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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으로 밑줄을.....

 


 “억새풀같이 살고 싶어서요.”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상길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데 욕심 더 안 부리겠어요.  나는 길을 걷는 게 좋아요.”

  “전도사업을 계속하겠다 그 말이오?”

  “당장은, 그렇지는 않아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말하던 그 할머니, 그곳에서 심경이 변한거요?”

  최상길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나서 물었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 할머니 사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 분은 자신의 불행까지 사랑한다고 할까, 천지만물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어요.  겨울 긴긴 밤에 목화씨를 발가내면서도 밥을 짓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뿐질러 넣을 때도,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힐 때도, 그 정성이 하나의 의식같이 보이는 거예요.  할머니 자신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말이예요.   나도 저와 같이 시간을 가득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 여러 번 했어요.  싱그런 풀 같고  흐르는 강물같이, 뭐라 설명이 안 되지만.”

                    -토지, 제5부, 4권

  


  삶이란 도판에 그려놓은 공식은 결코 아니었다.  삶의 신비는 개인이 어떤 생활의 방식을 취한든 무궁무진하며 끝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토막과 칼을 내어놓고 이것은 칼이다, 이것은 나무토막이다, 칼은 나무토막을 자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명쾌한 설명이며 가르침일 수는 있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그 한 곳에만 쏠리는 지식의 허약성, 균형의 파괴, 지감은 이범호의 오류를 그런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토지, 제5부, 5권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장롱 하나를 만들어놓고 나면 배가 고프다 했지요?  그 배고픔은 위장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배고픔이라 했소.”

  “그런 말 한 것 같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쟁이받이의 얘긴데,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설움이 왈칵 솟는다 하더이다.  왜 그럴까요?”

  “글쎄올시다... 인연이 끊어지니까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떠나야 하니까요.”

  “무슨 인연?”

  “물(物)과의 인연 말입니다.”

  “물과의 인연!”

  “그렇소.  정성을 다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연이요.”

  지감은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으로 병수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왜 그같은 인연을 맺는거요?  밥벌이나 하면 됐지.”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지감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소망 때문이겠지요.”

   “소망?”

   “예.”

   “무슨 소망?”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  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  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

  “그걸 나한테 묻는거요?”

  “지감께서도 그 절실한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한평생을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았습니까?”

  “헛 산 것이지 방황이라 하기도 민망하지요.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며 서서히 묻히면서 퇴물이 되어갔다.  그게 오늘날 조선의 소위 반가(班家)라 이름 붙은 자손들 말로가 아닌가요?  나야 세상사와 하직을 했고 천만다행, 조형은 변신하여 쟁이받이로 회생했으니.”

  가닥이 다른 말을 읊조리다가 지감은 무슨 까닭인지 씩 웃었다.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이루어지지도 않을 소망을 위탁하면 뭘 하겠소.”

  그 말은 물론 지감의 진심은 아니었다.  그는 조병수를 결코 예사롭게 보아 오지 않았으니까.  다만 지감은 말의 흐름을 탔을 뿐이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 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지난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허허헛헛....  내 자랑이 지나쳤습니까?”

  지감의 아픈 곳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 병수에게 경애심을 갖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토지, 제5부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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