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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2

재앙은 미묘하게.

재앙은 미묘하게. 모든 화가 빵빵터졌다. 안에서는 비극이지만 밖에서 보면 희극인가보다. 하지만 진짜 남의 일은 아닌지라 연재된 모든 화를 본 이후에는 뭔가 찝찝하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죄를 짓었고 이는 4억이라는 형태로 불현듯 찾아왔다. 그리고 뭔가 과정을 거쳐서 2억은 구성원중 몇 명이 짊어지게되었고, 다른 2억은 그 사건과 상관이 거의 없는 경비할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그 뭔가는 나름 합리적이고 모두가 동의한 정당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4억중에는 나의 몫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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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7

3장

2장이 대중문화, 대량문화에 대한 반발, 적대의 귀족적인 반응을 다룬다면, 3장은 어느 정도는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시선으로 다룬다. 이러한 논의들은 앞서 이야기되었던 인물들, 메튜 아놀드와 리비스의 이론에 대한 반발, 혹은 비판을 통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귀족주의적인, 리비스적인 시선을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1. 리처드 호가드

리처드는 리비스의 황금주의와 닮아있다. 지금이 아닌 과거에서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해야 된다는(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리비스의 이론이 그 가치를 일반문화(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 이전)에서 찾았다면 호가드는 30년대 노동계층문화의 공동체주의에서 찾는다. 호가드는 이 찬란하고 공동체적인 과거의 노동계층문화의 자리에 질 낮고 허접한 대량문화가 들어섰다고 말한다.

호가드의 한계는 30년대 대중문화를 보는 관점으로 50년대 대중문화를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1930년대 노동계급의 즐거움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중요했던 대중미학은 50년의 대중문화를 비난하기 위해 서두르는 바람에 잊혀져 버렸다.

호가트의 주된 공격대상은 대중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이다. 공동체적이고 자생적인 문화가 자기 스스로 오염될리 없으니 싸구려 문화를 생산한 생산자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적으로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공동체적이고 자생적인 문화가 아직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문화의 향유자는 생각보다 영향을 훨신 덜 받았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문화가 회복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민주적인 자기 탐닉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2. 레이몬드 윌리엄즈

윌리엄즈는 문화의 정의에 세가지 범주가 있다고 말한다.

1, 리비스, 아놀드적 정의- 절대적 또는 보편적 가치

2. 문서화된 기록

 

3. ‘문화에 대한 ’사회적‘ 정의,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

이 정의는 문화를 보는 3가지 방법을 열어주었다.

 

1, 문화는 특정한 삶의 표현이다- 인류학적

2. 어떤 의미와 가치의 표현

3. 문화분석은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특정환 문화에 내재되거나 표출된 의미와 가치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

 

위와 같은 3가지 요소는 문화주의의 일반적 관점과 기본 과정이다. 이 3가지 요소는 따로 떨어져서 각각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윌리암즈는 문화분석에서 이 관계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문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감정의 구조_ 집단이나 계급,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이다. 결국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 문화분석의 목적이다.

 

이러한 문화분석의 대상은 3가지 층위위에 존재한다. 그 시대를 살고있는이 에게만 인식되는 문화, 기록된 문화,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문화. 전 시대의 문화들이 몰락하고, 윌리엄즈의 표현대로 감정의 구조가 무너지고, 기록된 문화가 남고, 그 기록된 문화는 ‘선별적 전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조각난다.

선별적 전통은 동시대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이전시대의 유산을 재발견하고 평가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엇이 고급문화이고 무엇이 대중문화인지의 기준은 당시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기에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금물이라고 말한다. 윌리암즈는 문화적 전통은 선택일 뿐만 아니라 해석이라는 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문화분석의 형태를 옹호한다.

윌리엄즈는 리비스와 다르게, 예술을 특별히 다루지 않고, 다른 문화행위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삶의 특이한 방식으로서 문화를 강조한다. 동시에 윌리엄스는 문화를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험’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부분에서 윌리엄즈는 리비스와 결별하게된다. 이 정의에는 민주주의적 정의의 기반이 있다. 결국 문화는 소수의 지도자, 선지자, 선각자의 이끄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민중들의 삶의 양식, 경험인 것이고 이 부분이 레비스주의, 아놀드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3. 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생성’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정의 _생성되는 것

예정 되있거나, 구조나 범주가 아니라 ‘경험의 살아있는 재료내에서, 또 으식 속에서 일어난 본질적으로 다르고 일견 연관성 없는 사건들’의 복합이다. 계급은 공통의 경험, 배경과 역사적 차별화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생성 기반

1. 18세기말 영국 급진주의의 정치적, 문화적 전통

2. 산업혁명의 사회적 문화적 경험

3.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강한 기반과 자의식 가진 노동계급의 제도’

 

톰슨에게 역사는 위대한 업적이나, 정치경제적 흐름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들의 가치 생각 활동 소망에 관한 것이다. 톰슨은 대중문화를 산업혁명으로 소외된 이들의 저항의 장이라고 본다. 이 책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고전적인 예인 이유는 첫 번째로 노동계급의 경험을 역사과정에 다시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계급을 의식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러하다.

 

4. 스튜어트 홀, 패디 화넬

이들은 대중문화를 다시 좋은 대중문화 나쁜 대중문화로 구분짓는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대중예술이 있고, 좋기도 하고 그렇게 좋지 않기도 한 예술이 있고 나쁜 대량미술이 있다.대중예술은 그 지위가 격상된 대량문화이고, 상업영화나 팝 음악과 달리 가장 훌룡한 영화이고 가장 좋은 재즈 같은 것이다. 사실 이 기준의 문제는 좋은 대중문화와 나쁜 대중문화를 가르는 기준이 뭐냐는 것이다.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이들의 한계이자 리비스주의를 벗어나고자하는 발버둥 그 이상은 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 논의들의 의의

각기 다른 방법들은 결국 ‘평볌한 이들의 살아있는 문화로 규정된 대중문화’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논의들을 기반으로 영어, 사회학, 역사학의 전통을 연계한 문화주의의 또다른 가설 위에서 영국의 문화연구가 시작되었다. (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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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1

~‘문화와 문명’의 전통
징후, 신호, 통제자의 관측 수단으로서의 대중문화에서 문화 그 자체로 초점의 변화.
원인_ 산업화, 도시화
1. 계급에 의한 주거분리
2. 새로운 노동관계
3. 위 2가지 변화를 기반으로 문화적 변화가 생성

대중문화는 산업중심지에 피지배층만이 갖는 분리된 문화로 시작되었다.
원인
1. 새로운 문화기업들이 영리를 위해 제공하는 문화,
2. 정치선동을 위해 정치선동 때문에 일어난 문화,
영향
1. 기존의 전통적 개념을 약화시켰고,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적 문화적 권위에 직접적인 도전을 가했다. 다른 측면으로 이는 오직 사회권위의 약화, 사회질서 불안정만을 의미할 수 있었다
2. 이는 차티스트운동의 모태가 되었으며, 벤야민 디즈레일 리가 말한 두 국가의 시작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매튜 아놀드- 계몽 계도로서 문화.
아놀드의 문화에 대한 정의.
1.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 최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
2. 문화가 도덕적, 사회적 이득을 준다는 성격,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런 지식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노력(최선 그 자체)
3.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식체계(최선의 것에 대한 정신적 영혼적 적용.)
4. 최선을 추구하는 것.

매튜 아놀드의 계몽, 계도로서의 문화의 역활
아놀드의 글에서 ‘무정부상태’와 대중문화는 동의어로 쓰인다. 아놀드는 대중문화를 무질서(무정부)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실 대중문화는 없고 무질하고 천박한 서민, 못 배운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질서한 상태, 즉 ‘파괴적, 분열적 존재(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대중,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대중들)를 계도, 계몽시키는 것이 문화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 아놀드의 주장은 계급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놀드는 사회를 귀족층(바바리아인), 필리스틴(중산층), 과서민(노동계급)으로 구분하고, 귀족층과 중산층이 노동계급에 비해 더 진화된 인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계급적 인식은 결국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귀결된다. 우선 귀족층과 중산층은 ‘이런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이끌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서민의 인간성을 가진 노동계급에게는 무질서한 경향과는 반대되는, 그리고 꼭 필요한 권위의 원칙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놀드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이는 19세기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문화를 현재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할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어려움은 양면적 맥락을 지닌다. 첫 번째로는 도시 남성 노동계급의 투표권을 둘러싼 문제이고, 두 번째로는 17세기부터 일어난 역사적 과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놀드는 이 투표권이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게 권력을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흭득한 노동계급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종과 종속의 감각을 되살려주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육이며 문화이다. 문화로서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질서한 노동계급, 무정부에 반하여 문화는 국가를 제시한다. 아놀드는 이 노동계급에게 문화를 교육할 권위를 국가에게서 찾는다. 이 주장의 배경은 첫 번째로 권위의 중심이었던 귀족층의 쇠퇴이며,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아놀드의 국가는 중산층이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문화할 때 까지 노동계급을 통제, 조절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계급주의적인 교육관
아놀드는 각각의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층에게 있어서 교육은 그들의 쇠퇴를 받아들이게 하며, 노동계급에 있어서는 종속과 복종 착취에 익숙하도록 만든다. 아놀드는 교육을 그저 문명, 문화를 향한 교두보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놀드의 관점의 모순은 문화인이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고 있지만, 그 외 대다수가 허약하고 불건전해왔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를 위해 이러한 보물을 지켜오는 것인가? 이는 아마 문화적 엘리트층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아놀드는 자신이 만든 엘리트주의라는 덫에 걸린다. 그는 현실 정치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가 거부하는 것 항의의 정치, 반대의 정치뿐이고, 이는 지배질서의 매우 고루한 방어이다. 그럼에도 아놀드적 관점은 50년대 말까지 이 분야의 대중문화와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을 말 그대로 지도해왔다.


리비스주의
아놀드는 리비스에게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결국은 리비스는 아놀드의 문화정치학을 도입하여 30년대 문화적 위기에 적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20세기는 점차 뚜렷해지는 문화적 쇠퇴의 시기이다. 이는 ‘평준화와 하향화’의 문화였고 시민이 이것들을 배척해야 된다고 말한다. 리비스의 전제조건은 문화는 항상 소수의 유지자들에 의해 지켜졌다는 것이다.
변화한 것은 소수의 위상이다. 대량 문명과 대량문화는 전복적인 모습을 뛰면서 소수의 권위를 위협한다. 이들은 대량문화가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이라 말한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교 안에서는 대량문화에 대항하는 것을 학교에서 훈련시키고, 밖으로는 활동적인 소수가 저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비스의 대중문화와 수수의 문화의 정의
일반문화가 산업혁명을 거쳐 소수의 문화와 대량문명으로 구분됨
1. 소수문화는 문학적 전통성으로만 축소된 ‘사고와 표현의 정수’의 가치로 형성. 교육받은 소수의 문화.
2. 대량문화는 ‘교육받지 않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대량문화, 상업문화로 구성.
대량문화의 효과.
1. 보상과 오락의 중독적인 형태를 제공. _연예 소설
2, 환상을 꿈꾸게 하여 현실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듬_연예 소설
3. 영화_ 최면술적 수용상태에서 허접한 감정적 호소에 빠지게함,
4. 대중용 신문 “대중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침투하는 비교육적 매체.
5. 라디오_ 비판적 생각 자체를 말살시킨다.
6. 광고 언어를 저질화 시키는 동시에 전체 언어공동체의 감정적 생활을 저질화시킨다. 생활의 기준을 낮춘다.

황금시기
황금시기는 전원속에 신화적인 과거,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문화가 공유되었던 시기이다. 이는 19세기의 문화적 몰락 이전의 시기이다. 황금시기는 문화적 통합으로 특징지워졌지만 결국 이는 위계질서적 원리에 기반을 둔다. 이 문화는 한 편으로는 지적 자극을 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감정적 즐거움을 주는 일반문화였다. 이들에 의하면 이러한 문화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리비스는 잃은 것으로서 유기적 공동체와 이를 구현하는 문화를 이야기다. 이것은 자연적 환경과 한 해의 리듬에 맞추어 기억할 수 없을 때부터의 경험에서 자라난 삶의 예술이며,........ 사회적 예술을 포함하는 질서 있고 정돈된 삶의 방식이다. 전원적 리듬의 세계는 교외거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리비스는 빈궁함과 옹졸한 폭정, 질병과 사망률, 무지와 좌절된 지식 등도 황금시대의 요소임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 리비스가 제시한 것은 역사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문화적 신화로서 그 가치와 기준들들 접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높은 가치를 햠유한 보물같은 것이나, 문화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으로서의 문학은 이미 권위를 잃고 말았다. 리비스는 이에 대항하여 문화적 선교단, 소수 지성인들로 하여금 교육을 통해 대량문화에 대해 투쟁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 권위가 확립된다 하더라도 유기적 공동체로 복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대량문화의 영향이 확장되는 것을 조절하여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계속 유포시키는 아놀드적 전통을 이어나갈 교육받은 대중을 유지하고 만들어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화, 자본화로 인한 노동의 변화.
노동의 질도 유기적 공동체의 상실에 따라 저하되었고, 이러한 상실의 신호로 여가의 필요성이 나타났다고 보았다. 황금시대에는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에서 살았지만, 현재는 노동을 벗어난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여파로 노동의 질이 너무나 떨어져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동 때문에 무능하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여가는 재창조(recreation)  가 아니라 비창조(decreation)(노동을 통해 느끼는 박탈감을 뒤겄는 것)만 가져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보상과 수동적 위안을 위해 대량문화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이는 마약과 같은 대리 인생에 탐닉하는 상습복용자들이 될 뿐이다.


미국의 대량문화 : 전후(戰後)의 논쟁
2차 세계대전이후 15년간 대량문화에 대한 논쟁.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은 자유주의, 다원주의, 무계급주의에 토대를 두고 일시적으로 문화적, 정치적 합의에 성공했고, 이는 미국 지신들의 권위에 상당부분 의존하였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은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 리더쉽의 민족적 대리인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고, 이의 기반은 대량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강렬하고 공개적인 논쟁이 있었다.

타자들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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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 대중문화란.

1.1 문화

1.2 이데올로기

1.3 대중문화

 

때중문화는 분명한 용어가 아니라 사실상 ‘비어있는’ 개념적 범주이다.

1 문화

그렇다면 ‘대중 문화’에서 문화는 무엇인가.

윌리엄스의 정의

대중문화를 말할 때 보통 2번과 3번째 정의를 사용한다.

1. ‘지적, 정신적 심미적 계발의 일반적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방식

이때 특정한 생활방식이란 해변가의 후가나 크리스마스 축제 또는 젊은이의 하위문화를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를 보통 ‘살아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실천행위라고 부른다.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_ 이는 의미하거나 의미를 생산하는 혹은 의미의 근거가 되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텍스트나 문화적 실천행위를 지칭한다. (이때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가 말하는 실천행위와 동일하다) 이를 보통 문화적 텍스트라고 부르는데 일일 연속극이나팝 뮤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대중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문화와 같이 이데올로기에도 많은 의미들이 얽혀있다.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문화분석에서 대중문화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대중문화 연구와 관련있는 의미들.

1,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에 의해 부각되는 조직적인 사고체계이다. 예, 노동당의 이데올로기, 직업적 이데올로기 특정 당의 이데올로기

 

2.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눈가림이나 왜곡, 은폐를 의미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이데올로기는 문화적 텍스트나 실천행위들이 어떻게 실제 이미지를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이는 소위 거짓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왜곡은 약자들의 이익과 상반되는 강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한다. 예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첫 번째로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의 지배의 실체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로는(더 중요하게는) 권력이 없는 자들에게도 피지배의 실체를 은폐해버름으로써, 이들 역시 자신들이 착취나 억압받는 자들로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존재하는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상부구조적 반영이나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가정이다. 이 가정에서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구성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적 산물들은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경제구조에 의해 이득을 보는 지배계층의 이해를 잠재적, 표면적으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5장에서 마르크스와 엘겔스 자신들이 이러한 공식을 어떻게 수정하였고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대중문화와 문화의 사회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기계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을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떻게 수정했는지 알아보겠다.)

 

3. 이데올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 형식을’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 정의는 어떤 텍스트가 항상 세상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인식은 사회가 합의적이라기 보다는 대립적이라는 것에 기반한다. 이 인식에서는 모든 텍스트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브레히트) 각 텍스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한다. 대중문화는 ‘의미작용의 정치’ 즉 독자에게 특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한다.

 

4. 이 정의는 알튀세르에 의해 발전된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그의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관념들의 집합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천행위로 보아야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일정한 의식이나 관습을 통해, 어떻게 부와 지위와 권력 등의 엄청나게 불평등한 요소들로 결정되는 사회잘서에 얽매이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결제적 상황과 경제적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5. 롤랑 바르트는 이데올로기가 주로 함축적인 수준에서, 즉 텍스트나 실천행위가 전하거나 전할 수 있는 이차적, 때로는 무의식적인 의미의 단계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내포 의미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어떤 함축적 의미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함축적 의미를 만들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예: 영국 보수당 정치선전방송

 

대중문화.

대중문화와 관련된 문화이론의 역사는 ‘문화’, ‘대중적인’ 이라는 두 용어가 특정 역사정, 사회적 맥락내에서 어떤 이론적 작업을 통해 다양하게 연결되었는가에 관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

첫 번째 방법은 대중문화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하는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너무 많기에 대중문화의 정의로는 실제로 전혀 쓸모없다.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대중문화에대한 어떤 정의라도 양적으로 큰 범위를 포함해야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양적인 크기 그 자체만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명백하다.

 

2.

두 번째 방법은 고급문화를 제외한 수준미달의 작품들이 대중문화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고급문화는 대중을 배제시키며 일부 특정 소수의 배타성을 확고히 해준다. 피에르부르디외는 문화적 구분이 계급구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이데올로기가 사용된다고 말한다. 이 구분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기준, 믿음에는 문제가 많다. 사실 과거에 대중문화였다가 시간이 지나서 고급문화가 된 사례나(느와르, 세익스피어),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히 넘나드는 사례도 있다.(루치아노 파바로티) 결국 이 구분의 이면에는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적, 대중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열등감을 내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차별성을 지속적으로 표시하는데 요구되는, 바로 그 제도외 제도적 과정, 그리고 그 차별성을 지탱하는 힘과 관계라는 것이다.

3.

세 번째 정의 방법은 ‘대량문화’로서 대중문화이다. 이 관점은 대중문화가 대량생산으로 찍혀져 나온 것이고 관중은 무분별한 대량 소비자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량문화의 비판자는 현재상황을 그 문화적 형태가 달랐던 황금기와 비교하는데 사실 이는 쓸모없는 낭만적 향수병이라고 피스크가 지적하였다. 5장에서 볼 프랑크부르트 학파의 경우에는 역설적으로 ‘사라진 황금기’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찾고자 했다.

대량문화라는 이론적 테두리내에서 작업하는 어떤 비평가들은 대량문화는 질적으로 저하된 복제품이 아니라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수입된 미국문화라고 말한다. 이는 영국문화가 미국의 대량생산적 문화에 영향으로 동질화 혹은 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 이야기 할 수 있는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대중문화는 유럽보다 미국에서 현저하게, 오랫동안 사회적 제도적으로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세계적으로 미국문화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그 성격은 모순된 점이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의 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문화를 영국문화 생활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해방의 힘으로 느꼈다. 동시에 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은 부상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불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또한 정치적 좌파 우파가 있는데 후자에서는 노동계급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대중문화의 유혹에 의해 위태롭게 된다는 인식이고 후자는 고급문화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다.

대량문화를 보는 온건하고 순진한 견해도 있는데, 이는 대중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이 대중적 환상의 현태로 나타난다는 시작이다. 이 견해에서는 대중문화는 ‘어디로부터 또는 어디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상적 자아도피‘이다,이는 집단적인 소망과 욕망의 가장된 형태이다. 구조주의는 대중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를 쉽게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제조기쯤으로 본다. 독자들은 이미 수동적인 자리에 갇혀 있으며 그의 역할이나 텍스트의 모순성에 대해 논란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에대한 후기 구조주의의 비판은 이 논점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4.

네 번째 정의는 대중문화가 민중으로부터 발생되는 문화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민중의 진정에서 우러난 문화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징적 저항이 주로 나타나는 곳이다. 이러한 정의의 문제점은 이 문화가 만들어진 재료, 출처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 정의를 고집한다해도, 그들 스스로 만든 재료들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문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남는다. 결국 이 재료는 상업적으로 제공된 것인데 이 접근은 이 결론을 비껴나간다.

5.

5번째 정의는 그람시의 정치적 분석, 그의 헤게모니 개념의 발전에서 나타난 것이다. 문화이론가들이 그람시의 정치 개념을 어떻게 맏아들였고 또 대중문화의 성격과 정치성을 설명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윤곽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을 채택한 이들은 대중문화를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의 투쟁의 장으로 본다. 대중문화는 이 둘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이 영역은 저항과 통합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은 그람시의 말에 의하면 타협적 평형속에서 움직인다. 이 과정은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이다.

신그람시적 관점의 주 개념은 명시화이다. 보수당의 정치방송은 이 과정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수당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정치행위를 비명시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를 명시화한다.

신그람시주의의 입장에서 제시된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사실 민중의 구성에 대한 이론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문화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이 빚어지는 장소라면,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일상생활의 형태를 구성하는 힘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써, 그 관계가 제공하는 이해관계를 알 수 있기에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8장에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기호학적으로 사용한 존 피스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6

6 번째 정의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고 이는 7장의 주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논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문화는 상업문화라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그 이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인식이 과연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냐라는 문제이다. 이는 7장에서 다룰 것이다.

7

이 모든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대중문화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뒤따라 일어난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와 대중문화에 관한 정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존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 특정한 시대구분을 뒷받침하는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대중문화의 지형에서 문화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에는 일반 문화와 엘리트 문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첫 째로 산업화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오직 현금거래 관계로 변화시켰다. 두 번째로 도시화는 계층관 주거분리를 발생시켰고, 서 번째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가 정권으로 하여금 급진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다양한 억압을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합이 일반문화에서 가부장적 사고 외곽에서 하나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는 지배계급의 영향 밖에서 대중문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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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인상적인 시, 학원가기 싫은 날

지금 이슈가 되는 잔혹동시가 있다. 이는 솔로강아지라는 책에서 처음 나왔다. 무수히 많은 잔인, 잔혹한 시들이 있고 꾸준히 출판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표현자체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이 시가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읽은 이유는 오직 초등학생이 쓴 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 시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오직 초등학생이 이런 잔혹한 말을 썼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네티즌도 그러하다. 적어도 고등학교 나이쯤 된 사람이 썼다면 섬뜩은 해도 그렇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이 문제인 것이지 시 자체가 문제가 아닌 듯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시가 아닌 모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수 많은 이들이 도덕적인 어른들 흉내나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흉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심장이 안전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시를 보는 것은 아무런 재미도 없을뿐더러 비윤리적이다. 그들이 섬뜩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시의 표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가 무언가를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짜증나는 것은 이 시가 담긴 솔로강아지가 전량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독재정부나 하던 분서갱유를 친히 민주주의(?) 시민들께서 하고 계신다. 책을 불태우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만 날릴 뿐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시는 편지나 에세이와 달라서 그 시의 화자와 작가와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그 시의 화자가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창조된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를 읽고 초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죽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소설적 인물의 가치관을 작가의 생각이라 주장하면서 싸잡아서 욕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 초등학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든 그가 시라는 형식을 선택해 썼다면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건 시이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나 회고록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라는 프레임 자체도 별로이다. 대체 동시는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이 쓴 시? 아이들이 읽는 시? 아이들을 위한 시? 아이들이 읽고 쓸 정도로 쉬운 시? 글쎄 어떤 표현도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다. 동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은 그 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될 듯 하다. 동시의 세계에는 불협화음이나 문제, 갈등은 거의 없고 있어도 바로 해결될만한 사소한 것들 뿐이다. 피망을 먹냐 안먹냐 같은 문제 말이다. 그리고 동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다분히 환상적이고 작의적이고 거짓말 투성이인 세상을 노래한다. 이렇게 동시가 하는 역할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어른의 이익에 맞게 설정된 인식을 주입하고 훈육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학원가기 싫은 날’은 전자의 프레임과 후자의 프레임 사이에 걸쳐있다. 전자에서는 어린 초등학생이 썼기 때문에 동시이며, 후자는 초등학생이 접하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가 아니다. 이 시가 파괴적인 이유는 이 두 가지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동시이면서 동시가 아닌 이 시는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동시적 세계를 파괴한다.
인터넷상에서 이 시를 평가하는 한 가지 단어는 ‘섬뜩’이다. 맞다 섬뜩한 시이다. 하지만 절대 표현이 섬뜩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시의 매력은 섬뜩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학원이 가기 싫은데 강압적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입장은 화자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아가는 다수의 청소년들, 아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한다. 관심도 없는 영단어 하나 더 외우려고 시간에 쫒겨 학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흔하다.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것이 된 것처럼. 보는 입장에서는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보편성을 가진다. 동시에 이 시의 논조는 마치 학원에 가기 싫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같다. 학원을 가기 싫다면 학원을 가게 만드는 당신을 죽이라고. 학원을 가게 만드는 원인으로 들어나는 것은 엄마지만 사실은 사회 시스템 자체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두 가지 복합적인 작용을 꾀한다. 첫 번째로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에 대한 설득, 선동이다. 두 번째로는 경고이자 선전포고이다. 자신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회에 대한 으름장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이다. 네 심장은 안전하겠냐는 서슬퍼런 경고이다. 여기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끼는 우리는 그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책을 모아서 폐기처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공포에 대한 치졸한 복수일 뿐이다.(사실 살만 루시디의 사형선고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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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5

미완

2015년 계획서

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확실히 느슨해져 있었고 일정정도 이 부분을 묵인했다. 읽는 책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질문들을 방치했다. 그 대신 잠자는 시간을 늘렸고, 자전거를 타고, 몸의 리듬을 조절하고 돈을 모으는 고민을 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동안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뭐 이 공포는 군대에서 기인한 것이고 한 동안 나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듯 하고 그닥 나쁜 놈은 아닌 듯 하니 좀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번년도 계획은 대략 3가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1. 공부.

1.1 국가

지금 나는 어떤 형태가 되었든 국가라는 거대한 틀거리에 속해있다. 제복을 입고, 깨어 있는 시간의 9시간을 여기에 속해 지낸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국가에 대해 정리하고 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자본과 국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연결되는지, 국가의 권력은 어떠한 방식으로 내 일상을 지배하는지 궁굼하다.

1.2 근대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의 대부분은 근대와 근대 이후를 다룬 책들이다. 이 질문는 내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와 관련된 질문이다. 이는 아마 나의 혼란스러움에 기인한 것이다. 도무지 이 사회에 일어나는 것들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상식의 붕괴현상이 연달아 일어나고, 이 것을 맞추어 내가 둔감해지기는 싫다.

1.3 문학

문학 작품 읽고, 정리. 좋아서 하는 일.

2. 여행, 공부

2.1 언어.

영어, 영어가 익숙해지면, 다른 유럽국가의 언어를 기본적인 것이나마 배울 생각

2.2 사회

유럽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공부.

 

3.3 장비

기본적인 자전거 정비방법 습득.

 

3. 몸.

3.1 먹는 것.

3.2 움직이는 것

3.3 알바.

해본 결과 힘듬. 계속 할 수 있을지 몇 번 더 하고 결정

 

4. 일상.  

구체적인 방법과, 이를 일상화 시키는 것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한꺼번에 확 계획해서 할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을 조금씩 바꾸면서 할 것이고, 중요한 것은 알바와, 공부의 조화와, 이 두가지를 모두 해도 부담되지 않는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구체적인 공부(국가, 근대, 여행 공부)는 빠른 시간 안에 계획표를 만들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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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4

액체근대-요약 발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고 있다. 현제까지 읽은 부분은 해방과 개인성부분 까지이다.

 

이 책에서 근대는 현대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근대가 아니라 현대를 근대의 연속선상으로 보고, 기존의 근대와 대비되는 것이 액체 근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액체 근대의 기본적인 특성이 액체성이라 말한다. 액체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유체는 고체와 달리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유체는 이른바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는다’

‘따라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유체는 고체를 마주치게 되더라도 흠집 하나 없이 유유히 모습을 다시 드러내지만, 그러는 중에 유체는 그 주변을 빙 둘러 녹이며, 빨아드리며 적신디’

 

액체적인 특징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를 특징짓는다. 근대의 태동부터 낡은 것들, 고체적인 것들을 녹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 않은가? 낡은 왕국, 낡은 귀족, 낡은 교회를 녹이는 것, 인간과 토지의 관계를 녹이는 것(인클로저)로부터 근대가 태동하지 않았는가. 유동성은, 액체성은 근대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유동적 근대성이 현재까지도 녹고 있는 것은 바로 개인의 선택들을 집단적 기획들이나 행동들과 연결시켜주던 유대관계들이다’

‘처음에 녹이는 힘은 행위, 선택이 가능한 영역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제도들이나 구조틀들, 예를 들면 한 번 구속되면 항소가 불가능한 세습 신분 같은 데에만 가해졌다.’

 

이 근대 초기의 제도, 관습, 신분은 녹아내렸고, 이 것들은 다른 형태로 주형되어 이 전의 취약한 고체에서 더 단단한 고체로 바뀌었다. 그 시대에 자유로운 개인은 그들의 자유를 이용하여 알맞은 위치에 들어가 그 속의 행동규범과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 되었다, 그러나 이 단단-해 보이는 고체마저도 이제 거의 녹아내렸다. 공장도, 가정도, 감시도, 자유를 침해하는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고, 무한히 자유로운 개인들은 중심점을 잃고 흩날리고 있다. 푸코의 원형감옥역시 녹아내렸고, 중심화된 타인은 녹아내려, 각각의 개개인들에게 스며들어 각자가 각자를 감시하는 감시 주체가 되었으며, 우려하던 1984는 헤프닝이 된지 오래이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다. 완벽히 자유로운 개인들은 동시에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중심을 잃고 흩날릴 뿐이다.

 

2, 개인성

포드주의는 고체적이고 낡은 것이다. 포드주의가 노동자의 월급을 크게 인상한 것은 경영주가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포드주의적 공장이 기반하는 것은 고정된 노동자들이었다.

‘산업현장에 노동자들을 못 박아두고 그들의 이동을 막는, 이 투명한 사슬은 코엔의 말을 빌리자면 “포드주의의 핵심”이었다.’ 노동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먄 공장이 돌아가는 것이다.

‘근대의 무거운 단계에서, 자본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만큼 견고하게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은 한 곳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것처럼 보였던 정소는 예전처럼의 고정성을 사라졌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옮겨가고 삶은 요동친다. 고정된 일자리는 사라지고, 비정규직, 인턴들이 그 자리를 메꾼다. 혹은 자본주의적 노마드가 되어 핸드폰과 서류가방, 노트북을 가지고 세계를 떠다닌다.

그렇다면 주체들을 어떠한가, 차라리 혁명적 가르침, 목적이 있었던 때는, 우리의 지표인 저 별이 드높이 빛날 때는 차라리 편하였을까? 나는 기꺼이 혁명을 향해 투신할 수 있었을까?

‘수단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무한한 자유속에서 어떠한 지향점도, 별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을 할 수 있다.’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더 많은 소비가 더 많은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별이 사라진 이후에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 더 많은 체험, 더 많은 선택을 위해 소비하고 노동한다. 기묘한 자기애, 모든 문제와 질문들은 자기 자신으로 수렴하고, 지도자가 아닌 상담자는 이에 버틸 경험들을 설파한다. 모든 죄는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업보이다.

‘따로 떨어져서 우리는 쇼핑한다’

‘역설적이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도 있는 바, 쇼핑 중독자들의 사회가 지극한 가치로 추켜세우는 그러한 자유는 그 자유가 명백히 겨냥하는 사람들보다는 이를 별로 탐탁지 않아하는 방관자들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쇼핑하고 다니는 식의 삶을 특징짓는 정체성의 이동성과 유연성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며, 자유의 배분배이다. ... 이는 불쾌감이 들고 두려운 만큼이나 달콤하고 갈망의 대상이 되는, 그리고 가장 모순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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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타인의 고통을 다시 읽었다. 

타인들에 고통에 너무나 둔감한 당신들이 원망스러워 다시 책을 펴들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시대라지만.. 그리 멀리 떨어있지도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폭력을,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몰라주나. 그래서 책을 펴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것에 금방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들이 그들에게 쏟아지기 때문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슨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함 뿐만 아니라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집적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데 정통한 사람들 ... 넌더리날 만큼 전쟁을 겪으면서 사진에 찍힌 괴로움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머지 한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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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인정:

아마 내가 그토록 인정하지 않았으나, 가장 크게 나를 구속하거나 속박하고 있던 것이 이 인정이다. 당신의 인정을 그토록 갈구 하였으나 당신에게 종속된다거나 영향 받는 것이 싫었다. 나는 완벽한 나를 꿈꾸었고 모든 당신에게 박수와 갈채를, 즉 인정을 받는 것을 항상 꿈꾸어온 동시에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는 나를 꿈꾸었다. 모순의 모순은 거짓말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고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뭐 그렇다. 담담한 인정만이 해결책이다. 사람은 인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정은 누가 하는가. 당신도 할 수 있지만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가능할까. 이 정리되지 않은 인정에 대한 질문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해 지는 것은 나는 인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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