은 인과관계를 생각함.

 

O 사람들의 행동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동양 : 주변의 조건에 영향을 받아서 결정된다고 봄.

서양 : 그 사람 내부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고 봄. (사물의 내부에서 원인을 찾음)

 

서양에서는 내부를 탐구하다보니 원자를 발견하게 됨. 원자의 속성에 따라 사물의 속성이 결정된다고 봄.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이 물에 가라앉는 이유를 돌의 성질이 물에 가라않는 힘이 있고, 나무에는 물에 뜨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

 

하지만 중력은 물체에 내재된 힘이 아니라 물체간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힘이다.

 

(실험) 풍선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여준 후, 왜 그런지 동서양인에게 물어봄.

 

서양 : 풍선에 바람이 빠지면서 날아갔다 (사물의 속성)

동양 :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날아갔다 (주변의 환경)

 

서양 : 사람이 착한 이유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착한 속성 때문이라고 봄.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 자체가 잘못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됨.

동양 : 상황에 따라 친절해질수도 있고, 무례해질수도 있다고 봄. (예)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상호작용.

 

(실험) 가운데 사람은 행복한 표정, 주변 사람은 하나는 행복한 표정, 하나는 불행한 표정을 가진 그림 두개를 주고 가운데 사람이 행복해 보이냐는 질문.

 

서양 : 두 그림 다 중심인물이 행복하다고 답변

동양 : 주변사람이 불행한 그림에서는 중심인물도 행복하지 않다고 답변

 

서양 : 호랑이 그림을 보면 호랑이에 훨씬 집중

동양 : 호랑이와 배경을 번갈아바라보기 때문에 눈동자의 움직임이 훨씬 활발함

           (호랑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호랑이로 인식)

 

사물을 둘러싼 주위상황을 장(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물은 항상 자신을 둘러싼 장속에 위치한다. 이를 입장이라고 함. 동양에서는 대상이 처한 입장이 그 대상의 상태를 거의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에 항상 대상의 주변을 잘 살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서양 : 인물화는 구도가 좁거나 반신상이 많음

동양 : 인물화는 전신이 다 나오고 배경까지 그림

 

서양 : 친구의 사진을 찍을 때 얼굴 위주로 찍고 배경은 적게 나오게 함.

동양 : 같은 경우 전체적으로 배경까지 다 찍음. 동양인은 여행지에서 배경이 바뀔 때마다 사진을 찍음

 

서양 : 자신의 시각으로 다른 사물을 바라봄. 서양화에서는 그리는 사람의 위치와 시각이 중요함.

동양 : 다른 사물이나 심지어 스스로를 볼 때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봄. 동양화에서는 조감도의 시점이 많음. 하늘에서 바라본 듯한 그림이 많음.

 

O 동양에서 음양은 빛과 그늘. 햇빛과 그림자처럼 음양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함. 주역에서는 이를 대대성(對待性)이라고 함.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 잡아함경

 

(실험) 원숭이, 팬더, 바나나 그림을 보여주고 두 개를 묶으라는 주문.

 

서양 : 원숭이와 팬더를 선택 (둘다 동물이기 때문에)

동양 : 원숭이와 바나나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기 때문)

 

서양 : 그림에서 개체를 배경과 분리해서 봄. 분리할 뿐만 아니라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능이 더 활성화 됨. 분리+해석 = 분석 (서양인들은 본능적으로 사물을 분석적으로 봄). 개체를 분리해서 본 후 규칙성을 발견하여 타당한 것을 선택. 유형별로 분류.

 

분석적 사고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관찰하여 그 속성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그리고 알아낸 속성을 중심으로 사물을 분류. 분류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을 중심으로 분류가 일어남.

 

"혼돈 속에 놓여 있는 사물들은 분리되고 구별되어야 한다." -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사물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지식이 축적되는 장점이 있다. SCIENCE의 어원에는 분리하다의 의미가 있다. 사물의 아름다움도 각 부분의 크기에 따른 규칙적 비율이 존재함을 발견(황금비)

 

 

제2편   서양인은 보려 하고 동양인은 되려 한다

 

(실험) 위에서 아래로 한 줄로 있는 물체에 대해 어느 것이 앞인지를 물었다.

 

동양 : 제일 앞쪽의 큰 물체. 자기와 가까운 물체 (방향이 밖에서 자기쪽으로)

서양 : 위쪽. 작은 것 (자신에게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진행방향이므로 먼쪽이 앞)

 

서양 : 보는 것을 중요시여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시각적 능력을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이라고 생각함. 투시법 : 관찰자가 중심. 모든 사물은 관찰의 대상이 된다. OBJECT = 관찰, 사물 / OBJECTIVE = 객관적

동양 : 인드라망의 그물.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고, 그물코마다 구슬이 있다. 구슬은 모든 사물을 의미하고, 구슬을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다.

 

서양 : 볼 때, 관찰자가 중심

동양 : 대상이 중심.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타나는 것.

 

Don't you like kiwis? 라고 물었을 때,

동양 : '네, 안좋아해요'라고 하지만 (상대의 입장 중심 = 3인칭 시점, 아웃사이더 관점)

서양 : No, I don't like it.라고 한다. (나의 입장 중심 = 1인칭 시점, 인사이더 관점)

 

동양 : 상대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관계적 투사).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입장에서 볼 때와 정반대의 관점이 나옴.

서양 :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중심으로 사고(자기 중심적 투사). 어떤 사람이 좋다고 내가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에 대해 그렇게 평가할 거라고 생각.

 

동양 : 상대중심에서 생각하는 입장. 요리도 미리 잘라먹기 편하게 잘라놓는다. 젓가락 문화가 발달.

서양 : 자신이 잘라먹는 스타일이므로 포크와 나이프가 발달. 

 

O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 - 아리스토텔레스

 

서양 : 나가 모든 것의 중심이다. 그래서 I는 항상 대문자로 쓰인다.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나누다란 뜻의 Divide와 부정형인 In을 결합하여 '더이상 나눌 수 없는'이란 뜻을 가진다. 원자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 서양의 개인주의적 관념 : 서양에서는 나의 욕구가 남의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시 되므로 나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가 충돌할 경우 나의 욕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함. 개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므로,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약함.

 

"남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생존하자" - 단테

 

영어의 독립(Independent)이란 단어를 보면 '매달리지 않는'이란 어원이 있다. 부정(In) + 매달리다(Pend)의 결합. 자기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나아가 슈퍼맨 정도의 자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지향점.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똑똑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는 쪽으로 교육받게 됨.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행동(SDR : Socially Desirable Responding) : 훌륭한 사람의 인정받게 되는 사회적 가치

동양 : 겸손함

서양 : 똑똑함

 

서양 :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자신의 판단력,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시킴. 선택을 하면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릴 수 있다.

동양 : 엄마가 아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주려고 노력하고, 엄마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서양 : 아이가 직접 문제를 선택해서 풀게 하는 것이 옆에서 시키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냄. 강제적인 것은 부정적인 느낌.

동양 : 엄마가 선택해준 문제를 더 잘 품. 타인의 선택이 더 큰 동기부여를 가져옴.

 

서양 : 행동의 최종 정당성은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있다고 생각

동양 : 나의 사회적 역할과 규범(외부의 시각)에 자신의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 행복은 외적기준(남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많아 개인의 행복을 경험하기가 상대적으로 불리함.

 

동양인이 남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는 현상을 '일반화된 타자(Beneralized Other)'라고 부름.즉, 타인이 보는 내 이미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타인을 설정하고, 그들이 보는 나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

 

동양 : 인드라망의 구슬에는 하나의 구슬 속에 많은 구슬이 비춰진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중다 다중일, 즉 부분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부분이 있다고 해석.

 

우주의 만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움직인다고 봄. 인간의 몸 역시 자연의 일부분, 즉 소우주로 보며,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면 건강하고, 자연의 이치를 맞지 않게 살면 건강하지 못한다고 봄.

 

서양 : 자연은 인간이 정복하고 활용해야 할 대상으로 봄.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고 믿음. 토론, 논쟁의 중요성을 강조. '진리는 토론의 정수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토론을 통해 오류를 줄여나가는 것이 진리탐구의 주요한 과정이 됨. 따라서 말을 잘하는 능력이 중요시되고, 웅변과 수사학이 발달함.

 

동양 : 말이 많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 '빈수레가 요란하다', '입은 불행의 원천이다' '침묵은 금이다' '아는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노자

 

언어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언어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 득의망언(뜻을 얻었으면 언어를 잊으라 - 장자), 언불진의(언어로는 그 뜻을 다 전달 할 수 없음 - 공자).

 

(실험) 간단한 퍼즐을 풀게 함. 한번은 말을 하면서 풀게하고, 한번은 말을 하지 않고 풀게 함.

동양 : 말없이 했을 때 더 잘 품. 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문화에서는 말과 사고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줌.

서양 : 말을 하면서 풀 때 더 잘 품.

 

서양 : 파이프라는 물체를 바라보는 순간 머리 속에는 Pipe라는 언어가 떠오르면서 대상을 인식. A=A, 동일성의 원리(Principle of identity) : 서양논리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

동양 : 주역의 역(易)은 바뀌고 변화하는 것이 핵심사상. 즉 변화의 원리가 동양사상의 기본원리. 마치 똑같은 금강산이 4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듯.

 

물아일체 :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된 상태. 대나무를 그릴때 소동파는 흉중성죽(마음 속에서 대나무를 완성한다)을 강조. 구슬이 대상을 비추듯 대상을 마음속에 담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동양의 철학.

 

O 서양인의 보려 하고, 동양인은 되려 한다 - W. 샐든

 

동양 : 구슬은 깨끗할수록 대상을 더 잘 비출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닦는 것 = 대상과 일체가 됨.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수행을 통해 이루어짐.

서양 : 마음을 비우는 상태가 무척 어렵게 느껴짐.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정신이 나간다는 것으로 받아들임.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

서양 :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서 이해 => 서양인은 보려하고,

동양 : 대상과 하나가 됨으로서 이해 => 동양인은 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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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18:02 2009/05/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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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오계

1.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 다른 만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2. 도둑질하지 마라 => 정당한 노력 없이 얻으려 하지 마라. 기복사상도 도둑놈 심보.

3. 사음하지 마라 => 사람을 도구화 하지 마라.

4. 거짓말을 하지 마라 => 정보를 왜곡하지 말고, 진실을 전하라.

5. 술을 마시지 마라 => 중독성 물질에 빠지지 마라.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O 깨달음이란?

: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

 

O 불법을 전하는 것은 정보와 기회를 제공하여 길을 열어줄 뿐 불법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 들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체험한 것을 실천하면 그것이 다르마(불법)를 전하는 것이다.

 

O 불법은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각오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금기로 받아들이지 마라.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라.

 

O 개차법(開遮法)

: 계를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을 살리려고 주인없는 사이 작대기를 가져온다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를 어기는 것이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 즉, 계율을 지키되 계를 파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계율은 자기 양심, 자기 수행의 문제이다.

 

O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돕고 사랑하라. 종교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O 쥐약인 줄 모르고 먹는 사람에게 이것이 쥐약이라고 알려줬는데, 그 사람이 쥐약 안 먹으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는 건 아직 먹고 싶다는 얘기이고, 그 얘기는 쥐약을 쥐약인 줄 모르는 것이다.

 

O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O 열등의식(내가 못났다는 의식, 환영) + 잘보이고 싶은 마음 => 남의 시선에 신경쓰임

 

O 배신이란?  내가 인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O 타인을 욕하기 이전에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까르마에 대한 이해가 필요

 

O 상처가 있으면 우선 상처를 치료한 후 수행을 해야 한다. 위로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된다.

 

O 견도가 열린 사람들로 승가를 구성. 같은 원을 세운 사람들. 방향이 같은 사람들.

 

O 수행이 된 정도를 파악하는 방법은?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졌는가를 자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O 나의 행동 요인 = 유전인자 + 학습

 - 유전인자란, 갓난아기 때 각인되어 무의식의 세계를 형성한 것으로 자아를 형성.

 - 학습은 자아가 형성된 이후 습득한 정보

 

=> 어린 시절 교육이 그래서 무척 중요하고, 성장한 후에는 바른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잘못된 가치관이 형성됨.

 

O 절을 하는 이유 :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

- 내가 옳다는 생각이 경계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내 뜻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집착하면) 마음에 분노나 괴로움이 생겨난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남의 입장에 서서 남이 그렇게 얘기하고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 공감해보는 것

2)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돌이켜 보아 원래 옳고 그름이란 것은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즉 고정된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옳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내가 내 기준에 의해 남을 간섭하려 하지 마라는 뜻이지 남이 나를 간섭하려고 할 때 내 생각을 무조건 내려놓고 남의 뜻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O 상황과 조건(인연)에 따라 옳고 그름은 달라지므로 고집할 것이 없지만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을 갖되, 그것을 고집함으로 인해 괴로움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얘기는 형식을 수용함에도, 수용하지 않음에도 구애받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O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 모든 형상은 공하다는 의미로, 고정된 것(집착할만한 것), 옳고 그르다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이고, 걸림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때때로 이 논리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나는 깨달았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공즉시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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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1 17:50 2009/05/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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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플러스 - 세계 물의 날 특집 '빗물' / 090319

 

O 빗물의 산성도 실험 : 내리는 빗물(4.5PH). 맥주가 4PH, 오렌지 3PH. 빗물은 약산성이기 때문에 피부에 악영향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기중의 CO2가 물과 만나 약 산성을 띄는 것임. 그 후 땅에 닿는 순간 알카리성으로 변함. 즉, 공장지대의 심각한 오염수준 지역이 아니라면 피부에 닿아도 전혀 문제가 없음

 

(비교1) 빗물의 세탁실험 : 빗물이 수돗물보다 깨끗하게 세탁이 됨.
(비교2) 빗물로 머리감기 : 빗물로 감는 것이 수돗물보다 더 윤기가 남.

 

O 그렇다면 왜 비(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고 할까?
=> 이것은 과학적, 의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얘기다.

 

서울상업여자고등학교의 빗물 탱크 실험 : 집수면과 집수탱크를 연결하는 파이프를 J자형 파이프로 설치했더니 탱크 속 부유물질이 나오지 않음. 부유물은 간단히 제거 가능

아직도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산성비의 위험에 대해 과다하게 기술하고 있어 학생들을 헤깔리게 함.

 

(비교3) 빗물로 키운 채소가 수돗물보다 더 잘 자람

 

(시험)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받아놓은지 6개월된 빗물이 썩을까?
* 썩기 위한 3대 조건 : 유기물, 미생물, 햇빛 / 햇빛만 차단해도 썩는 것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다.

 

(응용) 제3세계에 빗물 저장 탱크 설치. 일본은 빗물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

 

 

[레인시티]

 

O 일본 동경의 스미다쿠 지역. 일본은 1년 내내 빗물이 풍부하게 내리는 지역. 천수존이란 이름의 빗물 탱크를 마을 곳곳에 설치. 빗물이 지구를 살린다는 캐치프레이즈.

 

스미다쿠 지역의 물을 뿌려 지면의 온도를 낮추는 전통적 행사. 예전에 수도물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빗물을 활용.

 

로지손 : 좁은 도로 밑에 비저장 탱크를 설치하고 빗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한 펌프시설. 유사시 식수나 화재진압용수로 사용. 로지손 옆에는 빗물로 마을 텃밭을 가꿈. 스미다쿠 마을은 빗물이용에 관한 세계적 관광지가 됨

 

O 동경 슈퍼타워(2010년 완공 예정) : 610M 전파탑. 탑의 제일 윗부분에는 빗물 집수면이 설치. 지하에는 2600톤 규모의 빗물저류소 설치. 수해예방과 함께 넉넉한 빗물 이용.

 

O 레인하우스 : 동경 이공대 스즈끼 교수가 레인하우스 설계. 빗물이 지붕면을 따라 흘러내린 후 마당의 소용돌이 모양의 자갈필터를 거쳐 지하 10톤 규모의 탱크에 저장. 이 시설의 특징은 빗물을 계속 재활용할 수 있도록 빗물을 쓰고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보온시설이 따로 설치되지 않았지만 늘 따뜻한 방. 방 한켠에 빗물이 항상 받아져 있어 햇빛에 의해 덥혀진 공기가 방을 훈훈하게 만듬.

 

O 일본 지바현. 폐유리병가루로 빗물의 필터를 만듬.

 

O 수원시는 10년 계획으로 레인시티로 거듭날 계획. 우리나라에서 도시단위로 비를 관리하는 최초의 사례.

 

 

(참고할만한 블로그)

 

- 에코미인 : http://v.daum.net/link/2785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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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17:29 2009/05/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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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신과 다윈의 시대 , 090309

 

제1부. 신의 과학, 진화를 묻다

 

O 현재 지구상에 밝혀진 생물은 약 150만 종. 미발견종까지 합치는 1000만종이 훨씬 넘는다. 마치 특별한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의 몸구조.

 

O 다윈의 진화론 : 모든 생물은 신이 창조하였다는 관념 -> 생물은 진화과정을 통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

 

진화론에 대한 가장 큰 오해 :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 500만명 전 같은 조상에서 원숭이와 사람이 갈라져나갔다. 모든 생물은 마치 나무가 가지를 뻗어나가듯 같은 조상에서 분리된 것이다.

 

진화론에서는 현존하는 모든 생물이 진화의 최종 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생물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평등한 관계.

 

진화심리학 : 인간만이 가진 여러가지 특성을 진화론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학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윈은 진화론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

 

O 미국인의 39%만 진화론을 믿음. 영국은 48%. 우리나라는 62.2%.

우리나라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62%차지. 그 이유는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41.3%),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아(39.2%), 진화론을 잘 몰라서(17.2%)임.

 

왜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할까?

1) 진화론은 30억년 이상의 시간동안 벌어진 진화과정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증명되기 어렵다.

2)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진화론을 인정할 경우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

 

(진화론과 지적설계론 논쟁)

 

지적설계론 : 지적인 존재에 의해 세상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이론. 1989년 미국의 생물학교재인 '판단와 사람에 관하여'에서 최초로 제기. 특정 종교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아님.

 

1.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 지적설계론의 핵심 이론. 생물의 각각의 구조나 부품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경우에만 제대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이론.

 

어떤 시스템이나 기계는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부품이 결합되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기능을 하게 된다. 쥐덫의 경우, 스프링, 철망, 고리, 받침대의 각각은 쥐를 잡는데 아무런 역할을 못하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구성할 경우 쥐를 잡는 쥐덫이 됨. 쥐덫과 같이 다양한 부품을 재구성하여 복잡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사람과 같은 지적인 동물만이 가능함.

 

사람의 세포도 마찬가지이다. 세포는 쥐덫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재기능을 하지 못한다. "세포는 고도의 나노기술이 모인 복잡한 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이를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없다."

 

O 하지만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를 갖춰야만 기능을 한다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주장에 대해 진화론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 어떤 공룡은 반쪽짜리 날개만 가지고 있어 하늘을 날 수 없었는데, 그 나름의 열방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진화를 거듭하면서 날개가 하늘을 나는 기능으로 발전하였다. 불완전한 형태라도 각각 나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이론은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 19세기에 진화 생물학을 반박하며 등장한 이론인데, 이제는 과학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O 사람들이 진화에 대해 생각하는 큰 오해중 하나는 진화가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 진화는 우연이 아닌 자연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연선택 : (핀치새의 예) 조그만 변이가 환경에 조금 더 적합하면 오랜 세대를 거치면서 그것이 그 생물의 특성이 되는 것.

 

2. 지적설계론의 핵심주장 : 복잡한 정보는 우연이나 확률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복잡한 유전적 정보는 우연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주장. 수학적 확률을 계산해보니 우연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 - 윌리엄 뎀스키

 

진화론 : 생물이 가진 정보는 다른 생물의 정보로부터 진화된 것. 즉,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것.

 

지적설계론 :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정보는 진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봄

 

=> 진화론에서는 수많은 선택과정을 통해 필요한 유전적 정보가 저장된다고 봄.

 

3.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논쟁.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빅뱅이 생겨났는가는 물음에 대해, 과학에서는 제1원인까지 설명할 만한 실험적 증거가 없음.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함.

 

진화론의 가장 큰 맹점은 처음 생명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문제임. 자연선택이 적용되려면 번식이 가능한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세포의 근원을 알 수가 없음.

 

O 우리나라에서는 지적설계론을 창조론을 보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있다.

 

지적설계론자 : 지적설계론은 과학이다.

진화론자 : 창조자를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다.

 

두 논쟁은 세상을 바라보는 신념의 문제이다.

 

정신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인가에서 정신이 먼저라는 것을 선택할 경우 지적설계론의 관점에 다가서게 되고, 물질이 먼저라는 입장일 경우 진화론의 관점으로 접근하게 된다.

 

진화, 창조의 논쟁은 과학이나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문화 간의 충돌이다. 진화는 문화의 한쪽을 대변하고,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다른 쪽을 대변한다. 진화, 창조 논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논쟁이 과학과 종교 영역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 마이클 루스

 

 

제2부. 진화론, 신을 묻다

 

O 사람은 왜 신을 믿는가?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O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가?

 

 (예) 땅다람쥐의 적을 발견한 후 경계음을 내고 자신은 잡아먹히는 이타적 행동을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진화론에서는 선뜻 설명하기 어렵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같은 유전자 집단을 살리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 된다.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는 파격적 주장 - 리차드 도킨스

=> 어머니의 자식보호 본능도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이기적 행동일 뿐이다.

 

O 사회생물학 :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과 유전학으로 설명하는 학문

 

사회생물학이 발표되기 전, 인간의 모든 행동은 교육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음. 인간의 행동이 교육과 환경이 아닌 유전자에 의해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사회생물학의 주장은 당시 위험하게 받아들여짐.

 

[Book] 인간본성에 관하여 / 에드워드 윌슨

- 사랑 도덕 문화 종교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진화론과 유전자로 설명. 이런 본성은 생존경쟁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생겨남. 종교성을 가진 집단은 희생적이고 단결력이 높아 다른 집단보다 살아남기 쉽다.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 성향을 갖는다.

 

- 많은 진화론 학자들은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 종교의 역할이 감소하고, 음악 미술 처럼 하나의 문화로만 남게될 것이라고 주장.

 

[Book]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어릴 때 받은 교육 때문. 종교는 바이러스와 같이 사람에서 사람에게 전달. 그 증거나 진실성을 따지지 않고.

 

- 무신론자가 좀 더 도덕적이다. 나아가 종교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니 종교는 악이다.

- 선한 사람이 종교적 동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하기가 쉽다.

 

[Book] 도킨스의 망상,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 / 알리스터 맥그라스

- 어린 시절 세뇌되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숙된 후 이성적인 판단으로 신을 믿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종교를 믿는다.  

 

O 사람의 도덕성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인가, 진화의 결과인가?

 

[진화론자의 입장]

- 의식은 물질인 두뇌에 의해 만들어진다. 마음은 두뇌의 철저한 물질적 작용이다. 도덕성 역시 진화과정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창조론자 입장]

- 신이 정신을 창조했다는 입장.

 

O 천주교에서는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 신은 진화를 통해 일한다. 진화는 신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창조의 한 수단이다. 천주교 신자의 83%가 진화론을 믿음.

 

O 개신교의 38%만이 진화론을 믿음. 개신교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철학, 믿음이라고 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봄. 종 안에서의 변화는 인정하지만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부분적으로 진화론 수용.

 

O 이슬람교은 진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 터키 국민의 75%가 진화론을 부정.

 

O 진화론과 종교론자는 모두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예) 추방이라는 다큐는 진화론이 유대인 학살에 기여했고 창조론을 믿는 학자들을 배척할만큼 오히려 배타성을 가진다고 말하고,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이 올바른 과학연구를 방해하고 학생들에게 신념을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창조과학회 : 진화론 비판에 앞장서는 기독교 중심의 운동

 

 

O 종교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윤리도덕)에 대답할 수 있고, 과학은 어떻게 인간이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둘 모두 인류에게 소중한 재산이며, 각각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영역에 그 존재 의의를 찾아 공존하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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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11:44 2009/05/1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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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총서1]  미래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 / 법륜 / 정토출판

 

1. 일과 수행

 

1.1 정토행자와 수행

 

O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삶 -> 일과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 -> 시비분별이 일어나기 쉽다 -> 괴로움이 생겨난다.

 

=>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건 수행의 기본 조건이다. 집중력 있고 능동적인 마음이 경계에 부딪히게 되면 시비분별이 일어날 때 내면을 관찰하게 되면 갈등이 해소된다.

 

O 삶 자체가 수행이고, 생활이 그대로 수행이다. 일과 수행은 어떠한 모순도 없다.

 

O 정토란 고통을 유발하는 조건이 사라진 사회, 탁한 마음이 사라지고 청정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O 사회운동가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힘쓰고, 종교인은 마음 수행에 힘쓰는데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 정신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이 둘을 함께 해나간다는 뜻이고 따라서 일과 수행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은 일하는 가운데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

 

- 수행 :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 일 :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회개혁의 의미

 

O 보살사상의 핵심 : 중생세계를 없앰으로써 바로 부처세계로 들어가는 것

 

O 수행이란? 행(行)으로 지은 업(業)을 없애는 것. 행이란, 십이연기와 오온에서의 행을 말하고, 업은 身, 口, 意(행동, 말, 생각)을 잘못해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업은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수행은 행을 닦는 것인데, 身, 口, 意(행동, 말, 생각) 삼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수련 : 심신을 단련하여 강한자가 되는 것. 이것의 목적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 수행 : 마음의 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 얻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에서 괴로움과 속박이 사라지는 이치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수행을 한 자가 수련(기술이나 지식 습득)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한다. 수행한 후에 수련은 필요에 의해 닦으면 된다.

 

O 우리가 일상적으로 얘기하는 행복이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기분좋은 상태. 불행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불쾌함. 똑같은 상황이라도 조건과 그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O 복받았다의 의미는? 노력보다 결과가 좋다. 노력을 적게 하고 결과가 좋았다는 말은 노력을 많이 하고도 결과가 나쁜 것을 전제로 한다. 복받은 사람이 있으면 복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말해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EX) 거리에서 만원을 주워 행복함 = 만원을 잃어 불행한 사람이 있음 (동전의 양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는 적게 노력하고 명예, 재물, 권력을 많이 갖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고, 종교나 신을 찾게 되고, 신통을 찾게 되고 한다. 뇌물을 쓰기 보다 절에 보시하여 복을 비는 것이 더 싸게 먹히면서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에 절에 자기 자식, 자기 남편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 북적된다. 다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게 허황된 생각(전도몽상)에 빠져 헛된 기대를 하고, 총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이런 일은 존재의 본질, 즉 존재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난다. 이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면 너도 있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연기그물에 놓여 있다.

 

O 참된 행복은 주는데 있고, 사랑하는데 있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데 있다. 그럴때 진정한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주고도 괴로울까? 거기에 받으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 한 생각 내려놓으라의 의미 : 뒤집혀진 생각을 내려놓으라. 한 번 돌이켜 다시 살펴보라.

- 현재에 집중하라 : 항상 깨어있으라

- 참회하라 :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

- 과정을 중시한다 : 매순간을 중시하고, 일단 한 번 해본다. 먼저 해보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결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

 

O 화두란?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관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즉, 모든 삶의 가치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변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전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박차고 나가는 것.

 

경전에는 이러한 이치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이치를 터득해서 결국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O 무언가 얻고자 하니, 그것이 잘 안될 때 조급해지고,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즉,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 깨닫지 못했다고 답답해하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한 결코 해탈이나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얻을 바가 없어지면 겁날 것도 없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이 생긴다.

자각이 이루어지면 괴로움이나 두려움도 없어진다. 수행은 근본적인 관념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전제를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다.

 

O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 문제에 관해 :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지적하고 토론해야 한다. 문제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단, 이 경우 고쳐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면 그것은 자기문제가 되는 것이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관점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충돌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해결하되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평등한가이다. 평등한 관계에서만이 참된 토론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 역시 수준있는 해탈의 세계와는 멀다. 상대방이 뭘 하든 간에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건 괜시리 시시비비를 가리며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참견하지 말라는 걸 의미하지 수행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론하고 지적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O 우리는 수행의 원칙과 태도가 무엇인지 먼저 명확히 이해 해야 한다.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의문과 답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옳고 그름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지만, 일을 할 때는 다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만 한다. 일은 효율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할 수밖에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할 경우, '저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같이 못하겠다'와 같이 일을 못하는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는 것은 옳바른 수행의 관점이 아니다. '저 친구하고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혹은 '성격이 맞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라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행은 100% 자기를 돌아보는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O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 : 우리는 밖의 대상과 경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이러한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 깨어있는 것이 자등명이다. 그러나 주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법에 의지해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법등명이다. 이렇게 두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분명한 선에 도달하게 된다. 몇 번만 해봐도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하나 점검하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자기 느낌을 경전의 내용과 대비해 봐도 똑같고, 경전의 내용을 실천해 봐도 똑같을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확신이 서는 것이다.

 

O 원칙을 가지고 기도문(정토회의 수행문)에 집중하면 틀림없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보게 된다. 모순을 보게 된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모르고 있었던 문제의 뿌리를 보게 되거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도할 때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이다.

 

기도문은 나보다 나은 선지식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서 좀 더 심층의식에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문을 달라는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정확한 사람한테 듣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수행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명령이 아닌 이런 근본 원리를 터득해야 안심입명 할 수 있다. 그래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중심이 서고, 오뚝이처럼 왔다갔다 해도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인생을 확실히 살아갈 수 있다.

 

1.2 정토행자와 일

 

O 우리가 말하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쁨을 높이고, 나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 쓰이는 것을 가리킨다.

 

O 우리는 돈이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되는 사회, 생명이 주인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돈을 쓰더라도 그것은 좀 더 편하게 생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관계의 효율성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이지, 대가를 위하여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O 사람들은 쓰는 것만 좋아하고 쓰이는 것은 싫어하니 통제하지 않으면 수입과 지출에 큰 불균형이 생긴다. 사람을 써야 하는 사람은 돈을 미끼로 쓰이는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노동은 괴로운 것이 된다.

 

O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수행에서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별개의 문제다. 괴로움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일이란 앞에서 이야기한 수행과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필요로 한다.

 

O 우리는 상대에게 쓰여지는 동안 괴로워하고, 그 댓가로 받은 돈을 소비하며 만족을 얻는다. 쓰기 위해 버는 시간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쓰이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것이 나의 존재 가치임을 깨닫는다면 쓰이는 것이 바로 여가가 된다. 그러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진다.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노동의 해방'이다.

 

물론 한 달 내내 일해도 배를 곯을 정도고 몸을 다쳐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불구가 된다면 노동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사회구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의 해방은 몇시간 일하느냐, 월급은 얼마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느냐 아니냐에 있다.

 

누구나 노동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기존의 관념이 '쓰이는 것은 나쁘다, 쓰는 것이 좋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여기 있으면 손해보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O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토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수준을 최소한 대한민국의 중간 이하로 맞출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사무공간이 너무 좁아 비효율적이므로 그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우리의 잠자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을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그만큼 유지되는 것이고, 이것을 못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사라진다.

 

도덕성이 사라지면 당장은 영향이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우리의 순수성을 보고 보시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연의 원리이다.

 

O 정토회에서는 일하지 않고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일이나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옆에서 거들어주는 후원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회원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분별심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에게 돌려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한다.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껴야 한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기술을 익히거나 노동과 직접 상관없는 수련을 할 때도 있다. 그것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도 일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낫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 염불, 참선, 독경을 잘하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는 요구되고 있다. 이런 각종 요구들은 생활 속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일에도 필요하고 재정 여유도 있고 시간도 된다면 당연히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조건에 맞는 순위를 정해 놓고 조절해야 한다.

 

O 전체를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은 개인적 욕구가 아니다. 몸이 아팠을 때 한나절 쉬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 쉬어야 한다. 이럴 때 일하면 오히려 전체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개인적 욕구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되고, 본인도 그것 때문에 죄의식을 가져서도 안된다. 단지 거기에는 전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 전체 회의에서 거절되면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된다. 한 번 없었던 것으로 했다고 해서 다시 안건으로 제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생각해 보고 필요하면 다시 안건으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일하면서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문제가 있으면 당당하게 제기하고, 나는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깨끗하게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하고, 내가 보기에 아직도 옳다고 판단되면 다른 사람이 다 틀렸다고 해도 다음 회의 때 용기있게 제안도 해야 한다. 그것은 고집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두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구난방이 되더라도 자기 주장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키는대로 고개 푹 숙이고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고, 고개 숙이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 수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O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행의 원칙을 지켜나가면 어떤 경우에도 자기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주위 여건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정도가 심해진다. 모든 사람이 이 수행의 원칙을 적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1) 환경문제 : 환경문제는 우리의 생존과 관계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비를 적게 해야 한다. 소비가 줄면 생산이 준다.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아껴써서 자연이 정화시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비하면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환경운동이 수행과 겹치게 되면 환경이 보존될 수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누가 환경운동에 돈을 대주든 안대주든 사람이 따르든 안 따르든 괴로울 일이 없다. 많이 쓰는 사람이 괴롭고 적게 쓰는 사람이 즐거우면 적게 쓰는 쪽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2) 제3세계 빈곤문제(기아, 질병, 문맹) :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고 문자 정도라도 터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3) 평화문제(차별이 아닌 함께 하는 삶) : 인종차별, 민족차별, 성차별, 문화차별 등 수많은 억압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런 갈등 요인 탓에 내전, 민족전쟁, 인종전쟁, 종교전쟁이 일어난다. 우리가 정의를 지향한다면 차별이 개선되는 쪽으로 우리의 활동이 이루어져가야 한다.

 

4) 민족 통일문제 : 민족 분단은 엄청난 군비 허비, 젊은이들의 시간 소요, 사상적 제한 등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한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는 일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한다.

 

5) 개인문제 : 살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행을 통한 해결방법

 

O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사회, 즉 정토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사회를 지향해 가는데 수행법이나 사회개혁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전환만 일어나면 개인도 편안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생각을 버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관계가 경쟁 관계가 아닌 벗의 관계가 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된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면 이런 세계는 다 실현 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인연 닿는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수행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수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볼 때 가장 큰 문제가 환경문제이므로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되어 제3세계 빈곤구제 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문명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정신문명을 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서서히 개척해도 되는 문제인데 반해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은 비록 인류 문명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응급치료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당분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중에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일단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것처럼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일의 방향이다. 앞으로 일은 얼마든지 새로운 것이 개척될 수도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역량이 늘어나는 만큼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면 될지, 다음 세대까지 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이런 방향으로 우리 세대에는 최소한 30년(만일결사)을 잡고 어느 정도 해 보겠다는 계획이 잡혔다.  우리는 이런 큰 틀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떻든 이런 포부를 지니고 일을 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2. 새로운 문명, 새로운 인간

 

2.1 자기 실현의 길

 

O 봉사자란? 누군가가 내가 쓸 이불과 옷과 쌀 등을 만들어준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 사랑가는데 필요한 일을 하고 필요한 곳에 쓰여지는 사람이 봉사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봉사자 아닌 사람이 없다.

 

뭔가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해야 봉사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봉사자의 삶인 것이다. 태어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봉사자로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봉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참 모습,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자의 흉내만 냈지 근원적 사상과 행위가 일치되지 않는다. 봉사활동에 대가를 기대하고, 봉사활동이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O 존재의 생명은 쓰임(용도)에 있다 : 빗자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지만 모두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가 있을 때 빗자루이며 때를 닦는 용도가 있을 때 걸레다. 생긴 것이 빗자루나 걸레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먼지를 쓸지 못하고 때를 닦지 못한다면 그것은 빗자루도 걸레도 아니다. 빗자루와 걸레의 존재의의가 없어진다.

 

모양과 용도에 따라 이름하여 존재를 이룬다. 이것을 명색(名色)이라 한다. '걸레' 할 때도 용도인 명과 그 생긴 모양인 색이 결합했을 때 하나의 존재가 된다. 만약 그 용도가 쓸모없을 때, 즉 명이 사라졌을 때 색만 가지고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 때는 이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도 한 남자와 결혼을 통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내로서의 역할을 안한다면 이름만 아내지 실제로는 아내라 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존재고, 선생은 학생들의 배움과 그 요구에 쓰이는 존재다. 빗자루나 호미 역시 다 쓰임이 있다. 호미가 풀을 매는데 쓰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호미가 아니라 단순한 고철더미다.

 

그렇다면 잘 사는 삶, 좋은 삶은 어떤 삶일까? 아내로서 좋은 삶은 남편에게 잘 쓰이는 것이고, 선생으로서 좋은 삶은 학생들에게 잘 쓰이는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내 존재 가치가 높다는 얘기와 같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길이다.

 

쓰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말한다. 빗자루가 방바닥을 쓰는데 쓰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형상은 있지만 빗자루로서는 이미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색보다 명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색에 집착하기 때문에 명이 사라졌는데도 그 색을 가지고 판단한다.

 

O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잘 쓰인다는 말이다. 즉, 필요로 하는데 쓰이는 게 잘 쓰이는 것이다. 그 필요는 누구의 필요인가? 당연히 상대의 필요이다. 상대의 필요에 따라 쓰이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쓰여야 할까는 상대한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어디에 쓰일까를 고민하기 보다 상대가 필요하다고 할 때 쓰이면 된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데 잘 쓰이려면 내 요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지 '예'하고 달려갈 수 있다. 쓰이기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하면 괴로움이 생긴다. 기꺼이 해야 한다.

 

잘 쓰이는 것이 잘 사는 길이고 잘 쓰이는 길은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것이다. 그가 써줘서 내가 잘 쓰였으니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써준다는 것은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따라서 나를 써준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쓰였으니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고방식은 쓰이는 것보다 쓰는 삶이 더 좋다는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면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대가가 없어도 섭섭한 마음이 없어진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많이 쓰는 것이 좋은 줄 착각하고 있으면 중생이고, 그 이치를 알고 받아들여 살면 보살이다. 진정한 보살행이 되려면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보살행 흉내만 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행과 깨달음이 별개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치를 깨달으면 행위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깨달은 후에 얼마 더 노력해서 행위가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큼 깨달으면 손톱만큼의 행위가 나오고 손만큼 깨달으면 손만큼의 행위가 그냥 나오는 것이다.

 

O 깨달음은 곧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쓰임새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화 시티오브조이에서 의사인 주인공이 인도에서 가난한 여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난 뒤 진정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회복해 가는 과정.

 

정토회에서 일을 하면 왜 월급이 없을까?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50만원을 받고 일하면 50만원짜리 월급쟁이이고, 100만원을 받고 일하면 100만원짜리 월급쟁이이다. 그러면 다른데서 2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손해라는 생각에 항상 후회를 하게 된다.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O 쓸때는 살리도록 써야 한다. 아이가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애완동물처럼 보호하기만 하고, 쓸 줄만 알게 키우면 사회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때문에 아이에게 혹사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일을 배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즉 아이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쓰이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삶이 그만큼 주체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괴로움이 적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자기가 편안해지는 자기 실현의 길과 정토 실현의 길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은 자기 실현의 길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O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데 지금 어떤 용도가 더 강렬한가의 문제다. 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고, 내가 없으면 안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용도가 더 강렬한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쓰임새는 필요가 강렬한 쪽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거기에 자신의 보람이 있다.

 

봉사조직을 모은다고 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들에게 먼저 쓰여져야 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사람이 절에 나왔는데 법문을 듣고 상담을 통해 자기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절에 나오는 것이 재미있고 이득이 있다. 스님은 그 사람에게 잘 쓰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쓰이기만 하면 이 조직이 오래 유지될까? 그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나올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절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조직에 필요에 의해 쓰이면 나온다. 즉, 그 조직이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쁘게 나온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써줘야 된다. 써줄때 보람을 느낀다. 그러니까 일을 계속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떠 넘기듯 주면 그 사람은 얻으러 왔는데 무엇인가 뺏긴다는 기분이 들고, 쉬려고 왔는데 자꾸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는 생각에 도망가 버린다.

 

조직을 만들어 함께 일할 때 두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지도자가 사람을 시키기만 하고 그 사람의 필요에 쓰이지 않는 경우, 사람들이 모두 가버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에도 사람들이 나중에 안 나와 버린다.

 

존재는 쓰고 쓰이는 관계다. 써야 된다는 것은 서로 일을 나누어 맡겨야 된다는 것이다. 모르면 가르쳐 주면서 맡겨야 한다. 쓰일 때는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고, 쓸 때는 상대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상대를 아낀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하는 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온실속의 화초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봉사를 갔다고 하자. 빨래와 같이 그곳의 어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기만 해서는 반쪽의 봉사이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있어야 그 분들도 보람을 느낀다.

 

O 뭔가 자비심이 많아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어려움에 대해 많이 알고 거기에 내 쓰임새가 필요로 하니까 거기에 쓰이지 특별한 이념과 사상이 있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쾌히 가서 봉사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19 이상으로 유명하고 공신력 있는 단체를 조직하여 연락만 하면 달려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해결해 준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편안해질 것이다. 이런 단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다.

 

지금까지는 각 개인이 괴로워 죽겠다 하는 문제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는 이렇게 모두의 요구를 해결하는 데 쓰임새 있게 삶이 전환되어야 한다.

 

2.2 어떻게 살 것인가

 

O 농부가 씨앗만 보고도 언제 심어야 하고 언제 싹이 트고 자라 무슨 꽃이 피고 수확량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듯이 자기 업식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다. 또한 농부가 어떤 씨앗을 심고 틔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듯 우리의 인생 또한 마음의 밭에 어떤 종자를 심어 키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O 폐가 좋지 않는 사람은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와 인류, 그리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도 병행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수행은 포기할 줄 아는데 그 묘미가 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혼란스럽다.

 

O 북풍한설에 굶어도 희망이 있으면 기쁨이 있다. 목표를 놓치면 오히려 사소한 욕구들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효율적일까?'하는 주제로 토론하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의식주 문제는 놓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되는 기초다.  

 

결혼했으면 혼자 산느 것보다 진리에 대한 탐구의 정엵과 사회 정의를 위한 추진의 힘이 커야 하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희망이 더 커야 된다. 그래야 논리가 맞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 둘이 사는 사람보다 생각이 더 바르고 행복하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혼자 사는 보람이 있다.

 

O 결혼했으면 부부간에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원리를 터득하여 책 한 권 낼 정도는 되어야 하고, 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야 된다.

 

O 인생은 허망하고 연극인 줄 아니까 이왕 꾸며진 무대에서 신나게 놀아보자~ 하는 것이다. 조건에 순응하고 그 조건을 즐길 줄 알면 된다.

 

2.3 어떻게 살 것인가

 

O 미래문명은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 문명의 세계관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대립의 관점에서 보았다면 미래문명은 이들을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행복은 대립의 관점에 서서 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연관 속에서 상호 의존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승리한 순간에 행복감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거문명이라면, 미래문명은 그렇게 서로 연관속에서 서로 돕고 서로 쓰여지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좋다는 행복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보살에게 있어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는 세계다' -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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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4 08:58 2009/05/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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