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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도 참터는 여전히 대성리에 있습니다

2010년에도 참터는 여전히 대성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참터에는 여전히 일진 선생이 계십니다.

새해를 맞아 1월 2일에 참터 문하생 몇몇이 참터를 찾아갔습니다.

조개도 구어먹고, 얘기도 나누고, 땔감도 하고, 다큐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2009년과 변함없이 일진 선생의 ‘한마디’도 들었습니다.

2010년에도 일진선생의 ‘한마디’를 참고 견뎌서 들을 수 있는 내공을 기른다면, 무병장수하고 소원성취할 것입니다.

모두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2010.01.04.

청계산기슭

 

대성리 참터에서 바라 본 일출. 2010.01.03.

눈으로 뒤덮힌 대성리 참터. 2009.01.03.

 

조개를 굽고 있는 참터 벗들. 2010.01.02.

 

땔감을 하는 참터 벗들. 2010.01.03.

 

새해를  맞아 일진선생이 하사하신 땅콩을 먹고 있는, 일진선생의 평생 동반자 오골계들. 새해에도 일진선생의 극심한 돌봄을 받아 무병장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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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란?

본디 없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정해놓은 기준일 뿐입니다. 어쨋거나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 보며 더불어 삶의 새로운 의지를 다져보시길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한다(?)고 전제하고서 제 나름대로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짓지도 않고 복을 받으라는 말장난은 이제 그만. 새로운 마음을 다져보는 계기로... 지난해 보다 올해는 자신에게 더욱 철저할 것인가? ,누군가를 덜 미워할 것인가? ,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활 각오는 새겼는가? 참터를 향한 관심과 열정은 더 증장시킬 것인가? ... 속 보인다구요?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내일을 준비하소서. 대성리 참터지기 일진 김명희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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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린뒤의 연말풍경

 

제가 사는 곳은 경기도 의왕인데요

그제 일요일 저녁 송년회를 하느라 느지막히 길을 나섰지요

하여튼 눈이 얼어붙고 버스가 안와서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택시를 타고 과천으로 기어 갔는데요

 

눈이 오고 어는 자연현상때문에

계획된 것이 어긋나는 이 상황이 짜증난다기 보다는

좀 다르고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저와 같이 간 분과 택시 운전사는

눈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이 있었는지 경쟁적으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구요

 

의외의 일이 터질때 나의 감성을 살아나게 하는 것

불확실성에 대한 포용력을 갖는다는 것

2010년에는 더 가져야 할 지혜가 아닌가 도시의 눈길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2010년에는

 

대성리 참터를 아는 모든 분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황정일)

 

아래 사진은 포털에서 퍼 온 이미지입니다

답답한 이미지를 올린 이유는 눈 속의 참터를 다시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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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 선생의 '생태화장실' 사진

바로 앞 글에서 일진 선생께서 '생태화장실'에 대해 일갈하셨는데,

사실 일진 선생께서 가장 힘들어하신 부분이 '화장실' 문제임다.

'생태화장실' 문제는 사실 생태 문제에 대한 일진 선생의 '사상'과 화장실 뒷처리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진 선생의 노동의 '고통'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일진 선생의 이러한 딜레마를 곁에서 보다 못한 한 중생이

12월 25일, 일진 선생께서 다시 공사한 '생태 화장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옮겨왔습니다.

일진 선생께서 차마 직접, 구체적으로 말하시기에는 격이 떨어질 수 있기에 참고로 얘기드리자면,

생태화장실 '이용'에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 입니다.

1) 남성들이 소변을 볼 때 소변통 밖으로 흘리지 말아라. 배수 시설이 안되서 바닥이 다 젖는다.

2) 여성들이 볼 일을 보고 난 다음에 톱밥을 뿌릴 때, 제발 소변기 위에다 뿌리지 말아라. 소변기가 톱밥으로 막히면 그거 뚫는거 너무 힘들다.

일진 선생에게 항상 욕이나 먹으며 지내고 있는 한 중생의 생각으로 '생태화장실'에서 '생태' 문제란 크고 작은 볼 일 후에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다른 사람을 덜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심오한 사상아니겠느냐, 결국 '생태'란 신경써서 불편을 감 수 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는 문제 아니겠느냐는, 그래서 습관이 되면 그것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 아니겠냐는 ---- 깨달음의 문제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사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2009년 한 해 내내, 일진 선생으로부터 욕 무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리니까 이 깨달음이 공짜로 그냥 든 것은 아니라는 거죠.

세상에, 욕을 먹지 않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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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화장실이란?

 

 

모든 생명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 자체가 생태입니다.

 

또한 무생물이라 일컫는 존재전반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여기에는 그 어떤 인위적 조작을 통한 덧붙임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이 명실상부하게 공존하는 원리이고 태고로부터 전래되어 온 생명의 실상이지요.

 

그러나 인간위주의 문명발전이라는 이기심의 증대로 인간중심의 잣대가 온 지구를 멸망의 막다른 벽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참터는 참된 먹거리문화의 정립을 위해 ‘불이농법’이라는 영농의 실천과 병행해 참된 배설문화인 생태화장실을 시설하였습니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을 느낄 순 있지만 이것에의 적응이야말로 우리와 자연의 생명을 함께 온전히 살리고 참살이로 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당신의 입을 통해 맛과 포만감을 만끽시키고 영양을 공급해주고 남은 고마운 부산물이 수자원의 낭비없이 온전하게 이동식 저장고에 도달합니다.

 

소변과 대변이 분리되므로 냄새의 상당부분을 감소시키고 참터농장의 유일한 밑거름으로 활용된답니다.

 

화학농법에 의해 비료와 농약으로 뒤범벅이 된 당신의 식단을 언제까지 이어가시렵니까?

 

이제라도 작은 실천이지만 온 생명을 살리는 생태적인 똥, 오줌싸기에 즐거이 동참해주소서. 가능하다면...

 

먹고 싸는 더불어 삶의 기본과제를 외면하며 당신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그리도 바삐 달려가고 있나요?

 

느긋하게 앉아 차분히 생태적인 삶에 대한 참회와 성찰을 하시고 가급적이면 많은 양을 내놓으십시오.

 

당신의 몸과 마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발효용 톱밥을 정성스럽게 뿌려주시고 화장지는 별도의 통에 넣어주소서. 참터지킴이 一進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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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고유의 바닥 난방, 구들

 

대류현상, 베르누이 정리 적용

                                            이글은 정순신/서울대 물리학부 박사과정 께서 인터넷에 올리신 것을 옮긴 것입니다. 전통문화를 계승해 모두가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없으므로  양해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예전 우리네 겨울 생활을 생각해보면, 땔감, 아궁이, 굴뚝, 아랫목 등이 연상된다. 한민족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인 온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돌을 순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한다. 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선조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

 

한민족의 전통문화와 주거방식은 구들이라 불리는 바닥 난방과 관련이 깊다.

겨울철 찬바람이 불어오면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로 쏙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따스한 방바닥에 몸을 대고 있으면 몸에 전해지는 열기가 정말 좋다.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절절 끓는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시면서 “어구, 시원하다”는 말씀을 연신 내뱉으신다.

 

요즘같은 때 더욱 정감있게 느껴지는 우리 네 안방의 이런 전경은 우리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바닥 난방을 하는 방을 우리는 온돌방이라고 부른다. 온돌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사전에 한국의 전통 난방법이라는 설명 의‘Ondol’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다.

 

백수가 신세지는 구들장 그러나 온돌은 식자들이 한자이름으로 기술한 것으로 순수 우리말로는 ‘구들’ 이라고 한다. 구들은 ‘구운 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가집이나 기와집 같은 우리의 옛날 집에서 사용되던 바닥난방시설 그 자체를 말하거나 이와 같은 난방법을 이용한 방바닥 또는 방을 통틀어 가리킨다.

 

구들이 한민족의 생활에 얼마나 친밀했는지는 우리말의 여러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방이 어지러우면 “구들 좀 치워라”라고, 일자리를 잃고 놀고 있 는 사람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구들방만 지키고 있지”라거 나 “매일 구들장만 지고 있는 신세지”라고 말한다.

 

구들은 언제쯤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들은 구들의 시작이 인류가 불을 발견해서 이용한 불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원시인은 동굴이나 움막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추위를 면하기 위해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 주위에 돌을 세워 바람막이를 해 불을 오랫동안 보존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모닥불 주위에 세워 놓은 돌 위에 평평하고 넓은 돌을 얹어, 여기에 딱딱하게 얼어버린 짐승의 고기를 녹이거나 구워서 먹기도 하고, 그 위에 앉아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구들의 원시적 형태다.

 

구석기시대 중국북부나 만주지역에서 발생,

 

구들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500-513년 북위의 역도원이라는 학자가 저술했다. 여기에는‘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는 구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이외에도 중국 당나라 시대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도 구들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고구려인들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고 기술돼 있어 구들생활이 한민족의 문화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중국의 몇몇 문헌과 우리의 문헌,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근거로 구들학자들이 그 기원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구들의 발생 시기를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전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약 1백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발굴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으로 미뤄보아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 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구들이 발생됐으리라고 구들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발생한 초기 구들은 고인돌처럼 돌 아래에 불을 피우는 외구들 형태를 띠었다. 이후 이런 외구들 여러개를 길게 연결해 열기가 지나가는 길인 고래가 등장하는 외고래구들로 발전한다. 이로써 불 피우는 아궁이 쪽과 연기가 나가는 굴뚝 쪽이 분화된 것이다. 이후 이런 고래를 여러개로 확장해 겹구들로 진화하면서 아궁이가 설치된다.

 

 

 

1.외구들: 고인돌처럼 생긴 돌 구조 아래에 바로 불을 피우는 형태다.

2.외고래구들: 외구들을 여러개 길게 연결해 불을 피우는 아궁이와 연기가 빠지는 굴뚝 영역으로 분화된다. 이때 열기가 지나가는 통로인 고래가 등장한다.

3.겹구들: 고래를 여러개로 확장해 열기가 여러 곳으로 나눠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아궁이가 설치된다.

4.굴뚝의 등장: 움막과 같은 실내에 있었던 구들시설에 바깥으로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굴뚝이 생긴다. 그러면서 아궁이까지도 실내에서 벗어나, 방 한칸에 구들 한개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5.완성된 전통구들

처음 이와 같은 구들은 실내에 있었다. 따라서 매연 배기가 원활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결국에는 굴 뚝이 개발되게 된다. 그리고 실내의 아궁이까지도 집밖으로 나간 다. 방 한칸에 구들 한개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연 변에서는 아직까지도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주택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인의 오랜 경험적인 연구로 부넹기, 구들개자리, 고래개자리, 굴뚝개자리가 개발된 다. 이로써 한민족의 전통구들이 완성된다

 

49일 온기 유지된다는 전설의 아자방

 

이렇게 완성된 구들에 대해 불가사의한 전설이 내려온다. 지리산 반야봉의 동남쪽 해발 약 8백m 고지에 자리잡은 칠불사에는 신라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만든 ‘아자방’이라는 구들방이 있었다.

고래모양이 아(亞)자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방에 불을 한번 지피면 열기가 무려 49일 동안 유지됐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현재 아자방은 조선시대와 한국전쟁 당시의 몇차례 화재로 그 원형이 사라졌다. 그래서 1982년 구들 명장인 김용달(82세)옹이 이를 복원했다. 이때 이를 확인해본 결과 봄·가을에 온기가 10일 정도 유지된다고 한다.

구들전문가들은 전설의 49일이 유지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불가사의한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구들은 한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효율적인 우리 고유의 난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들은 오랫동안 열기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 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자. 불로 인해 아궁이 안의 공기는 가열된다.

가열된 공기(열기)는 연기와 함께 아궁이 후렁이 위쪽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뜨거운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한다는 대류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아궁이에서 지핀 불로 인해 데워진 열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구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올라간 열기는 부넹기의 좁은 통로를 만난다. 이때 열기의 이동 속력이 빨라 지면서 부넹기에서의 열기의 압력은 낮아진다. 바로 여기서 베르누이의 정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공기나 액체와 같은 유체는 지나가는 길이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속력이 빨라지고 압력은 낮아진다.

 

이는 어느 일정 시간 동안 어느 한 단면으로 들어간 유체의 양이 그 단면을 빠져나온 유체의 양과 같아야 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따라서 부뚜막보다 부넹기에서 압력이 낮기 때문에 부넹기는 열기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빨아들여 구들개자리로 넘겨주는 역할을 한다.

 

바다 속 고래 모양의 열 저장고

다양한 고래의 형태

그렇다면 부넹기를 넘어서 구들개자리로 들어간 열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때는 열기가 부뚜막에서 부넹기로 이동 할 때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왜냐하 면 부넹기의 좁은 통로에서 구들개자리의 넓은 통로로 열기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들개자리에서 열기의 속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천천히 소용돌이 흐름(와류)이 생긴다. 한꺼번에 고래쪽으로 이동 하지 않고 구들개자리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는 것이다. 구들개자리는 열기 저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들개자리에서 열기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살펴보자. 구들장 바로 아래를 지나는 위 부분의 열기는 구들장을 데우면서 여러 갈래의 고래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들개자리로 들어간 열기는 와류로 인해 그곳에 있던 차가운 공기와 열 교환을 한다. 이후 열기는 여러개의 고래로 서서히 균등하게 들어가게 돼 방 전체를 고루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고래로 넘어간 열기는 다시 고래 머리 부분의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또한번 열기의 이동 속력이 줄어들게 된다. 이곳의 열기 중 온도가 가장 높은 공기가 위로 올라가 구들장 바로 아래로 서서히 흘러가면서 구들장을 가열한다. 이로 인해 공기는 점점 냉각돼 결국 고래 바닥으로 내려오고 일부는 고래개자리로 흘러간다.

 

한편 냉각된 공기가 점점 고래 바닥으로 흘러 구들개자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뜨거운 고래개자리 부위와 만나 데워지고 다시 구들장 쪽으로 상승하게 된다. 고래에서 전체적으로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대류가 원활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고래의 모양 때문이다. 고래는 바다 속의 고래의 배를 연상시키듯 아궁이 쪽이 넓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이것이 바로 이 부위를 고래라고 부르는 이유다. 따라서 고래 꼬리 쪽으로 갈수록 냉각되는 공기는 고래 바닥으로 흘러 내려가면서 어느 한 곳 에 머물지 않고 점점 낮아지는 고래의 머리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좁은 꼬리 부분의 고래를 통과해서 넓은 공간의 고래개자리로 넘어간 공기는 또다시 이동속력이 줄어들게 된다. 여기서 여러개의 각 고래에서 나오는 다른 온도의 공기가 한데 모여 고루 섞이게 된다. 그러면서 온도의 고저에 따라 공기는 위아래로 분포하게 된다. 이때 남아있던 열기가 고래개자리 위 부분의 구들장을 가열하면서 서서히 실외 굴뚝개자리로 흘러가서 굴뚝을 통해 대기로 방출된다.

 

구들의 독특한 구조는 가능한 열 기를 내부에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베르누이의 정리나 대류현상과 같은 과학적인 원리가 잘 적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부뚜막에서 열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불주머니가 생기고, 구들개자리, 고래, 고 래개자리에서 열을 오랫동안 저장하는 열 주머니를 형성해 열기의 급속한 유출을 막는다. 따라서 불 지피기를 그만둬도 열주머니에 머물러 있는 열기가 천천히 이동하면서 오랫동안 구들장을 가열해준다

 

한편 구들장이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데는 또다른 비결이 있다. 바로 구들 장의 재료인 돌이 어떤 종류냐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주위의 여러 돌 중 특별히 운모를 골랐다. 운모는 화성암과 변성암에서 흔히 발견되는 광물로 층상구조 로, 백운모, 소다운모, 흑운모, 금운모, 홍운모, 진발다이트 등으로 나뉜다. 이 중 특히 백운모는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이런 이유로 다리미 바닥 안에는 백운모가 들어있다.

 

바로 이것이 구들장의 재료가 된다. 절연체인 백운모 구들장은 아래의 뜨거 운 열기를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내뱉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구들 장인이 구들장의 재료조차도 어떤 돌을 쓰는 것이 적합한지를 연구했다는 것이 놀랍기 만 하다.

 

이 외에도 장인의 세심한 면이 돋보이는 것이 있다. 구들장은 아랫목과 윗목의 두께가 다르다. 이는 아랫목의 경우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가깝기 때문에 너무 뜨거워질 수 있어 두꺼운 돌을 쓰고 여기에 진흙도 두껍게 바른다. 이 때문에 아랫목의 구들장은 많은 양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한편 윗목의 구들장은 얇게 해 빨리 가열되도록 했다.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를 줄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방이 식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궁이에서의 열 공급이 중단된 후에 아랫목에 저장된 열이 점점 방출되면서 고래에서의 대류로 인해 윗목의 구들장도 급속히 냉각되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적인 구들은 장인의 오랜 연구로 완성된 것이다.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그렇다면 구들은 다른 서구의 난방법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스팀(보일러) 난방, 스토부나 페치카 등은 바닥이 아니라 실내 공기를 직접 데우는 난방법이다. 이들에 의해 공기가 가열되면 실내에서는 대류 현상이 일어난다. 아래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데워져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워진 공기가 위에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이동해서 상열하냉 구조의 온도 분포가 형성된다.

 

만약 사람이 서있다면 신체의 상위부인 머리 쪽은 고온이고 발 쪽은 낮은 온도가 되는 ‘두열족한’의 상태가 된다. 이는 건강을 위한 ‘두한족열’ 상태와는 정반대다.

 

공기의 온도가 높아짐으로써 공기 중의 산소분자의 운동이 빨라져 부피가 팽창하고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고온의 공기를 호흡하면 심폐내 산소분자의 수도 작아지게 돼 호흡 효과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구들 난방 법은 바닥을 데우는 것이므로 아래 공기가 따뜻하고 위 공기가 차다. 두한족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건강에 좋은 난방법인 것이다.

 

현재는 시골에서도 아궁이나 굴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난방법이 바뀌었다. 그러나 방법은 바뀌었어도 아직까지 우리는 주택에서 바닥 난방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아니지만...고래가 파이프로, 고래 속을 지나던 뜨거운 공기가 보일러에서 데워지는 뜨거운 물로 아니면 전기열선으로 대체된 온돌방에 살고 있다. 구들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대성리 참터는 황토구들방입니다. 장작불을 지피는 수고로움만 감수한다면 건강한 하루밤을 지낼 수 있지요. 이러한 온돌문화를 이해하고 불을 땐다면 거시기처럼 장작을 고래안까지 쑤셔넣어 고래를 막히게해서 참터지킴이 욕나오게 하지는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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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

욕심에 빠져 있거나 화를 내고 있거나 번뇌망상에 젖어 계시지는 않는지요?

의욕은 갖되 이기심은 버리시고 열정은 갖되 남을 미워하지는 마시고 차이는 인정 하되 차별은 하지 마소서. 

지금 이 순간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을 소중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님의 꿈이 꼭 이루어지시길 두손모아 봅니다.  날마다 좋은 날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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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

우리의 몸을 정화 시켜주는 신비의 물질 - 효소, 엽록소

 

 

 

생야채에 많이 들어있는 효소와 엽록소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비타민과 효소는 똑같이 우리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같은 개념의 중요한 필수 영양소들인데, 비타민만 강조되어 열심히 챙겨먹고 정작 우리의 몸을 정화시켜주고 비만과 각종 질병과 만성병을 예방시켜 주는 효소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이 잘 안 알려져 섭취에 등한히 하는것 같아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비타민이 우리몸에 장기적으로 부족하게되면 야맹증, 각기병, 괴혈병, 피부병등 온갖 질병이 생기듯이 효소도 부족하면 똑같이 비만과 당뇨, 통풍등 온갖 질병, 특히 만성.성인병을 유발 시킵니다.

 

우리몸에서 자체 생산이 안되어 외부로부터 먹어 주어야하는 필수 영양소가 비타민이고, 우리 몸에서 합성, 자체생산이 가능한 필수 영양소를 우리는 효소라고 편의상 구분해서 부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몸에서 자체합성을 못하는 비타민-C의 경우, 사람에게는 비타민으로 분류가 되지만 이를 체내에서 자체 합성을 해내는 동물들에게는 효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타민과 효소는 똑같은 필수영양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체내에서 일부 비타민, 즉 피부에 햇볓을 쬐면 비타민-B, 장내에선 비타민-E를 조금은 합성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 필요량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공된 음식과 또 익혀서먹는 음식이 대부분이라 비타민이나 열에 약한 효소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며 또한 나이가 듦에 따라 효소의 체내 합성능력도 떨어져 이 효소의 추가보충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유해물질이 많이 함유된 가공음식과 공해음식이 넘쳐나는 세상, 또한 영양과잉 세상에선 이들 유해독소를 제거해서 우리의 몸을 정화 시켜주고 과잉영양을 소진시켜 비만을 예방 할 수 있는 효소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비타민과 효소는 주로 햇볓을 듬뿍 받고 자란 생야채에 많이 들어있는데 우리주변엔 온실채소가 많으며 그나마도 주로 익혀서 먹고 있으니.....

 

 

효소의 여러가지 역할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건 우리 몸의 활력과 체온유지를 위해 열량을 내는 영양분인 탄수화물등에 화학작용(신진대사)을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하며 또한 신진대사를 활성화시켜 체내축적 유해물질을 채외로 배출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것 입니다. 즉 이 효소가 없이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지방질등 영양분은 소화흡수도 안될 뿐만 아니라 영양분으로서의 작용(역할)도 일어나지 않는것 입니다. 즉 타는 영양분(탄수화물등)과 이를 태우는 영양소(효소)가 있으며, 그러므로 생효소가 부족하게 되면 살은 찌면서도 활력이 없고 허약한 체질이 되는것입니다. 또한 이 효소는 35-45도C 에서 가장 왕성한 촉매작용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몸은 끓임 없는 체내 신진대사로 생명을 이어가며, 이 신진대사(화학작용)의 결과 또한 한시도 쉬임 없이 노폐물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노폐물을 얼마나 빨리 체외로 배출시켜 몸이 깨끗해지느냐가 바로 건강의 바로미터인 것입니다. 이 노폐물이 제때 배출되지 못하고 체내축적이 될 때 우리 몸의 면역능력은 저하되어 각종 질병이나 만성병을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먹는 식품의 구조상 효소는 더욱 필요한데 체내 생성은 가공식품등으로 더욱 저하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효소도 비타민처럼 부지런히 추가로 섭취해 주어야만 몸이 깨끗이 정화, 자가면역력이 향상되어 건강체질이 되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채식, 주로 생야채로 채식을 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 몸에 축적이 되어있는 독소나 유해물질의 제거를 위해, 또 공해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에서는 먹는 생야채의 효소만으로는 부족한 형편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효소를 우리는 아직까지 그 중요성을 잘 이해를 못하고 있고 또한 섭취에 소홀히 하여, 살은 찌고 건강한 듯 하면서도 체질이나 면역력이 약화되어있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효소의 종류는 10 여 가지 이지만 그러나 국제 효소학회에 등록이 되어있는 효소는 2400 여종에 달하며, 실제 각종 수많은 종류의 영양분에 작용하는 성질로 보아 과학자들의 추측으로는 효소는 수백만종에 달하며 이는 효소가 수많은 종류의 복합체라고 생각되어 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인삼 녹용보다도 더욱 필요한, 이런 훌륭한 건강식품들을 주변에 두고 엉뚱한데서 비싼 보약만 찾고 있으니, 부족한 건강상식으로 인한 무지한 건강추구, 무조건 비싼건 좋다는 인식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건강은 결코 멀리 있거나 혹은 값비싼 보약에 있는게 아닙니다. 주변의 싸고도 흔한 식물들에 있는 것 입니다. (가장 양질의 강력한 효소는 파란 보리순에 많이 들어 있으며, 이 보리싹을 저온처리한 Powder형의 효소 제품이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즉석에서 생쥬스를 만들어서 파는 건강식품 가게에서는 실제로 이 보리싹을 갔다놓고 원하는 손님에게 즉석에서 Mixer로 갈아서 서비스 하기도 합니다.)

 

 

엽록소는 살아있는 영양소, 푸른 피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소는 파란 풀만 뜯어 먹고도 영양가 많은 우유와 양질의 고기를 생성해내는 이유를 아십니까? 식물의 잎에서 각종 영양분을 만들어내는 생산공장 역할을하는 엽록소는 깨끗한 혈액을 만들뿐 아니라 손상된 세포를 재생시키고 항알레르기 및 해독작용을 갖고 있어 암세포나 바이러스의 발생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이 엽록소도 열에 약하여 채소를 익혀서 먹으면 파괴되기 때문에 조리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나름대로 찿아 실천해야 합니다.

 

 

동물이나 사람은 스스로 체내에서 영양분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식물을 먹어야만 살아 갈 수가 있으며, 그것도 생으로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으면 Low Calorie 에다가 육류에는 없는 온갖 필수 영양소들이 다 들어있어 우리가 채식만 하고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건강학 전문 의사이며 유명한 제약회사 사장을 역임한 하기와라박사는 본인 스스로 위장을 대부분 잘라낸 중환자였는데도 극단적인 소식에 이 엽록소와 효소의 복용으로 충분히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 효소와 엽록소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나서는, 아예 토질과 기후조건이 좋은 캘리포니아로 와 비옥한 땅에서 보리를 윤작, Organic(무공해) 재배, 이를 저온처리 하여 양질의 효소 엽록소 제품을 쉽게 복용할 수 있도록 Powder로 생산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비타민 및 유기질 함유량이 많아 인체에 꼭 필요한 celery, broccoli등 여러 생야채를 저온처리한 훌륭한 건강식품도 Powder로 몇 종을 생산하는 등 왕성한 사업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류에는 효소등 필수영양소는 거의 없고 단백질이나 지방질이 많아 안그래도 영양과잉으로 시달리는 현대인을 비만과 Diet라는 악순환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또한 육류는 소화과정중 체내에서 유해독소를 발생 시키며, 육류속에 들어있는 제초제, 살충제 성분 또 성장홀몬과 항생제의 잔류성분으로 오히려 건강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듯,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불과하답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지금의 생을 누린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기회입니다. 나의 몸을 잘 가꿈은 물론 마음을 열심히 갈고 닦아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더불어 삶의 희망찬 세상을 만들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려면 에너지가 꼭 필요합니다.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사고, 분노, 웃음, 울음 등 정신까지도 다소의 에너지 소비를 하여 일어납니다. 휘발유가 타야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도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타야만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탄수화물이 탈 수 있는 온도는 380도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39도만 넘어도 해열제를 먹고 응급실로 뛰어가야 하는데 말도 안되겠죠? 이때 효소가 필요한겁니다. 효소는 몸을 380도까지 올리지 않고서도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태워서 에너지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게됩니다.. 에너지 발생의 근원인 효소 및 효소원료는 우리 몸 자체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단지 음식물을 통해서만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효소가 충분히 들어있는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도 이 때문인것입니다. 즉, 우리는 효소의 반응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효소는 55도 이상의 열이 가해지면 활성화되지 못하고 다 죽어버립니다. 효소가 충분한 식품을 먹어도 가열해서 먹으면 그 기능을 제대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도 효소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는 10숟가락을 먹어야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지만 효소가 살아있는채로 생식을 하면 한 숟갈만 먹어도 충분합니다. 효소가 살아있을 때의 에너지 효율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불활성화 되었을 때의 에너지 효율은 20%를 넘어가지 않지만 살아있을 때의 에너지 효율은 85%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곡식이나 야채나 과일을 열을 가하지 않고 생식으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살아있는 상태의 효소를 먹을 수 있기때문입니다. 효소는 곡식의 씨눈에 가장 많이 들어있고 엽록소가 함유된 식물의 잎, 줄기, 뿌리, 열매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효소가 살아있는 것은 과일을 제외하고는 전부 맛이 없습니다. 곡물종류를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이미 열이 가해져 효소가 파괴 된것을 먹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효소가 활성화 되어있는 식품(생식)을 먹어야 피가 맑아지고 체질이 개선되며 생명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효소는 색상이 없고 투명하며 전자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1억분의 1㎜라는 극히 미세한 물질로서 수정과 같이 4각형, 5각형 또는 원 모양을 하고 있다. 효소는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각각 형태가 다른 효소들이 연결되어 혈액속에 흐르거나 각 장기의 세포속에서 각기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인체 내에서의 효소역할을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손을 비었다고 하자. 그 상처는 세포가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이 상처를 그대롤 두면 피가 계속 흐르고 공기 속의 병균이 침입하여 점점 악화되므로 출혈을 막고 파괴된 세포를 새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체내의 효소가 모여들어 생화학반응(生化學反應)을 일으켜 출혈을 막고 세포를 새로 만든다. 만일 체내의 병균이 죽기 않고 화농(化膿)했다면 인체에 크게 해로운 고름을 만들어 심할 때는 독소가 피를 통해 온몸에 퍼지게 된다. 즉 한시도 쉬지 않고 진행되는 모든 생화학반응이 효소를 매개로 하는 촉매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고작용이나 손과 발을 움직이는 동작까지도 효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장활동, 근육활동, 신경활동, 뇌의 활동 등 효소는 인간생명의 모든 작용에 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효소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생명현상은 생화학적 반응에 따라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생화학적 반응을 진행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효소라는 촉매이다.촉매란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두 물질에 작용해 새로운 한 개의 물질로 바꾸거나, 어떤 화학 물질을 분해하여 새로운 두 개의 물질로 변화하도록 하면서도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물질을 말한다.

 

 

 

산의 정상이 높으면 산을 넘기가 힘들 것이다. 이 때 산의 정상을 낮추던가, 아니면 터널을 뚫는다면 사람이나 차량들이 쉽게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강둑이 높으면 물이 흐르지 않다가 강둑을 낮추면 물이 쉽게 흐를 수 있게 된다. 산의 정상이나 강둑을 낮추는 기능을 하는 것이 촉매라고 이해하면 된다.즉 촉매는 보통 상황하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화학 반응을 일어나도록 하는 독특한 기능을 하는 물질인 것이다.

 

 

생명체 안에서 세포가 성장하고 분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생화학 반응은 보통의 화학반응과는 달리 상온에서 중성 pH에서 반응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효소 촉매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생명의 탄생과 생명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이 효소를 생명분야의 과학자들은 생명의 근본 물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효소야말로 건강의 근원이다. 세포의 분열은 효소의 작용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자와 정자속에 효소가 있으므로 효소의 촉매작용에 의해 모체내에서 수정이 가능하여 새로운 생명체가 형성되고 발육되어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세포의 분열은 물론 잉태, 발육, 성장 등에 관여하여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효소가 작용한다. 즉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가면 타액을 통해 곧 프티알린(Ptyalin) 이라는 효소가 나와 음식물의 전분을 맥아당으로 분해한다. 밥을 잘 씹으면 단맛이 나는 이유가 바로 이 맥아당 때문이다.

 

 

다음 위에서는 펩신(pepsin)이라는 단백질분해 효소가 나와 육류(肉類)의 단백질을 어느 정도 분해하며, 그 다음 소장(小腸)에서는 트립신(Trypsin), 에렙신(Erepsin) 리파제(Lipase)등의 효소가 나와 음식물의 지방질과 남은 단백질을 완전히 분해하여 흡수되기 쉬운 상태로 소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소화 흡수된 영양분은 에너지원과 각종 세포의 구성원이 된다.

 

 

 

위와 같이 각 소화기관 및 각 장기에서 만들어진 효소는 혈액을 통해 각각 작용할 장소로 흘러가 각자 맡은 일을 하게 되며, 인체의 모든 생명현상에 관여하기 때문에 효소의 순조로운 생성과 활발한 작용 없이는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만약 이들 화학변화를 인공적으로 한다고 한다면 간장의 기능만으로도 대형 고층 빌딩에 상당하는 공장이 필요하며, 뇌의 기능에 이르러서는 대뇌의 측두엽의 운동만도 10억 킬로와트의 전력이 필요하고, 대뇌피질의 기둥을 청사진으로 찍으려고 한다면 미국 예산의 천 배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체는 그들 화학반응을 36도의 체온으로 어렵지 않게 하고 있다. 이것이 효소의 덕인 것이다. 생체에는 무수한 화학반응이 있는데, 그것들을 주관하는 위대한 힘에 의하여 효소는 제4의 불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제1의 불은 활활 타는 불, 제2의 불은 전기, 제3의 불은 원자력, 그리고 제4의 불은 효소이다. 이 효소에는 생리적인 역할에 따라, 소화효소, 발효효소, 호흡효소, 근육효소, 응유(凝乳)효소, 응혈(凝血)효소 등의 종류가 있다.

 

 

 

]효소는 인체의 모든 세포에 그야말로 무한히 존재하며 모두 화학변화에 촉매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체내에 효소가 없다면 그 순간부터가 죽음이다. 그러므로 체내에서 효소가 부족하거나 그 작용이 저하되면 결코 건강 할수 없으며 효소야말로 생명과 건강의 근원인것이다.

 

 

 

 

 

효소의 밸런스가 깨지면 반건강상태. 체내의 효소는 알맞은 체온과 PH(체액의 산도)그리고 적당한 보효소(補酵素 : 유기산과 미네랄)을 갖추어야 활발한 작용을 하게 된다. 이것을 효소의 최적조건(最適條件)이라하며 체력 유지의 필수 요건이기도 하다. 이 최적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효소는 감소되거나 그 활성이 저하되어 각 체내 장기의 기능이 약화되므로 건강상태가 무너지고 반건강상태가 된다. 반건강상태가 지속되면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므로 암과 같은 악성종양, 위궤양, 방광염 등의 세균성 질환이 발병하기 쉽다.

 

그렇다면 체내의 효소가 부족하거나 그 활성도가 저하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식생활에 있어서 산성식품 위주의 편식에 의해 효소의 최적조건을 무너뜨리는 까닭이다. 효소는 약 알칼리성 즉 PH 7.4 일때 가장 활성이 강하며 이는 우리 식생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효소는 음식물의 소화과정을 통해 각 장기에서 생성되지만 공기, 식수, 토양 등의 오염, 화학비료, 농약, 인스턴트식품 등이 직접 간접으로 효소를 감소시키거나 그 활성을 떨어뜨려 모든 조직의 세포활력이 저하되어 체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체내의 밸런스가 깨어지므로 이변이 생기고 마침내는 발병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당연히 식생활 개선이다. 하지만 경제성과 편의성만을 추구하는 오늘날 산업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효소부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체내의 효소와 똑같은 효소를 체외로부터 보충하여 깨어진 밸런스를 바로 잡는 것이다.

 

 

 

 

효소의 중요한 특성. 효소는 효율이 대단히 좋은 촉매이다 예를 들어, 암모니아 공장에서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고정하는 공정에는 4백-6백℃의 온도와 1백-9백 기압의 조건과 엄청난 규모의 설비가 필요한데, 질소를 고정하는 뿌리혹박테리아의 나이트로지나제라는 복합효소는 상온의 중성 pH에서 질소를 암모니아로 바꾸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살코기 1근을 가수분해하여 단백질 구성성분인 각각의 아미노산으로 바꾸려면 강한 염산 용액 속에서 1백10℃로 24시간 가열해야 하나, 파파야에서 얻은 펩신이란 효소 1g을 사용하면 pH4에서 한시간 반 동안이면 가능하다. 일반 가정에서도 이러한 실험은 간단하게 해볼 수 있다. 질긴 쇠고기에 키위즙을 조금 넣어 냉장고에 일정시간 보관하면 키위 속의 단백질 분해효소가 작용하여 고기질이 연하게 된다.

 

 

 

효소는 어떤 특수한 반응에 한 개의 효소만이 작용하여 촉매 기능을 한다 사람의 위 속에는 '트립신'이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있는데, 이 효소는 긴 사슬의 폴리펩트드 중 '아르기닌'과 '라이신'이라는 아미노산 바로 옆의 펩티드 결합만을 절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소는 다른 촉매들과는 달리 촉매반응의 속도가 자체 기능으로 조절될 수 있다. 마이오신은 사람의 근육 수축에 관여하는 효소인데, 칼슘이온 농도에 따라 촉매속도가 조절되고 있다. 세포 내에서 효소는 호르몬이나 반응물 또는 생성물에 의해서 그 기능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효소 단백질의 구조는 입체구조이다. 효소는 수용액 속에서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효소를 다룰 때는 이 입체구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효소는 높은 온도에서는 그 구조가 흐트러져 기능을 못하게 되며 낮은 온도에서는 기능이 일시 정지됐다가 다시 온도를 올리면 그 기능이 회복된다. 저온에서 효소의 기능이 회복되는 성질을 이용하여 생물을 급속히 저온으로 처리한 후 장기간 보존했다가 회생시키는 실험이 가능하다.(생식에서는 진공동결건조법을 사용하여 수확했을 때의 영양분과 효소의 파괴를 최소로 하고 있음)

 

 

 

효소가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유기화합물이나 무기금속을 필요로 한다.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산화-환원반응이나 카르복실화반응 등은 효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미노산으로는 기능을 할 수 없고 간단한 유기화합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고등동물의 경우 스스로 이런 물질을 만들지 못하면 외부에서 섭취해야 하는데, 이러한 효소 보조 화합물이 비타민이다. 그래서 비타민 결핍으로 나타나는 신체 증상은 체내에서 효소가 기능을 못하게 되면서 신진대사에 필요한 물질의 공급이 어려워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효소의 6대 생리작용

 

 

소화흡수 작용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가면 침으로부터 위장, 소장을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효소가 나와 (프티알린, 펩신, 트립신, 에렙신, 리파제)각종 영양소를 분해하여 흡수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 세포의 영양분 및 장기의 에너지로 흡수시킨다. 또한 이들 소화 흡수 기관에서 여러 가지 효소를 만들어 혈액을 통하여 온 몸의 필요한 곳으로 보낸다.

분해배출 작용 병이나 염증 부위의 오물이나 세포에 쌓인 공해물질, 각종 노폐물을 분해하여 땀이나 소변을 통하여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

소염항균 작용 염증이 생기면 효소가 백혈구를 운반하고 그 활동을 도와 상처 입은 세포에 치유력을 높여주고 염증의 소염작용을 촉진시킨다. 해독살균 작용 효소는 특히 간 기능을 강화시켜 외부로부터 들어온 독소를 분해하여 해독시킬 뿐 아니라 화농균에 대하여 항생물질 이상의 강력한 살균력을 갖고 있다.

혈액정화 작용 혈액 속의 독소와 이물질, 노폐물을 분해 배설시키고, 특히 혈액 속에 많은 콜레스테롤을 용해 조절하여 건강한 약 알칼리성 혈액으로 개선시키며, 피의 흐름이 좋아지도록 돕는 작용을 한다.

세포부활 작용 세포의 대사기능을 활성화 시켜 낡은 세포와 새로운 세포를 신속히 교체시킨다. 효소의 작용은 다소 시간은 요하나 체력증진과 함께 신체 전반에 걸쳐 작용하여 체내의 환경을 잘 조화시키고 자연 치유력을 강화시켜 근본적인 건강을 유지시키는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효소,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몸의 일꾼 모든 생명현상은 일종의 화학반응입니다. 그러나 이 화학반응은 생체 안에 2000종 이상 존재하는 효소없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연탄이 제대로 타지 못하면 연탄재가 무겁고 독가스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효소가 부족하면 효소에 의해 몸 속에 들어온 타는영양소, 즉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 완전연소가 되지 못해 몸이 무겁고 각종 독소가 발생하게 됩니다.

 

 

체내에 독소가 발생하는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하면 체내 조직 세포에 노폐물이 축적되어 염증을 일으키게 되고 여러가지 질병으로 이어지게 되겠죠?

 

 

현대인은 너무 많이 먹어서, 식단이 화려해서, 또한 가공식품과 화식으로 인해 효소가 모두 죽은 식품을 계속 섭취해온 까닭에 성인병과 각종 암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효소의 왕인 보리!  대성리 참터에 오시면 불이농법(무경운, 무비료, 무농약, 무제초제)에 의한 보리새싹이 지금 잘 자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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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시다

2009년 6월. 성스러운 성이야기 (이재형) 강의 (1) | 사후현장중계

 

 

 

 

성 혹은 섹스라 하면, 바로 딱 연상되는(오래 생각하면 반칙입니다) 단어나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청중답변) 즐거운 거. 쑥스러움.. 야동... 쾌락... 여자... 욕구... 사랑... 말하기 어려운 것....

 

 

 

어떤 분들은 신음소리, 끈적한 어떤 거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구요, 사랑, 사랑의 확인, 관계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밤일이라고도 하던데, 저는 그 단어에서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해야된다는 부담으로 와닿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함들이 모두 성의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성이라는 개념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는 이야기입니다. 쾌락임을 부정할 수 없죠. 큰 기쁨입니다. 소통하고 연결하는 사랑의 확인, 어떤 분들은 뭔가 성스러운 것으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쾌락부터 성스러운 것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개념이 성에 있습니다. 가볍게 얼른 던진 질문 속에서도 쉽게 확인이 됩니다.

 

 

 

성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사회적인 윤리나 관습,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양 중세 시대에는 여성이 자위 모습을 들키게 되면 마녀라고 화형당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산다면 ‘성, 섹스하면 뭐가 떠오르세요?’라는 질문 자체가 너무 무서운 질문이 될 겁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물처럼 공기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는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이라는 것 속에서 몇 가지 필터를 거둬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 관습입니다. 서양 중세시대에는 의자 다리가 여성의 다리를 연상시킨다해서, 의자 다리에도 옷을 입혔습니다. 저는 그러면 오히려 더 생각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우스꽝스럽죠. 그러나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두 번째 필터는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어려서 성에 대해 굉장히 엄한 교육을 받았다거나, 특히 우리나라에 연세가 좀 되신 여성분들은 더 심했습니다. 성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서도 안되고, 욕구를 먼저 비치면 큰일납니다. 천박하게 이해당하니까요. 크든 작든 성에 대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제 경험에 의하면, 성폭력이나 강간 이런 큰 상처들이 아니더라도, 성과 관련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성은 무의식 깊이, 강간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의 원형이 기본적으로 있습니다. 남자는 강간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없잖아요. 여성들은 항상 그런 두려움과 조바심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사소한 것에도 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상처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이 거기서 벌써 제한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필터를 거둬낸 후, 성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그것을 참 잘 밝혀놨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도구를 궁극적 진리를 찾는 도구로까지 활용할 만큼 연구가 잘 되어 있거든요. 물론 현교가 아니라 좌도쪽에서 하긴 했지만, 인간 본성 깊은 본바탕에서 성이 무엇인가 연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성의 본질을 찾아보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원리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먼저, 섹스라는 단어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남녀 한 몸이었는데, 능력과 지혜가 많아지니, 신이 시기하여 반을 짤라서, 그 후로 서로 반쪽을 찾아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끌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section이라는 단어, 나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것과 같은 어원으로 sex라는 것은 둘로 나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근원적인 진리를 통찰하는 여러 영역이 있는데, 그 중 천문점성학이 있습니다. 이 천문점성학에서 sex를 어느 범주에 두었냐면, 깊은 무의식, 죽음, 재탄생 이런 범주였습니다. 이건 분명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성이 왜 이런 범주에 속해 있는 걸까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둘이 서로 말도 잘 통하고 위해주는 것 같은데 속궁합이 안 맞아서 거의 성생활을 안 하고 사는 부부와, 심하게 싸우고 심지어 폭력도 가끔 쓰는 것 같고 곧 큰일 날 것 같은데 속궁합이 잘 맞아서 어찌 보면 닭살 맞게 좋아하고 오히려 더 생명력있게 사는 부부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가 주로 내리는 평가는 ‘그 여자는 그게 그렇게 좋은가봐’, ‘도대체 속궁합이 뭔지’, ‘천박해서’, ‘색골이어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여러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원리를 알게 되면, ‘천박해서’ ‘색골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은 빙산위로 올라와 있는 부분이고, 무의식이라는 것은 수면 밑으로 잠겨 있는 큰 빙산의 덩어리입니다. ‘서로 언어적 소통이 잘된다’라는 것은 ‘의식’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행동의 본원적 동기부여가 되는 무의식의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향력이 더 크며, 성은 이 무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생활이 좋다’라는 것은 깊은 무의식을 서로 소통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매우 깊은 유대감을 나눕니다.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죽음을 같이 나누는 것 같은 연대감이 생깁니다. 인간관계 중 가장 친한 관계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같이 나눈 전우라고 합니다.

 

 

 

죽음을 같이 나눈 것 같은 아주 깊은 관계에서는, 설사 그 사람이 나를 버리고 엉뚱한 짓을 했다하더라도, 내 돈을 떼먹혀도,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너그러움과 관용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을 같이 나눈 것 같은 소통, 거기에 성의 중요한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깊은 무의식을 낳는단 말인가, 무엇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왜곡된 편견, 이런 필터를 제거하고 보면)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구조, 생김새. 상징.

 

 

 

동양학에서는 상징과 숫자, 상수학을 가장 수승한 경지의 학문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조짐, 상징을 보고 상태를 압니다.

 

 

 

우리 몸에서 성과 관련된 모양새를 보겠습니다. 성기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는 상체와 하체의 중간입니다. 좌와 우의 중간이기도 합니다. 통상 상체를 밝은 것(양, 의식, 영), 하체를 어두운 것(엄, 무의식, 육)으로 봅니다.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는데요, 성은 양자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소통하는 가장 중간, 센터에 위치한 현상, 이것이 성입니다. 그래서 성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생명의 탄생은 매우 심오하고 신비한 현상이잖아요. 성은 생명의 신비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성에 대한 공부해서 뭐하느냐고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본질을 공부하려면, 성의 현상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있어야합니다.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기억안납니다만, 아주 유명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운’과 ‘불운’이라는 자매가 있는데, 비가 오는 어느 날 그 자매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재워주길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집안에 있던 사람이 ‘행운만 들어와라, 불운은 필요없다’고 하니, 자매가 답하길 우리는 쌍둥이라 둘 중 하나만 들어갈 수는 없다고 했답니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바는 성의 이야기와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따로 분리되는 존재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파우스트」에 보면 악령에게 영혼을 판 존재가 아니고서는 그림자 없는 사람이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생명이 바로 이원성입니다.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다는 것, 의식이 있으면 반드시 무의식이 있다는 것,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수련법이나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을 종합해보면, 그 이원성을 초월하거나 합일하자입니다.

 

 

 

저는 부부상담을 하면서도 이 빛과 그림자같은 우리 삶의 이원성을 많이 느낍니다. 같이 사는 게 괴로워서 이혼하겠다는 분들이 오면, 어떤 점이 그토록 싫은지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두 분은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그때 좋았던 이유가 나중에 헤어지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사람이 참 무던하고 편하고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맘에 들어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싫은고 하니, 사람이 변화가 없고 재미가 없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한 것 같아서 싫다고 합니다. 또, 남자답고 리더십있고 씩씩하고 박력있어서 결혼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지맘대로이고 예측불가능하고 독단적이라서 이혼하려고 한답니다. 사실 같은 내용인데 빛과 그림자로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한쪽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칼 융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빛과 그림자를 모두 내 안에서 어우르면서 소통할 수 있는 인격이 되고 싶지, 좋은 쪽으로만 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 분도 통찰한 거지요.

 

 

 

음양은 이런 이원성을 가장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성을 근원의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썼던 이유도 이런 근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음양의 합일을 보려 애쓰는 것보다,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면 가장 가까운 길벗인 배우자와 함께 음양의 합일을 찾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드러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을 회피하고 엉뚱한데서만 찾으려한다면 대단히 소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저는 막대자석을 보면서, 반은 N극 재료이고, 반은 S극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을 자르면 0.0001초도 안되서 그 반에서 다시 N극과 S극이 나뉩니다. 반을 또다시 반으로 나누면, 그 반이 또다시 N극과 S극으로 나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자석은 단극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N극만 존재하고 S극만 존재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양극이 항상 같이 다닌다고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선과 악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타지마할을 구경하였는데, 정말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더 불가사의하다고 느끼는 게 있는데, 지구상의 인구 전부를 산하제한조절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거의 남자 반, 여자 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 원리와 비추어 제가 세운 가설입니다. 검증해보기가 쉽지 않긴 한데, 만약 이 시간에 여기에서 아들을 한명 낳으면, 이 지구상 어디에 딸이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자석은 아무리 짤라도 N극 S극이 같이 있듯이, 음양은 항상 같이 다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음양의 이원성은 우리가 추구해야하고 또 극복해야할 무엇입니다. 음양을 어떻게 하면 합일할 수 있을 것인가. 수련법과 연결짓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하시니까, 저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한의학에서는 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동의보감」 첫 장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촛불의 비유를 듭니다. 촛대가 있고(초의 몸체), 촛불이 있고, 촛불로 인해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것, 이것을 세가지 큰 보물이라고 합니다. 정기신(精氣神) 삼보라고 합니다.

 

 

 

 

 

 

 

 

 

 

 

 

 

 

 

신神(상)

 

 

 

기氣(중)

 

 

 

정精(하)

 

 

 

 

 

 

 

 

 

 

 

 

 

 

 

정 에너지는 하처에 해당하고 가장 밑에 있기 때문에 바탕과 토대, 기초입니다. 그래서 근원적 힘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 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에너지의 센터라고 합니다. 가슴으로 올라가 중처인 기 에너지는 사랑과 감성에 해당하고, 상처로 올라가면 지혜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성에너지라는 것을, 삶의 전체에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런 원리로 보면 온당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촛대가 없으면 촛불도 없고, 주변이 환해지는 것도 없거든요. 그리고 이 촛불과 주변이 환해지는 것에 근원적 에너지를 전부 이 촛대에서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 힘의 에너지는 전부 정 에너지에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남녀간의 사랑, 인류애, 자비심 모두 같습니다. 한 재료입니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처럼 모양새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비교를 하자만, 촛대는 고체니까 좀 더 투박하고 좀 더 거친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기름으로 변하면서 액체로 되는 것이, 가슴에서 사랑과 감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기체를 통해서 주변이 환해지는 거잖아요. 정 에너지가 조금 더 미묘해지고 더 변형된 것이 가슴에서 사랑이고, 좀 더 미묘해지고 변형되면 영성과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미묘해지고 정화된 에너지일 뿐, 근원적 에너지는 정에서부터 시작되며 매우 중요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세 가지 보물 중에서 근원 중의 근원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정이라 했습니다. 정 에너지를 잘 응용해야한다, 그것이 건강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아끼고 또 아끼고 잘 응용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精에 力을 붙이면 정력이 되지요. 정력이란 성에 대한 스태미너 포함, 모든 일에 정력적이다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모든 일에 원기가 있고 저력이 있고 든든하고 흔들림없고 이런 것을 우리는 정력적이라고 합니다. 精에 液이 붙어 정액이 되고, 뼈골 髓가 붙어 정수가 됩니다. 에센스. 뼈골 빠지게 일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일했다라고 금방 이해가 되는데, 精을 쏟았다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精神(spirit)도 이렇게 쓰지요. 우리 정신은 이 근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미 단어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합쳐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게 아닙니다.

 

 

 

성이라는 것이 남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필터들은 일단 조금 물려 내주시고 한번 들어주십시오. “성생활 40년 해봤는데, 안그렇던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안의 틀에서 작동하는 성일 수 있습니다. 조금 넓게 마음을 열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비행가가 선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비행가가 뭔 지 모르는 마을이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뭐에 쓰는 물건인고, 만져보고 뒤지면서 살펴봅니다. 문이 열었다 닫혔다하니, 창고로 쓰면 좋겠다해서, 물건을 보관해두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호기심과 탐구심 많은 사람이 보니, 앞에 바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끈을 매달아 몇 사람이 끌고 갔더니 조금씩 움직이는 겁니다. 창고가 움직일 수 있으면 더 활용도가 많잖아요. 훨씬 좋네 그러면서 달구지처럼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막 뒤지다보니 엔진실에 가서 뭘 만지작거리게 되고, 시동이 걸리면 씽씽 가는 걸 보고, 이렇게 잘 나가는 걸 그동안 창고로, 달구지로만 썼네~ 그러면서 자동차처럼 막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그 가치를 다 해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비행기로 썼다고 합니다. 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유로 인용해본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상담해본 경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창고로 쓰는 경우이고, 달구지로 쓰는 사람이 그 다음으로 많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로 쓰는 사람은 10% 미만인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의원에서 침 맞는 사람들과 좀 친해지면, 성에 대한 부분도 진단해서 물어봅니다. 동의보감에는 사람을 진단할 때 네 가지 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잘 먹느냐, 두 번째가 먹은 만큼 잘 배설하느냐, 셋째, 잠을 잘 자느냐, 넷째가 성생활을 잘 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는 누구든지 잘 물어보고 편한데, 라뽀가 형성되기 전, 성생활은 좋으세요? 라고 물으면 바로 뜨악해지고 얼굴 빨개지고 긴장하는 분들이 계셔서 안물어봅니다. 서로 친해지고 신뢰가 쌓이면 물어봅니다. 한의원 환자들 중 많은 분들이 여성인데(20대부터 50대 너머까지) 굉장히 놀랍게도, 10명 중 6명이 평생 한 번도 좋은 걸 못 느꼈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던데... 영화나 소설책 그런거 다 뻥이죠?” 그럽니다.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성에 대해서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봅시다.

 

 

 

남녀는 어떻게 다른가. 앞서 잠시 상수학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구조, 형상, 상징, 숫자의 의미.

 

 

 

요즘 젊은 친구들 중 겉으로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헤어스타일도, 옷도, 유니섹슈얼해서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통하는 것입니다. 성의 상징, 심벌을 확인해봐야죠. 음경을 가지고 있는지, 질을 가지고 있는지, 성기를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기가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남성은 한 토막으로 생겼습니다. 고환까지 해서 세토막이라 해도, 어쨌든 홀수로 생겼습니다. 여성은 두토막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짝수로 되어 있습니다. 홀수는 뭐고 짝수는 뭡니까? 동양에서 양은 남자를 의미합니다. 해, 빛, 햇볕, 밝은 것, 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 가벼운 것, 뜨거운 것, 강인한 것, 홀수............ 음은 여자, 달, 그림자, 그늘, 어두움, 정적인 것, 무거움, 차가움, 부드러움, 짝수.

 

 

 

홀짝이 왜 양과 음인지 익숙치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홀수는 홀로된 숫자입니다. 하나든 셋이든 하나가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우려고 하는 동적인 특성이 생깁니다. 짝수는 짝이 맞는다, 둘, 넷, 그러니 그대로 정적인 특징이 생기는 겁니다. 재미있게도 쌀과 보리도 꼭 이렇게 생겼습니다. 쌀은 봄에 씨앗을 뿌려서 여름에 폭염과 많은 일조량을 받아야 자라는 곡물입니다. 즉 양의 기운을 많이 받고 자랍니다. 생긴 것이 한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리는 가을에 씨앗을 뿌려 겨울의 냉기를 받고 자랍니다. 음의 속성을 닮아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리쌀은 오래 끓여야 익습니다. 본성이 차기 때문에 속이 찬 사람들이 먹으면 쉽게 설사를 합니다. 당뇨병 같은 것들은 뭔가 막 조바심을 내고 안달을 내서 진액을 바짝 말리는 병으로 보는데, 그래서 음의 속성, 촉촉함의 속성, 차가운 속성을 보해주기 위해 보리를 많이 먹으라고 권합니다. 양방에서는 당뇨병에 칼로리 계산해서 그러지만, 동양에서는 음양에 대한 통찰력으로 보리가 당뇨에 좋다고 합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약재 고르고 분석할 때도, 성분이 아세트알데히드다 뭐 이렇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생김새를 보고 통찰하는 패러다임이 많습니다. 잎사귀가 셋이냐 여섯이냐. 셋이면 양적인 속성이 있을 수 있겠구나, 여섯이면 음적인 속성이 있을 수도 있겠네. 물론 거기에 색깔도 함께 봅니다. 실재로 이런 통찰이 잘 맞습니다. 한의학이 엉터리라면 이런 말도 엉터리이겠지만, 한의학에서 그대로 인간의 병에 적용이 되는 걸 보면 이건 정말 훌륭한 통찰력의 도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음과 양이 다릅니다. 물론 남자 중에도 좀 더 여성적인 남자고 있고, 여자 중에도 좀 더 남성적인 여자가 있습니다. 변화는 있지만 기본은 그렇다는 겁니다. 다름의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통찰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남녀는 이렇게 성기가 다르기도 하고, 가슴의 구조 생김새도 다릅니다. 남자는 아래(성기)가 튀어나와 있습니다. 여성은 위쪽(가슴)이 튀어 나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머리, 가슴, 배입니다. 상초, 중초, 하초 /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 머리형, 가슴형, 장형(애니어그램). 동양에선 3이란 숫자를 소선수라고 합니다. 뭐라도 조그만거 하나 하려면 삼세판은 해봐야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3으로 대개 봅니다. 인간도 그렇게 생겼습니다. 머리(지혜), 가슴(감성), 배(힘과 용기, 존재의 센터). 그렇다면 남자는 아래가 튀어나왔고, 여자는 가슴이 튀어나왔습니다. 튀어나왔다는 걸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잘 발현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튀어나왔으니까 잘 보이잖아요. 그러니 남성은 힘과 용기, 결과와 생존 이런 쪽의 에너지가 잘 발현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거기에 비해 가슴은 감성, 사랑, 관계 중심입니다. 그걸 조금 전문적인 심리학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튀어나온 것이 ‘우월성향’입니다. 남자는 결과중심, 힘 중심, 용기중심, 생존중심이 우월하게 드러납니다. 남성들에게는 감성이 없는가. 없지는 않죠. 있는데 대신 좀 들어가 있습니다. 좀 더 열등성향이라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여성은 가슴이 우월하게 드러난 ‘우월성향’이고, 힘과 용기, 결과 이런 것들 ‘열등성향’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완전한 일깨움을 추구하면 내 우월성향과 월등성향이 소통할 수 있고 통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도, 명상에서도 추구하는 바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이완이 필요합니다. 편안하고, 이완되고, 관대해질 때, 남성도 여성성이 잘 발현됩니다. 남성미가 있으면서도 따뜻해지고, 부드럽고, 젠틀해집니다. 여성도 인격이 통합되고 이완되면서 소통이 잘 되면, 여성스러우면서도 쿨하고 용기있고, 남성성과 같이 소통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구조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튀어나온 것이 플러스이고, 들어간 것이 마이너스라면, 플러스가 마이너스로 무언가를 주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주기가 쉽다’는 것이 좀 지나치면 ‘공격하기’가 되기 쉽습니다. 남성의 성기에서 여성의 성기쪽으로 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이런 표현에 대해서 여성운동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이견을 가지고 있어서 ‘삽입’이라는 표현이 맘에 안든다고 ‘흡입’이라는 말을 쓰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남녀차별도 많았고, 여성을 너무 도구화하는 문화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삐뚤어진 걸 바르게 하려다가 반대쪽으로 너무 끌어다놓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여성은 가슴으로 감성을 줍니다.

 

 

 

이렇게 주고 받는 특성 때문에, 대개 남녀간에 상처를 주고받고 지지고 볶고 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해서 저렇고 저렇게 해서 속상했고 막 그래가지고.....’ 이러면, 남자는 대뜸 ‘결론이 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합니다. 여자가 보기에는 무심하게 보입니다. 남자는 결과가 잘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결론이 뭔지 중요합니다. 부부동반모임있을 때, 남자들끼리 이쪽에서 놀고, 여자들끼리 저쪽에서 모여 놉니다. 여자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면서 남자들이 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이란 뭐 아무 쓸데없는 얘기 하루종일 떠들어도 뭔 할 얘기가 또 많아’...... ‘아무 쓸데없는 얘기’라는 것은 ‘결과가 없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되겠는가, 대책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냥 본능적으로 나오는 존재입니다. 여자들끼리 한시간 이상씩이나 통화하고 나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 이러면, 남자들은 전화비도 아깝고 갑갑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뭐라고 한소리하면서 상처를 줍니다. 여성의 특징을 그대로 못보니 그러는 겁니다. 여자분들도 남자들의 이런 특징과 구조를 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분들의 입장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보일까요. 남자들이란 애나 어른이나 늙으나 다 애들같다고 합니다. 다양한 감성을 나누는 즐거움을 모르는 진화가 덜 된 종족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어쩌라고?’, ‘뭔데?’... 뭔 일이 있으면 그것만 대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이런 것도 나누고 저런 관점도 나누고 그래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주고 받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왔어요. 피곤해서 왔는데, 여성이 감성을 얼마나 나누고 싶겠습니까? 집에서 남편이 좋아할 것 같은 이쁜 걸 만들어봤어요. 오자마자 ‘당신 기다리면서 이거 만들었는데 어때?’ 그러면 남자는 ‘어, 예쁜데’라고 합니다. 여자는 신이 나서 두 번째 작품을 가져오면서 ‘이건 어때?’ ‘응, 예뻐예뻐...’ 세 번째까지 가지고 오면 남자는 ‘거기다 놔.. 좋아좋아...’ 눈도 안마주치고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경우 그럴 때 되게 부담스러워집니다. 다음 비유를 들어보면, 남자들의 이런 부담을 조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생활에서 여자분들이 되게 불편해하는 것이, 여자의 성기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성기를 삽입했을 때 약간 공격당하는 것 같고 움찔하고 그래서 긴장된다고 합니다. 충분히 준비되도록 서서히 다가오면 존중받는 것 같고 고맙고 편안할텐데, 남자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발기를 왕성하게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남자답고 씩씩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여성들이 신음을 지르면, 무지 좋아해서 그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픈거와 좋은 거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서로 모르고, 그만하자면 상처받을 것 같아 말 못하고, ‘내가 참자. 이 남자는 이게 좋은가보다’ 그러면서 여자는 참고, 남자는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걸 훨씬 좋아하는구나’ 그러면서 이미 힘껏 다했지만, 여자 좋으라고 더 세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자는 좀전에도 아팠는데, 남편이 이렇게 하면 좋은가보다 하면서 이를 악물고라도 참아줘야겠다.... 그럽니다.

 

 

 

남성이 ‘결론이 뭔데?’ 라는 식으로 공격하듯이, 여성이 남성에게 공격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감성의 공격’이고 ‘가슴의 공격’입니다.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들어와 움찔하듯이, 남성도 여성들의 감성 공격이 버겁고 부담스럽습니다. 서서히 해야합니다. 이것이 열등성향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완되서 천천히 들어와줘야합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먹을 것부터 먼저 주세요. 남자에게는 아래 생존의 센터가 발달한 지라, 먹을 것이 급합니다. 배고픈데 이쁜 작품들 내봐야 짜증만 납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주고 시급한 우월성향쪽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중간에 한숨 좀 돌리고 그럴 때, 그때 첫째 작품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남자는 ‘이쁜데~’ 그럽니다. 또 과일먹고 TV 잠깐 보다 두 번째 이쁜 작품을 또 보여줍니다. 남자는 ‘멋있다~’ 그럽니다. 여자가 ‘하나 더 보여줘보까?’ 그러면 남자는 ‘가져와봐. 당신 대단한데~ 우리 전시회라도 할까’ 이러면서 굉장히 소통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남자도 서서히 이완될 필요가 있습니다.

 

 

 

연애시절의 갈등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가 좋다고 따라다닐 때, 여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이 남자와 함께하자 결심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또 몸의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감성을 막 퍼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는 갑자기 뒷걸음질치고 뭔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여성들이 배신감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잡아놓은 고기에게 미끼 안준다고 하더니, 마음을 여니 남자가 줄다리기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뭐 사실 그렇게 나쁜 놈들도 더러 있습니다. ^^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여성들의 색안경으로 남자를 보는 것일 뿐입니다. 감성을 퍼부으면 그 사람도 당연히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서 남성은 열등성향이라는 것을 아시고 속도 조절을 하셔야 합니다.

 

 

 

남성도 힘과 용기, 결과를 이야기할 때, 여성에게 조금씩 천천히 해야합니다. “그래서 뭔데?”, “결론만 얘기해”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여성의 감성을 몇가지 읽어주셔야합니다. “아, 그때 속상했겠구나”, “그랬겠네”, “억울했겠네” 이렇게만 해도 됩니다. 당신이 잘했다 못했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억울할 순 있거든요. ‘억울했겠네~’ 이렇게만 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더러 어떤 여성분들은 자기 속상한 거 남편에게 얘기해서 풀려다가 더 화가 나서 더 싸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저래서 어떻게 저떻게 했는데.... ”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남편은 “그러면 내일부터 직장 그만 다녀”라거나, “내가 당신 상사라도 그렇게 하겠네”라고 응수합니다. ^^

 

 

 

남편은 ‘남의 편’이여서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분들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 속상했겠다’ 이것만 읽어달라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여자분은 남편과의 대화속에서 너무 소통이 안되니까, 밖에서 화나는 경우가 발생하면 남편에게 “여보, 지금부터 내가 속상해서 막 이야기를 할텐데, 절대 뒷말 달지 말고, 끝에 ‘그랬구나’만 해. 알았지?” 그러기도 한답니다. ^^

 

 

 

그런데 남자 입장에서는 ‘그랬구나’만 해서 100점 맞으면 되는데, 120점 맞으려고 ‘그랬구나’ 하고 나서는, “그런데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자세히 찾아봤어” 라고 결론내다가 도루 빵점되버립니다. “내가 그런 거 모를 줄 알아? 나도 할만큼 해!”라고 여자가 버럭 화를 내는거죠. 그럴 때 남자는 되게 억울해요. 좀 더 잘 보이려고 그랬는데, 무심하게 ‘그랬구나’만 할 때가 더 좋았으니, 헷갈리는 겁니다.

 

 

 

 

 

그런 혼돈은 우리의 생긴 구조에서, 우리 존재의 음과 양에서 이해해보세요. 두 개는 조화롭게 합일되어져야할 어떤 과제입니다. 성교라는 것도 음과 양의 에너지를 서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멋진 일이고 근원에 대한 욕구입니다.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남녀가 서로 그렇게 끌린다고 아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는 남자분들은, 섹스리스의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하면 바로 “뭘 그렇게 밝혀?”,“뭐가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으면 그런 놈하고 가서 살던가” 이러면서 크게 상처주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별 걸 다 밝힌다, 주책이다 이렇게 볼 일이 결코 아닙니다. 수련의 목표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변화입니다. 무의식의 소통을 밝혀보려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 성장에 대한 의지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소통에 성은 매우 좋은 도구입니다. 성은 생명을 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것이며, 또한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도 성에 있습니다. 제가 젊은 친구들과 얘기를 많이 나누는데, “좋아요”, “킹왕짱 좋아요” “슈퍼울트라캡짱 좋아요” 뭐 이런 표현들을 쓰더군요. 그렇게 좋고좋음을 형용하는 최고의 표현이 ‘무아지경’입니다. 무아지경이란 말이 좋음의 최고봉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아지경을 능가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소유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없어지는 경지이지요. 무아지경이, 내가 없어질 때, 최고로 즐겁다는 겁니다. 그 무아지경을 섹스의 오르가즘에서 느낍니다. 물론 잠깐 느끼죠. 오르가즘을 통해서 에고(작은 나, 거짓된 나, 아상 등등)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고,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큰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명상가는 인간이 명상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오르가즘을 겪고 나서부터라고도 합니다. 내가 사라지니까 이렇게 좋더라는 겁니다. 나를 내놓고 맡기고, 내 안에 불성이든 심성이든 도든 공이든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것이 지극의 상태임을 잠깐 느끼는 겁니다. 너무 좋은 이 오르가즘을 24시간 경험할 수 없을까해서 명상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성인들은 24시간 오르가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디 예수님에다가 오르가즘을 갖다 붙이냐고 매우 불경스럽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것은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에고가 사라진 분들입니다. 존재와 하나되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가즘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우리가 성을 추구하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 아니라, 심오하고 근원적인 현상이므로, 좀 더 깊이,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배워야 될 종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성을 천박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이고 표피에 그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촛대와 촛불의 비유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밑에 있고 근원에 있는 에너지가 성이기 때문에, 성을 공부하는 것은 근원을 공부하는 것과 아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성의학도 종합학문적 성격이 가장 강한 학문이라고 합니다. 사회학, 철학, 의학, 심리학이 결합되어야 성의학을 할 수 있습니다. 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근원적 진리를 깨우치는 수단으로까지 쓸 정도였기 때문에, 인간 본질의 저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통찰의 의미가 성 속에 많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동서양 성의학의 차이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인간의 성이란 억누를 수 없는 큰 본능이니, 억누르긴 어렵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또 가장 효율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가를 연구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어디가 성감대이고 어떻게 하면 더 좋고 이런 경우를 많이 발전시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조금 더 나아가 성관계가 남녀간 감성의 소통에 매주 중요하다는 정도까지 진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처럼 도를 닦는 수단,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수준까지는 가 있지 않습니다. 동양의 성의학은 이미 몇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성의학의 매우 깊은 영역까지 연구해왔지만, 근대에 들어 왜곡되게 잘못 이해되는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해 훨씬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2~300년전만해도, 서양에서는 동양의 성을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동양의 서적들이 성에 대해서 훨씬 잘 나와 있습니다. 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정말 깊은 영역까지 아주 거리낌없이 다루었습니다.

 

 

 

성은 서양이 훨씬 발달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성을 본능적 욕구로 인정하되, 너무 밝히고 너무 좋아하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판도라 상자를 열듯이 대충 어느 정도에서 적당히 하자~ 이런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동양에서는 끝까지 가보자입니다. 삶과 죽음의 본질 밑바닥까지 가서, 성을 어떻게 적절하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 것입니다. 서양은 성을 대할 때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어지면 안된다는. 그러나 동양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물중의 보물인 에너지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활용하면서 쓰면 된다고 합니다.

 

 

 

동양의 성의학 원리들은, 일상의 여러 사례들 속에서, 구체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충분히 검증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담한 분들 중에 이런 표현을 쓰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결혼 15년동안 내 아내의, 내 남편의 몸을 가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는 몸과 마음을 다 같이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혼 15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죽음을 같이 하는 것 같은 소통, 교류가 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부인은(매우 총명하고 야무진 분이셨어요. 직장생활도 오래하고 영업실적이 서울시내에서 항상 5등안에 들었으니 얼마나 잘하셨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빈틈을 허용치 않는 분이셨는데, 상담올 때 성생활이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생활이 바뀌고 나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참 신기해요. 옛날같으면 어느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서 남편이 간통으로 현장범으로 잡혀와있다고 하면, 택시타고 가는 내내 이 인간을 아주 그냥 가진 것 하나 없이 알거지로 쫒아버리겠다고, 죽일놈 나쁜놈... 했을텐데, 성생활이 바뀌고 3개월, 6개월, 1년 시간이 흐르다보니,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고 상상해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맘이 드는 겁니다. 이런 큰 변화가 제가 생각해도 놀라워요” 이것이 바로 죽음을 같이 나눈 것과 같은 소통, 무의식의 소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관계 중, 꽃 중의 꽃이 부부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는 근사하고, 부드럽고, 세련되고, 매너있는 사람이 집에 와선 안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집에 와선 게으르고, 폭압적이고, 폭력도 쓰고, 그런 경우 의외로 많습니다. 그 부인들의 경우는 어디 가서 자기 남편 흉보기도 어려워요. 밖에서는 모두 남편을 최고라고 평가해주니 말입니다. 밖에서 칭찬을 들을수록 더 약이 오르고 화가 납니다.

 

 

 

물론 병리적인 문제로 그런 이중성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실 필요가 있어요. 사회생활에서는 ‘사회적 나’라고 하는(심리학 용어로는 ‘페르소나’) 것이 있습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겁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그걸 벗고 싶어져요. 밖에서 가발을 쓰고 있는 사람이 집에서 잠잘 때까지도 가발을 쓰겠습니까? 집에서는 가발 벗고 홀가분하게 널부러지고 싶을 겁니다. 페르소나는 빛과 그림자처럼 같이 존재합니다. 집에 가면 자신의 그림자가 나옵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친한 사람, 가족 특히 부부간에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아도 가족에게는 대우받기 참 어렵잖아요 ^^ 저도 밖에서는 명의란 소리 듣는데 가족한테는 잘 못듣습니다. 말이 잘 안 먹어지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명의들도 자기 가족은 친구한테 보내고 그쪽 가족은 이리로 보내고 그랬답니다.

 

 

 

 

 

밖에서는 인정받는데, 집에서 원숭이 취급당하는 분들(남자든 여자든) 참 많이 있습니다. 무의식, 내 그림자를 서로 많이 봐서 시원찮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정말 좋은 사람은, 의식의 관계, 무의식의 관계를 모두 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란 나의 인격적 성장을 위한 수련의 장입니다. 배우자는 내 무의식, 내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좀전에 남편은 남의 편이어서 남편이라 했는데, 배우자는 ‘배우자’입니다. 배우려고 만난 존재입니다. 인간은 내 얼굴을 내가 못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조가 결국은 남을 통해서 나를 알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내 배우자야말로 성장의 제일 중요한 도반이고 길벗입니다. 부부관계는 놔두고, 도닦고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오겠다면, 가까운 보물을 놔두고 엉뚱한데서 찾는 격일 수도 있습니다. 아전인수격 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런 측면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남녀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구조에 대한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해볼까요? 광우병 파동이 있었습니다. 육식사료를 소에게 준거잖아요. 소는 원래 육식을 하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서양의 영양학으로 보니 육식사료를 주어 단백질로 살찌우는 것이 효율적이겠다싶었던거죠. 얼마간은 별 문제없이 진짜 그렇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놓친 것이므로, 필히 큰 문제가 따릅니다. 소가 미치게 되었지 않습니까? 소가 무엇을 먹어야하는가는 소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먹이는 이빨의 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소의 이빨은 다 어금니처럼 생겨있습니다. 곡물을 갈거나 풀을 뜯어서 갈기 좋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식동물은 송곳니가 필요합니다. 잡아뜯고 찢어갈기고 이런 역할을 할. 그런 송곳니가 소에게는 없어요. 이 존재가 상징하는 바는, 곡물을 갈고 풀을 뜯는 것입니다. 육식을 하라는 존재적 명령이 없습니다. 그걸 어겼습니다.

 

 

 

인간의 육식에 대해서도 저는 보통 인간의 치아를 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의 치아는 28개~32개인데, 송곳니가 4개입니다. 7분의 1, 8분의 1 정도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쯤 육식을 하는 것이 적절하고, 하루량으로는 8분의 7정도는 곡물로 하고 나머지를 육류로 하는 것입니다. 먼 시절이 되면 송곳니가 한 개 더 늘어날 수도 있고 더 줄어들 수도 있겠죠.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 존재의 본질은 그렇고, 진화의 상징은 이렇습니다. 이외에도 여러분들 생활속에서 구조를 보면서 본질을 항상 통찰해보고 염두에 두시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구조의 생김새를 범상치 않게 한번 보게 되면 새로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처] 2009년 6월. 성스러운 성이야기 (이재형) 강의 (1) (우리는선우) |작성자 sunwoo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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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참터를 찿아서

우리는 이미 참터를 향해 큰 발자욱을 내 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모두는 '참'에서 와서 결국 '참'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때문이다. 참터는 참살이를 이루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중장기적으론 우리모두의 삶터이어야 할 것이다. 참된 삶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지난했고 아마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치열할 것이기에 우리의 대응 또한 보다 철저함과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삶 따로 생활 따로이어선 안될 것이다. 삶의 문제 전반을 '참'으로 포괄하지 않고서 세상이 바뀌길 기대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참살이의 지름길일 것이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익히고 닦아야 할 것이 무진장이다. 해서 우리가 지금껏 살아 온 원칙과 방법보다  더욱 치열해야 하고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서두루지는 말자. 오랜시간 축적된 오염아닌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황폐한 삶의 현실은 결코 우리모두가 저지른 부산물일지니... 우리가 당장 끝장내겠다는 오만은 안된다. 열정은 갖되 한발한발 우리의 발자욱을 이어가야 한다.

 

참터는 우선 세가지 큰 목표를 갖고 출발한다. 첫째 참된 배움터를 만들자는 것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세상 모든분야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자본에 경도된 오염된 배움의 장을 바로 잡아보자는 것이다. 둘째 참된 먹거리의 생산이다. 제한된 공간이기에 많은 한계는 있지만 명실상부한 신토불이를 만들자는 것이다. 농산물은 물론 종자(씨앗)조차 해외자본에 대부분 속박되어 있는 상황이다. 몸을 건강케 하는 먹거리시장이 상업적 자본축적의 수단화되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야생초와 같은 면역력을 갖는 종자를 만들고 재배를 확산하여 신종풀루와 같은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셋째 참된 쉼터이다. 현대생활은 활동의 공간이던 휴식의 공간이던 시멘트문화 및 가공자재로 합성된 구조체가 대부분이다. 가장 많은 시간 머무는 실내공간의 실정이 이러한데 참된 휴식은 불가능하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자연그대로인 흙과 나무 또는 돌을 이용하여 자연친화적인 쉼터를 만들어야 한다. 이 모두는 참된 삶을 이루는 기초과제이다.

 

살아있는 생명들의 활동은 모두 생태적이어야 한다. 생태적인 삶의 흐름을 도외시 한채 자유, 평등, 평화를 구가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모두는 행복해야 한다.  민중들의 참살이를 해치는 세력에겐 철저하게 대응하여 빼앗긴 '참터'를 되찿아야 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우리의 열정을 모아나가자.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지속될 때 우리모두의 삶터는 참터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참터지기 일진 김명희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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