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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만난 박경리

1994년 집필을 시작한지 25년만에'토지'가 완간되자 KBS에서 특집다큐멘터리를 기획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을 맡게 된 것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흥분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교양 프로그램 구성작가, 방송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프리미엄 중의 하나다.  

박경리를 만나러 원주에 가기 전날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매료시켰던 '토지'.  그것은 단순히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무엇인가를 품고있는 거대한 산맥이었고, 보물창고였다.  나는 물론 서희나 길상 같은 인물도 좋아했지만 원색적인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힘들고 거친 인생살이를 헤쳐가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않는 수많은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용이, 월선이, 강청댁, 임이네, 두만네, 막딸네, 윤보, 주갑이, 봉기......  선하면 선한대로 악하면 악한대로 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생생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그 소설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옆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박경리를 만나면서 나는 그가 그런 소설을 써낸 것이 당연할 만큼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25년간의 '토지' 집필은 그에게는 일종의 수행이었으며 그는 이미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당연히 그에 대한 프로그램은 객관적이고 뭐고 하는 수식이 필요없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경애와 찬사로 일관했던 것 같다.  물론 문학적으로는 엇갈린 평가와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때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나와 피디의 심정은 그저 이 노 작가에 대한 존경과 찬탄 그 자체였고, 그 까다로운 방송사의 간부들조차 아무런 시비를 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방송에서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가지고 주제넘게 그의 문학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저 이 기념할 만한 사건에 대한 보고와 우리 문학의 한 위대한 작가에 대한 치하, 그거면 족하다는데 모두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이전, 그리고 그 당시 '토지'를 탐독했고, 프로그램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완독을 했는데도 워낙이 긴 소설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린 대목이 많았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세번째로 '토지'를 드라마화한 걸 보면서 생각이 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1,2, 3권을 읽던 중 갑자기 올케가 와서 자기가 읽겠다면서 10권까지 가져가버렸고, 나는 11권, 그러니까 후반부를 다시 읽게 되었다.   간도에서 평사리로 돌아온 서희와 식민지 시대의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밀정과 변절자 등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갈등과 굴절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대하소설의 가장 큰 약점은 초반에 조성해 높은 작품의 긴장감과 밀도를 끝까지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약점을 극복한 소설로 '태백산맥'과 '토지'를 꼽는다.  조정래의 다른 소설들과 최명희의 '혼불'같은 소설은 그런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암튼 후반부를 읽으면서도 나는 역시 이 소설에 깊이 매료되었고,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의 의미를 곰곰히 되씹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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