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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걸기의 [호칭과 지칭, 그리고 존칭과 존댓말] 에 관련된 글.
말걸기네 지역위원회의 위원장은 말걸기의 대학 후배이다. 같은 학과는 아니지만 대략 96년 말인가 97년부터인가 함께 활동했던 일군의 무리에서 만났다. 이 일군의 무리는 서대문-마포-은평의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의 바탕이 되었다. 어쨌거나. 말걸기랑 파란꼬리는 고양시로 이사가려고 준비 중인데, 지역위원장은 섭섭한 지 다른이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이 동네에서 오빠, 언니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들인데... 가네..."
말걸기 동네 지역위원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교적 어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이 참으로 짧다.' 그러니까 상대 나이야 어떻건 간에 존댓말 별로 안 쓰고 호칭도 대체로 '동지' 아니면 '씨'다. 사람이 뻣뻣하고 오만해서가 아니고 '관계는 평등해야지'라는 생각과 그런 심성의 표현이다. 말걸기는 그게 좋다.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들이 '싸가지 없게' 느끼는 행동은 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칭에 있어서 말걸기와 파란꼬리에게는 오빠, 언니를 사용한다. 아마도 10년 전 학교에서 만난 사이라서 그런가보다. 말걸기가 다니던 학과와 단과대학에서는 선배들에게 대체로 '형', '오빠', '누나', '언니'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한테 '형' 또는 '선배'란 호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빠'라는 호칭이 갖는 부정적 요소를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아마도 여학생의 수가 남학생의 수에 비해 적지 않았고 지위의 차별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오빠' 교육이 잘 되있었거나.
이런 문화에서 함께 지냈으니 지역위원장이 말걸기더러 '오빠'라고 부르는 건 그다지 어색한 건 아닌데, 한 여성 당원이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었다고 털어놓았다. 남성의 욕망에 근접한 호칭 아니던가. 그러면서 '형'이나 '선배'라고 부르는 자기의 문화를 들려주었다. 뭐, 다 아는 얘기.
그런데 몇 일 생각해 보니까, '형'이라는 호칭에 부여한 '무성성' 혹은 '남성 욕망의 제거'가 오히려 환상이겠구나 싶었다. '학형', '학부형' 등과 같이 '형'의 쓰임새로 보아 '형'이 단지 나이 어린 남자가 그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말에 그치지 않는 게 확실하다. 선배나 나이 많은 사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존중을 표현해야 할 상대 일반을 호칭 또는 지칭할 경우에 '형(兄)'을 사용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형'을 호칭으로 사용할 경우 '형'의 '일반성'을 '무성성'의 의미로 해석한 듯하다.
면밀히 따져보면 언어에서도 '무성성' 혹은 '성의 중립'을 찾기 쉽지 않다. 특히, 호칭과 지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형'의 일반적 용법이 과연 '무성성' 내지는 '성의 중립'일 수 있을까? 오히려 남성을 지칭하는 말(man, he)이 인간(human)을 대표하듯이, 존중받을 남성 상대를 지칭하는 '형'이 일반성을 획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여성들이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오빠'라는 말이 갖는 성격-성별 관계의 확정-을 피하려다가 '형'이란 말에게 일반적 지위만 부여해 준 꼴이다. 또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인간을 대표하게 되는 언어 현상에 '투항'한 꼴이다.
'인간도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다.'는 문장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두번째 '인간'이라는 단어는 'human' 혹은 'man'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마도 'he'라고 할 것이다. 영어권 사람인 어떤 페미니즘 언어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처럼 보통 'he'라고 써야 할 단어를 죄다 'she'로 바꾸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이걸 '그녀'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의도로 단어를 달리 선택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얼마나 어색했던지(물론 그 어색함은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의 특성을 약간은 무시한 번역도 이유일 것이다).
그 어색함을 그 언어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천년 동안 여성들이 느낀 그 어색함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언어에서는 '성성'을 제거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성별이 무엇이고 간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건 어떨까. 물론, '씨'나 '동지'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비교적 사적인 관계가 섞인 경우에 말이다. '언니'의 현재 기본 용법은 손 아래 여성이 손 위 여성을 부르는 말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생이 손 위 동성을 부르는 표현이었다. 예전 용례에 성별을 교차해서 사용했던 흔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름의 현대적 용법을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언어에서 '일반성'을 가장한 '무성성'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형'이라는 말에 포섭되기보다는 아예 현재의 상식에 반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도발적이니까 어렵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멋지기도 할 것 같다. 왜냐면 호칭에 있어서 '무성성의 사기'를 고발하는 행동이기도 하니 '전복'이 아니겠는가.
말걸기보다 5살 정도 어린 한 인간은 말걸기를 '선배'라고 부르는데, '선배'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 말걸기는 차라리 '~야'로 부르라고 했건만 절대 못 고친다. '형'도 싫고 '오빠'는 더더욱 싫은 모양이던데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면 그것도 싫다 하겠지? 하기야 뭐라 하든 자기가 좋은 게 좋은 거지.
과연 뎡야핑님의 [때려도 될까?]에 관련된 글일까 싶긴 하다. 덧글에서 덩야핑님이 "소소한 불의는 조용히 참고 지나가는데"라고 했는데 그걸 보고 아래의 시가 생각났다. 좀 길지만 우선 시 한 편 읽자. 이 시의 정서는 여전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위 시는 김수영이 1965년에 쓴 시이다. 김수영은 참으로 훌륭한 시인이다. 그의 시전집을 찬찬히 읽다보면 예술이 예술가의 인생에서 어떻게 다듬어지고 완성되는지를 알 것도 같다. 요절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멋진 시를 많이 썼을 것이다. 그나저나...
*
*
지금도 <시사저널> 사건을 보면 언론의 자유는 개뿔만큼 있고, 월남 대신 이라크에 파병한 걸 보면 40여년 전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은 아니다. 그래도 방방 떠들고 다닐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꽤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40여년 전 세상에 살고 있던 김수영은 요새 사람들보다 자유를 더 갈망하고 있었을 것 같다. 더구나 불의에 대해 마구 떠들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와 파병 반대를 위하는 것과 '돼지같은 주인년'이나 '야경꾼'에게만 큰 소리치는 걸 비교하는 태도는 맘에 들지 않는다. 비계덩어리 갈비를 비싸게 파는 식당 주인에게 성을 내고, 삥뜯으러 오는 야경꾼에게 지랄하는 것은 정당하다.
말걸기는 오래전에는 택시 기사와 싸우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을 좀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00원 때문이라도 싸워야겠다고 맘을 먹게 되었다. 일부러 길을 돌아가거나 난폭(거의 폭력)운전을 하거나 무리하게 합승을 하거나 하면 지랄을 좀 했다.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승객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부당한 행위를 용인해서는 안된다.
*
식당에서 택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항의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와 관련이 있는 경우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다른 이, 특히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개입하는 것은 어렵다. 덩야핑님의 글은 그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예전에 파란꼬리랑 늦은 밤에 혜화동 동성고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술취한 남녀 커플과 술취한 남자 네다섯이 시비가 걸렸다. 한 놈이 남녀의 멱살을 쥐고 코너로 모는데 가만 두면 안될 것 같아서 말린 적이 있었다. 경찰이 와서 그들을 싹 데리고 가려 할 때 출취한 여자가 경찰한테 말걸기를 지목하며 자기를 때렸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난감했었다.
또 언젠가는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 몸을 더듬고 있길래 제지한 적이 있었는데, 그치의 어깨를 잡아 끄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된 적이 있었다. 어깨가 엄청 커서 말걸기 손에 잡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걸기가 잡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치의 몸이 움직인 게 아니라 말걸기의 몸이 그치 쪽으로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치가 말 없이 다른 차량으로 도망갔길 망정이지 "넌 뭐냐?"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디질 뻔했다.
이렇게 누군가 헤코지를 당할 것 같은 상황에 개입하는 건 겁이 난다. 자기 일도 아닌데 참견한다고 면박 받는 것도 싫다. 그래서 이런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멱살잡이 사건은 파란꼬리가 없었으며 지나쳤을 것이고, 어깨잡이 사건은 가만히 있기가 민망한 상황이었다. 말걸기가 무슨 '열혈청년'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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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권리 침해 사건들은 중요하다. 결코 하찮지 않다. 이런 사건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와 기업, 전쟁을 옹호하고 사람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처럼 역사에 남지는 않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그만한 일'이긴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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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비민주적이고 굴림하는 국가와 공무원에게는 해야 할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힘없는 사람한테만 화풀이하듯 분개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다. 힘의 서열에 따라 언제나 강자에게는 깨갱, 약자에게는 버럭.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이 '자연스러운' 태도에 젖어 있는 자신에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를 시에 담았다는 건 그렇게 살고 있는 다른 이들도 스스로의 태도를 돌아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점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윤리 덕목이다.
김수영은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와 글로 세상에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시인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훌륭하게 실천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기"를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에 비유한 것은, 다른 일이 잘 되도록 지원하고 돌보는 노동을 비하하는 것이다. 김수영은 '싸나이'로서 '대장부의 기개'나 '의사의 기상'을 펼치고 싶어 한다. 김수영의 작품에서는 시 이상으로 훌륭한 게 수필인데 그의 수필전집을 읽으면 더욱 잘 드러난다.
*
요즘 세상도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고자 하는 양반들 많다. 김수영만큼이나 '옛날' 분위기는 아니더라도 앞에 나서서 '큰 얘기'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 하고, 뒤에서 '자잘한 일'을 하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서 일상 생활에서의 노동은 빠뜨린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지닌 자는 자신을 돌보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는 노동을 하찮게 여기거나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누구든지간에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권력에 눈이 먼 것이다. 그게 어떤 권력이건.
*
*
요즘은 택시를 타도 싸우지 않는다. 별로 싸울 일도 없는 게 택시 공급 과잉으로 대부분의 기사들이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참... 안타깝긴 하다.
다툼이 있을 때 말리기도 싫다. 몸 사려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여전히 설거지, 빨래는 작정해야 할 수 있다. 그냥 쉽게 쉽게 하게 되는 날이 올란가 모르겠다.
re님의 [덧글을 안썼어야 했다]에 관련된 글.
1.
re님이 [섹스 10도^^]라는 글에 덧글을 달고선 블로그 공간에 대해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구나", "조심조심 피해다녀야지"라고 한다. 말걸기는 어떤 기분인지 알. 듯. 말. 듯. 하다.
아주 다른 가치 체계,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과 '대화'나 '소통'을 하기란 무척 힘이 든다. 단지 '생각이 다르구나' 정도라면 '갑갑함'만으로 끝이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꽤 진을 쏟아야 한다. 하지만 '가치 체계나 사고방식의 차이'가 사회적인 위계, 다수와 소수, (일말의 힘이라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서 드러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섹스 10도^^]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서 남자의 성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불쾌(그 이상이겠지)하기 짝이 없는 '유머'이다. 이런 '유머'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나는 웃겨', '불쾌한 이유가 뭐야?', '어차피 말장난이잖아' 따위로 답을 해버리면 '좌절'을 맛보게 한다. 아마도 이 '좌절'은 '쟤랑 얘기해 봐야 소용 없지' 정도가 아닐 것이다.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들이 '아랫것들'을 이리 비꼬고 저리 비꼰 '유머'를 내뱉을 때마다 편견, 차별 따위를 계속 안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각인하게 될 것이다. 그 따위 '유머'를 공개적으로 떠드는 자들을 '꼴통 새끼'로 여기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구나", "조심조심 피해다녀야지"라는 re님의 말은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웬지 말걸기가 억울해진다.
2.
사람들마다 취향이 달라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나 코메디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다. '푸하하하' 웃기도 하지만 '안 웃겨' 조롱하기도 한다. 이 정도라면 취향이 달라 반응도 다른가 보다 하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불쾌해!'라고 얘기한다면 그 유머나 코메디에는 '어떤 이해 관계'가 내재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해 관계가 내재한 유머나 코메디는 특정 상대자를 비하하거나 부정하게 표현하거나 하찮게 표현하기 일쑤다. 상대를 낮추어야 자신이 올라가니까. 그래서 권력에 대한 조롱은 항상 유머러스 했고 인기도 많았다. 힘 없는 다수에게 즐거우니까.
[섹스 10도^^]도 '유머'일까? 이를 보고 재밌다고 한 사람들이 있긴 하니 '유머' 같긴 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떤 이해 관계 때문에 그럴까? 이를 보고 불쾌해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이해 관계 때문에 그럴까?
이를 보고 불쾌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 그들을 비하했을 가능성이 높다(비하 당한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연대의식이나 윤리의식 때문에 불쾌해 했을 수도 있다는 뜻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덕목이 필요하다.
"난 너희를 비하하기 위해 이 유머를 즐긴단다."
결코, "안 웃겨?", "왜 불쾌해?", "왜 그런지 얘기해 볼래?"가 아니다.
어쨌든 이 '유머'는 '황당한 야망'을 열 개 뽑은 것이다. 자기 성욕을 채울 수 있는 여자를 골라서 그 여자를 '뻑가게' 만들고 싶은 '야망'이다.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이런 '야망'을 잘도 정리해 놓았다. 야망이 웃긴가? 그보다는 자신들의 야망을 그렇게 우습게 표현해도 좋은가? '유머'는 '유머'다와야 '유머'지.
북한이 핵실험을 했단다. 방사능 유출도 없고 안전하게 성공했단다. 남한은 진도 3.xx 지진파를 감지했고 북한의 핵실험 발표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미국은 핵실험 징후가 아직은 파악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지난 여름 이르쿠츠크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이르쿠츠크에는 '공식적'인 북한 노동자가 400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건축 기술자들이란다. 러시아, 시베리아에는 건축 기술자들이 모자라서 중국 등지에서 건축 노동자들을 '수입'한단다. 예전에 김정일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건축 기술자 '수출'에 합의해서 이르쿠츠크에서 400여 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일을 하게 되었단다.
이르쿠츠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평균 월급은 350달러 정도인데, 북한에서 온 노동자들은 월 400달러를 본국으로 송금하지 않으면 송환된단다. 그래서 이들은 하루 건축 노동을 마치고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단다. 이렇게 해서 월 450달러를 벌면 400달러는 송금하고 50달러로 한 달을 산단다.
이르쿠츠크에서 50달러로 한 달을 산다는 건, 그것도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며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밖에 없다. 싼 물건 파는 시장에서도 한달 치 먹거리를 50달러에 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삐쩍 마른 몸매로 가슴에 김일성 뱃지를 달고 다니는 이들은 러시아 경찰들도 건드리지 않는단다. 외국인을 트집잡아 삥뜯기를 일삼는 러시아 경찰들도 이들에게서는 뺏앗을 게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향보다 이르쿠츠크를 선택한다. 차라리 이르쿠츠크에서 사는 게 더 좋거나, 송환이 송환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정권이 인민들을 착취하는 이유는 체제유지이고 그 구체적이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 핵과 미사일 개발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지 통계도 잡히지 않고, 수많은 인민들이 정치적 이유가 아닌 먹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는 가난한 나라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땅 속에 방사능까지 처발라대는 것도 큰 죄악이다. 그놈의 체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군사적, 외교적 긴장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단 말인가.
핵과 미사일 개발 따위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민들 피 빨아먹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교적으로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인민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다. 나쁜 놈들아!
한반도에서 군사적, 외교적 갈등이 적절히 있길 바라고 이를 즐기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란 갈 길이 멀다. 진짜 악당 미국 때문에 더 힘들긴 하다. 그렇다고 나쁜 놈과 악당이 싸울 때, 악당에 대든다고 나쁜 놈 편들어 줄 수는 없지.
'대한민국 여권'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
세계 어느 동네를 가든 대한민국 국민이 살고 있고, 이 나라 무역규모 랭킹이 상당해서 이에 뒤지는 유럽국가들도 한바가지고, 이 나라의 주인 기업인 SAMSUNG의 상품 광고는 어느 나라 촌구석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정도면 잘 나가는 나라인 것 같긴 한데... 하필이면 이 나라 외교통상부장관은, '통상'적인 말로 'X도 아닌 듯'하다.
최근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이 발행한 여권 들고 몇 나라 돌아봤는데 '편의'나 '보호'를 베풀어 준 '관계자'는 없었다. 삥 뜯을 태세로 덤비거나 무례하기 그지없는 '관계자'만 줄창 만나고 왔다. 해당 나라의 '관계자'가 유독 예의 없는 족속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기도 한데, 위 문구를 보고서도 여행객에게 아무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게 확실하다. 이유야 어떻든.
23일(화) MBC PD수첩에서는 지난 4월에 피랍된 동원호를 취재한 내용을 방영했다. 말걸기가 확실히 세상일에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말걸기는 동원호가 이미, 벌써, 일찌감치 풀려난 줄 알고 있었다. 뉴스마다, 협상이 어렵기는 하나 잘 진행되고 있다는 외교통상부의 발표를 전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쟁지역 전문취재 프리래서인 김영미PD가 피랍된 동원호를 찾아나서는 첫 장면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4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란 건 '일개 PD가'(이 표현은 외교통상부가 PD수첩에 보낸 방영 방해 공문의 표현이다), 소말리아의 해적과 협상을 해서 그들이 납치한 배 위에서 버젓이 카메라 들고 사흘씩이나 돌아댕기며 별것 다 촬영했다는 점이다.
외교통상부는 소말리아가 분쟁지역이라 위험해서 현지에 가서 협상할 수는 없다고 하던데 김PD는 어떻게 찾아가서 직접 협상을 했지? 외교통상부는 해적과 대화할 수 없다면서 회사가 협상하라고 했던 모양인데 회사가 외교하는 곳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대한민국 밖의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아? 소말리아로 보자면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 지역별로 각 세력이 분할하고 있는 나라. 그 와중에 작은 지역을 해적이 '다스리고(?)' 있는데, 소말리아 과도정부에게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한 들 무슨 소용? 회사도 용기는 없던지 아랍에미리트에서 전화와 팩스로 협상을 하고 있더군.
해적두목 왈. 이 나라 저 나라 배 많이도 나포했었는데 돈 받고 다 풀어줬다. 동원호만 남았다. 또, 동원호의 17명의 외국인 선원 중 3명은 조선족인데, 중국정부는 이 셋을 빼내기 위해 해적과 접촉을 했었다는군. 해적이 선원 모두를 한 번에 풀어줄거라고 해서 무산되기는 했으나.
어쨌든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해적을 상대 못할 만큼 고귀한 존재시니, 해적이나 테러집단에게 붙잡힌 대한민국 국민은 장기간 억류될 운명이니 절대 잡히지 말지어다. 이미 잡혔다면? 운명이라니까. 외교통상부가 그러잖아!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권들고 외국에 나가 봐야 푸대접 받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추잡한 대한민국 관광객, 혹은 오만한 차별주의자인 현지인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들의 외교통상부는 저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군기지 반환 협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의 나라 군대를 위해 일을 하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인데 그 부처의 수장인 장관직인 찍힌 여권에 누가 대접이나 하겠나.
자기네 식구는 4개월 가까이 황당한, 그리고 무지무지 위태로운 억류 생활을 해도 주둥아리로만 협상 잘 되고 있다고 뻥치는 외교통상부장관, 미군기지 반환 협상도 알고 봤더니 거짓말로 사기쳤던 외교통상부장관이, 지금은 UN사무총장 예비투표에서 1등 먹었다고 좋아하고 있다네.
그 새끼 얼굴만 봐도 역겨워, 씨발!
홍실이님께서 [월드컵 경기장, 빈 자리를 찾아 보아요!]를 올려주심.
반가운 캠페인. 그리고 번득이는 아이디어의 캠페인.
월드컵에 맞추어 이런 걸 다 생각하다니. 오~ 멋져.
이런 걸 다 소개해 주신 홍실이님도 멋져~.
말걸기는 표 다 팔리기 전에 자리 하나 잡았다.
* 좌석번호 : S18 R26 C10
말걸기 옆자리는 누가 앉으실라나?
http://www.controlarms.org/worldcup/
* 내 옆자리의 Alex는 럭비를 좋아하나보네...
말걸기의 [월드컵, 희망은 있다]에 관련된 글.
토고의 월드컵 대표팀은 말걸기의 희망을 짓밟아버렸다. 심히 유감이다.
또한 프랑스와 스위스의 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재미 없을 경기를 펼쳤다. 유감이다.
● 대한민국은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대한민국의 월드컵 대표팀이 토고의 월드컵 대표팀을 2:1로 이겼다. 역전승의 재미도 듬쁙 담아주었다. 드라마 좋아하시는 분들 난리났다. 가나 대표팀과의 평가전 졸전으로 주춤했던 분위기는 완전 뒤바뀌었다. 대한민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더욱 열광하게 될 것이다. 고로 '정치적 이성'은 그만큼 마비될 것이다.
● 스위스 대표팀은 암울한 기운을 떨칠 수 있을까?
유럽 각국의 리그에서 간간히 보았던 그 선수들, 월드컵에서는 왜 그 모양일까?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딴짓 하면서 안 봤으면 분명 잠들었을 경기였다. 두 팀이 비긴 건 별로 아쉽지 않은데 실망스런 플레이를 보면서 두 팀이 함께 16으로 가게 될 지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스위스는 경고를 5장이나 받으면서 거친 토고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경고가 누적될 수도 있다. 한국전에서 최대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프라이 바보! 마지막 순간에 공에 손 안댔으면 경고도 받지 않고 다른 선수가 골을 넣을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리 조급해가지고.)
● 토고의 축구협회와 피스터 감독은 누구를 위해 일하나?
말걸기는 토고 대표팀이 제 기량을 발휘 못하는 건 갈등 때문이라 여긴다. 뭐 원래 능력이 고것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갈등은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다. 말걸기는 '상상'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해 본다.
토고 사회, 혹은 토고의 조직(축구협회)은 아직 '현대화' 내지는 '합리화'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토고 대표팀의 갈등은 핵심은 '돈'이다. '돈'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은 각자 챙길 돈의 차이가 크면 발생하기도 하지만 챙겨갈 돈을 정하는 절차 때문에 벌어지기도 한다.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 때문에 토고 대표팀이 시끄러운 게 아닌가 한다. 대표팀 구성할 때부터 쿨하게 협회, 감독(스탭), 선수 챙길 돈 깔끔하게 갈랐으면 본선 첫경기 전날 쌩난리치겠나?
토고 대표팀의 갈등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1승을 먹었다. 비약인가?
● 알다가도 모를 선수, 안정환
결정적 한 방! 이 맛을 아는 선수인 듯. 상대편 진영에서 패스 기회를 살리지 못해 번번히 공격 기회를 놓치더니 한 방으로 끝내네. 클럽 리그에서는 비실비실 하더니 월드컵 대회용으로는 대한민국 최고 선수가 아닐까 싶다. 2002년에도 그랬듯이. 이것도 실력이니 인정해야지.
(역시 박지성. 두 골 모두 박지성이 기회를 만들었잖아.)
(주문을 걸어야 해...)
지난 새벽 할 일 없는 말걸기는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평가전을 시청했다. 노르웨이 대표팀과의 평가전이었다. 전반 시작부터 열심히 몰입하면서 시청을 하던 말걸기는 후반 중간 언제서부턴가 기억이 없다. 진지하게 몰입을 했는데 도대체 의미없는 메시지만 방출한다면 누구나 지겨워 할 것이다. 말걸기는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왜 이리 졸립기만 했을까. 화면 안에 들어가서 축구공을 빼앗아 버리고 싶었다. 왜 이리 '개발질'만 해대는지... 노르웨이마저...
결과는 0:0. 부상으로 박지성, 이을용, 김남일, 조원희, 이천수, 이호, 박주영 등이 출전하지 못한 경기를 감안하면 실망할 경기는 아니라는 게 코칭스탭과 선수들의 입장이다. 월드컵 일정에 맞추어 컨디션을 상승시키는 과정이고 소위 2진 그룹의 경기력을 진단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기였단다. 반면 내외 언론과 팬들은 졸전이라는 평가가 많다.
월드컵 본선 조별 3경기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치르길 바랄 수는 있으나,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될 지 모르는 거라 꼭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조별 3경기를 노르웨이팀과의 평가전처럼 치르지는 않겠으나 소위 하나 둘 주전의 공백을 딛고 치러야 할 경기는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이목' 또는 '승부수' 때문에 상태도 좋지 못한 주전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올 것이다. 어느 나라 대표팀이든 보통의 운이라면 90%의 컨디션으로 경기를 치를 터인데 유독 한국대표팀만 운이 좋을 리도 없지 않은가.
어줍짢은 축구팬 말걸기는 오늘 새벽 노르웨이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희망을 보았다. 말걸기의 희망대로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서 죽을 쑤게 될 듯하다. 죽도 때로는 좋은 음식이니 산해진미가 가득한 휘어지는 밥상이 아니라고 실망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이번 월드컵에서는 조촐하게 죽을 먹으면서 이목이 다른 곳으로 주목되길 바란다.
[말걸기의 희망사항]
* 그래도 명색이 월드컵 본선인데 드라마틱한 요소는 있어야지.
(1) 6월 13일 대 토고대표팀 전적 / 한국 : 토고 = 1 : 1 무
- 전반전에 한국대표팀이 먼저 한 골을 넣는다. 승승장구. 분위기 업. 으아 16강 간다.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그러다가 후반 막판 토고가 동점골을 넣는다. 오메? 기를 쓰고 추가골을 넣으려 하나 무승부로 경기는 끝난다.
- 경기 결과는 다소 실망스럽기는 하나 경기 내용은 어쩌고. 마지막에 스위스만 잡으면 어쩌고. 프랑스도 상대할만한 팀이라는 둥. 아직은 희망은 있다 분위기.
(2) 6월 19일 대 프랑스대표팀 전적 / 한국 : 프랑스 = 1 : 3 패
- 한국대표팀은 전반전에 벌써부터 두 점을 내준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결국에 가서는 골을 넣지 못한 채 계속 밀린다. 아, 암울한 분위기.
- 후반전 중반 프랑스대표팀이 한 골을 추가하여 0:3. 말문이 닫힌 사람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채널을 돌리거나 이불을 뒤집어 쓴다. 이런 상황에서 앙리, 지단 등을 빼버리고 느슨해진 프랑스팀. 한국대표팀, 한 골 쯤은 만회해 주자.
(3) 6월 24일 대 스위스대표팀 전전 / 한국 : 스위스 = 0 : 2 패
- 모든 것을 걸자. 온국민의 포스를 모아 하노버로. 아, 포스는 가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나봐. 분위기 싸아~.
- 무슨 대형 참사라도 난 듯 TV 아나운서, 앵커 등 모든 출연진이 침통한 얼굴로 16강 탈락의 소식과 원인을 전하는 분위기. 이런 소식 맨날 틀어봐야 별재미 없을 터이니 좀만 참으면 월드컵 소식은 감감. 넘 좋아~.
* 한국팀이 16강에 탈락해도 축구가 좋아서 월드컵에 열광한 사람들은 여전히 밤잠을 설치며 중계방송을 보겠지 뭐.
* re님의 포스트 [펌] 월드컵, 이런 의견은 어떤지? 를 보면 열광하는 거리의 시민들에게 한국사회의 주요 이슈(FTA 등)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담겼다. 오히려 이것이 더 큰 정치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자발적 거리 응원단 사이에서 NO! FTA!를 외치는 시도가 나쁠 건 없다. 다만, 외치는 자들이 받을 상처가 안타깝다.
말걸기는 월드컵 거리 응원은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라 했다. 이 거리 응원의 특징은 통합, 통일, 하나됨이지 다양성의 표출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거리 응원은 진짜 페스티발이 아닌 것이다. 찐한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배타성이 무척 강하다. 그래서 월드컵 16강, 8강 진출의 기원 이외의 기원을 거리 응원에서 내비친다면 면박 받기에 딱이다. 그래서 한국대표팀이 16강에 진출을 하지 못해야 일상은 빨리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월드컵 따위가 아닌 계기로 진짜 페스티발의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NO FTA와 독도 수호, 4강 신화 재현이 함께 할 수 있는 페스티발.
말걸기의 [차라리 똑 떨어졌으면 좋겠다]에 관련된 글.
행인님의 [ [축구] 결심]에 관련된 글.
re님의 [월드컵에 대한 상상력]에 관련된 글.
re님의 ['안티 월드컵'을 검색해보니]에 관련된 글.
라디오레벨데님의 [난 붉은악마가 아니다!!]에 관련된 글.
레이님의 [월드컵에 대한 기억과 움베르토 에코의 유머]에 관련된 글.
엊그제(5/26) 한국의 월드컵 대표팀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렀다. 나도 밥 먹으면서 열심히 봤다. 이번 평가전을 보면서 축구와 월드컵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하는 일 없는 2월부터 밤에 축구 중계 방송 보는 재미로도 살았다.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유럽 리그,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많이도 구경했다. 처음엔 시간 때우기용에 가까왔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땜빵용 TV프로그램으로 적당한 게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29인치 TV 화면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쬐금한 공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졸음도 솔솔 찾아오고 꽤 괜찮은 프로가 축구 중계였다.
이렇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축구 중계가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클럽 축구가 왜 재미있는지 몰랐었다. 그러다가 클럽 축구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축구의 문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왜 저 자리에서 저러고 있을까? 그들의 의도와 공의 향방은? 분명 여러 가지일 축구의 전략-전술을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 '축구의 문리'를 약간 틔였다.
클럽 축구를 보기 시작한 최근을 제외한다면 지난 4년 동안 축구는 내게 그다지 흥미를 주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국가대표 대항전, 즉 월드컵을 포함한 각종 국제 대회나 평가전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국민정서'(이건 우파들이 보통 쓰는 말이고 빨갱이들은 '국가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 따위의 말은 더 좋아한다)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 내가 주변 인물 중에서는 상당한 리버럴리스트에다가 아나키스트이기는 해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나의 뇌세포에 쌓여온 '국가와 민족'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게다. 어쨌든 국가 대항전은 축구의 문법이나 경기의 흐름을 즐기기보다는 결과에 집중하게 하고 무척 자극적이다. 그래서 나도 국가 대항전에 관심을 가졌었고 약간의 흥분도 했었던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어느 팀을 응원할까를 고민했었다. 선전할 만한 팀을 물색했다. 그냥 잼나게 경기할 만한 팀을 찾았다. 그 당시도 각 언론사들은 대회 전에 각 대표팀에 대한 리뷰와 분석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는 팀이 폴란드팀이었다. 브라질팀 같은 팀은 응원 안해도 잘 할 테니까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폴란드팀-한국팀 경기를 당시 이문옥 선본(파견 중) 사무실에서 운동원들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꺼리낌 없이 폴란드를 응원했다. 옆에 있던 이들은 장난인 줄 알았다가 진짜인 줄 알고선, "어? 정말? 그게 돼?" 반응. 결과는 폴란드팀이 한국팀에게 0:2로 패했는데, 한국팀이 경기를 무척 재미있게 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날로 응원팀을 한국팀으로 바꿨다. 8강전까지 잼나게 봤다. 4강전은 결코 4강이 되어서는 안되었을 독일(넘 잼없어)과의 경기라 별로였다. 그리고 터키팀과의 3-4위전은 축구경기라기보다는 '위문공연' 같아서 이전만큼 응원도 안했다.
한국팀-미국팀 경기는 비 오는 날 시청 근처 음식점에서 보게 되었다. 선거운동 하지 말자고 말렸거늘 일단 시청광장으로 나가라고 해서 우르르 나갔다가 분위기 아닌 거 알고 광장 스크린을 잠시 지켜 보다가 음식점에 들어가서 요기하면서 축구를 보았다. 그때 정말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집단 광기'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음식점 홀 가득 빨간티 사람들이 가득했고 방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방에 앉은 우리 일행은 Be The Reds!를 입고 있지 않았는데 그 분위기가 무서워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티셔츠는 일행 중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왕창 얻어온 옷이었다. 얻어오지 않았다면 우린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한국팀-스페인팀 경기는 또 다른 경험을 주었다. 친구가 마포 모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딱 이 경기와 겹친 것이다. 예식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축구 중계를 틀어주었다. 예식이 진행되는 잠깐 동안은 예식을 중계했다. 큰 홀에서 식사를 하면 결혼식과 빅매치 중계를 보는 것도 유별난 경험이었다. 결혼식을 마치면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 한 잔 하기 마련이라 한국팀-스페인팀 전이 끝나고 신촌으로 나왔다. 마포에서 택시 타고 왔는데 신촌로터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려야만 했다. 어디서 쳐박혀 축구 보던 인간들이 다 뛰쳐 나와 그 넓은 신촌로터리를 다 메워버린 것이다. 예전에 데모대에 끼어 신촌로터리를 가득 메웠던 경험이 떠올랐다.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길거리에 뛰쳐나와 소리지르고 돌아다니는 건 짜릿한 경험일 것이다. '해방감'이란, 다른 데서 먼저 경험을 했었던 나같은 이들나 그런 경험이 없던 그 누구나 필요한 감정이기는 하다.
어쨌든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분위기는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파시즘에 가까운 '광기'와 억압된 몸짓을 풀어준 '해방감'의 이중성이라고나 할까. 이런 저런 분석도 많았지만 가장 황당한 주장은, 한국팀-미국팀 경기에서 한국팀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이라며 나름대로 진지하게 설파했던 그 누구의 글이었다. 반제국주의 감정에 대한 선동이라고나 할까. 국가 대항전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겠다면, 그리고 축구 매니아로서 팀 구성원들 때문에 특정한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면, 죄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가장 좌파답다고 자신하는 자의 누구보다도 우파적인 주장이었다.
월드컵은 국가 대항전이다. '국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경기를 하는 것이다. 국가를 배경으로 한 경쟁이 과연 '국민정서', '국가이데올로기' 따위와 멀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자신과 가깝거나 관련 있는 팀의 승리와 쾌거를 간절히 바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고 관심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배려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나'를 제외한 모두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 기대도 다르고 태도도 다르다. '적'은 없더라도 감정이입이 되는 대상은 있기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한국팀을 응원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와 가깝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축구에 열광하는 한국 사람들이 실제로는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야구의 경우는, 기업이 도시를 배경으로 팀을 만들고, 이렇게 만든 팀들이 리그를 구성했다. 성공을 거두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야구장을 메우고 각 팀과 선수들의 기록을 줄줄 외운다. 물론 각자 응원하는 팀이 있다. 축구의 경우는, K-리그는 여전히 썰렁하다. 스타 선수의 반짝으로 어쩌다 매진된 경기가 있기는 하지만 축구경기장을 왠만히 채우지도 못한다. 아마도 각 축구팀의 서포터즈로 자처한 이들이라든가, K-리그의 중계 방송을 즐긴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분명 축구의 매력에 홀딱 빠진 사람들이 맞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민들 중에는 소수인 것도 분명하다.
자신이 사는 도시의 축구팀(사실 기업의 축구팀이라 해야겠지)도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국적을 부여한 '대한민국'의 태극마크가 붙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한국 대표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축구에 대한 애정/관심 따위보다는 '국가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거나 '국가 간의 대결'을 즐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은가 싶다. 서울 사람들의 대부분은 FC서울의 경기에는 관심도 없지만 한국팀 경기는 꼬박꼬박 놓치지 않고 응원하는 서울시민들은 적지 않다. 축구에서 한국팀은 '자랑스런 나의 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뭔가 자신과 끈으로 이어진 팀. 기업이 만들어 놓은 팀은 고장팀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축구협회가 구성한 팀에는 감정이입을 한다. 축구는 '국민정서'를 끄집어내는 도구로 변신한다.
'국민정서'를 끄집어내기에, 확 끄집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월드컵이 되어버린 것 같다. 독도 문제 따위도 아주 좋은 수단이긴 하지만 국제정치 지형이라는 변수가 많이 작동한다. 이에 비해 월드컵은 정기적이고 체계도 잘 잡힌 국제대회이니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올림픽과 달리 복잡하지도 않다. WBC나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보다 규모도 크다. 확실한 한 판 승이 짜릿하기도 하다.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내는 월드컵은 모든 걸 묻어버릴 만큼의 강한 애국심을 불러낸다. 월드컵에서의 어떠한 결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향력을 한국 사회에 미칠 FTA 따위도 애국심으로 가려진다.
애초에 축구에 관심이 없거나 싫은 사람, 월드컵이 싫거나 국위선양, '국가의 부름'이 싫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런 배려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기업과 언론도 비난받지 않는다. 다수와는 다른 감성의 소유자들은 소외되는 월드컵이다.
이번 월드컵은 내게 가장 시큰둥한 축구경기가 될 듯하다. 소외시키는 공모자가 될 것이냐, 괜한 생각에 내심 관심은 있으면서 즐기지도 못하는 소심쟁이가 될 것이냐.
P.S. 그리고, 한 가지 더. 스위스와 코트디부아르의 평가전을 보았는데 수준이 다르더만. 제발 이변은 없어다오. 똑 떨어지길...
re님의 [호칭]에 관련된 글.
리우스님의 [호칭에 얽힌 얘기]에 관련된 글.
1.
사람들은 가끔씩 지칭을 호칭과 구별하지 못한다. 지칭과 호칭의 형태가 동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헷갈릴 법도 하지만. 보통 권위 있는 인사를 지칭할 때, 'ㅇㅇㅇ대표님', 'ㅇㅇㅇ의원님', 'ㅇㅇㅇ위원장님' 따위를 '~께서'와 함께 존칭으로 사용한다. 말걸기 같은 싸가지가 바가지인 새끼가 'ㅇㅇㅇ대표', 'ㅇㅇㅇ의원', 'ㅇㅇㅇ위원장'으로 '님'자 떼고 '~이/가'와 사용하면, 어떤 덜떨어진 것들은 진짜루 "싸가지 없는 새끼" 취급한다.
내가 아무리 되먹지 못한 놈이어도 권영감 앞에서 "어이 권영감, 잘 지내나?"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게 있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분 상하게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권의원님, 안녕하시지요?"라고 한다.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과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지칭은 다르다. 상대방을 부르는 건, 나와 상대의 관계에 따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할 지 그 태도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제3의 인물을 언급할 때는 그냥 그 사람의 이름, 이름에 직위를 붙여서 말하면 된다. 다만, 상당히 저주하고 싶은 대상에게만 '~새끼'라는 말이 붙듯이 존경과 권위를 담아 표현하고자 한다면 '~님'자를 붙이기도 한다. 이러고 싶다면 맘대로 해도 되는데, 남에게까지 존경과 권위를 담아 표현하라고 한다면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지칭에서 지나친 존칭은 권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칭에서의 존칭은 주의해야 한다. 할머니 앞에서 '아버지께서' 따위를 사용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즉,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에 대한 존경과 권위를 표현하는 게 웃기다는 거다. 이건 꼭 가족 관계에 한정할 건 아니다. 요즘 세상이라면 사회적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대변인실에서 'ㅇㅇㅇ대표님께서 ㅇㅇㅇ라고 말씀하셨다' 따위의 브리핑은 오만과 불손의 표현이다. 소위 유권자들한테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존경과 권위를 표현해달라는 듯 전달된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제발 그런 표현 쓰지 말라 해도 말을 안 듣는다. 이런 게 진짜 싸가지 없는거다.
하여튼 운동권이 더 권위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ㅇㅇㅇ대표님께서', 'ㅇㅇㅇ의원님께서', 'ㅇㅇㅇ위원장님께서'... 으, 지겹다.
2.
나는 말이 짧다. 나보다 왠만히 나이 먹지 않고서는 나한테서 온전한 존댓말 듣기 어렵다. 나는 유독 나보다 나이 많은 인간들한테 말이 짧다. 존댓말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위계이기도 한데,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 것이 나를 아랫것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네가 짧으면 나도 짧다. 하지만 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특히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일수록 존댓말을 쓴다. 그 사람 입장에서 나에게 반말을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말을 놓을 만한 관계라고 생각할 때 말을 놓는다. 사적인 관계이거나 다분히 공식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말을 놓아버리면 나도 반말로 간다. 반말은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위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게 어려운 문제인데, 친근감으로 위장한 위계 강요가 있다. 상대방이 자기한테 말 놓기 힘들 걸 알면서 자기는 친근감의 표현이라며 말을 놓은 경우가 있다. 할배들한테는 봐주지만 대충 봐서 아저씨면 같이 말을 놓아버리는 습성도 필요하다. 자주 이러면 '싸가지 없는 놈', '원래 그런 놈'으로 여겨져서 오히려 갈등도 피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지나치거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존댓말 쓰는 경우는 네 가지 정도이다. ①존댓말을 안 쓸 수 없는 어른, ②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에게 존댓말 쓰는 사람, ③공식적인 관계 중심으로 만나서 말 놓기 좀 애매한 사람, ④존나 싸가지 없는 새끼. 특히 ④번의 경우는 '~습니다', '~습니까' 따위로 아주 공손한 표현을 사용한다. '너 같은 새끼랑은 사적인 관계는 없어'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반말을 쓰기 어려워 한다.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어 한다. 사회적 관계가 평등해질수록 존대의 표현은 적어진다.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한국어에서 존대는 4등급이었다. 지금은 '~요'의 확장으로 거의 2등급으로 바뀌었다. '습니다' 따위는 존대도 있지만 공식적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꽤나 바뀌었다. 여기서 쭉쭉 나가서 사람들 사이가 평등해지면 다 반말만 쓰게 될거다. 반대로 반말 많이 쓰면 관계도 평등해지는 면이 있다. 일단 개기기 쉬워지니까.
3.
존댓말-반말을 어떻게 쓸까보다 어려운 게 호칭이다. 나는 '오빠'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다. 그럴 관계가 없으니까. '형'이나 '누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배웠다. 어려서부터 형이랑 누나랑 살았으니까.
'언니'라는 표현은 호칭과 지칭으로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당 정책위에 '목언니'가 있는데 누군였는지 먼저 '목언니'라고 부르더니 다들 '목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손아래 누이가 손위 누이를 부르는 '언니'와는 사뭇 다른 의미이다.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닌, 불리는 사람의 지위를 담는 말로 보인다. 여기서 '언니'라 함은 당 정책위 사무실에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여성을 칭(호칭 및 지칭)하는 말이다. 목언니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목언니'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는 하대보다는 존중의 느낌이 강하다. '목언니' 말고 '강언니'도 있다.
홍미로운 건 이런 호칭(및 지칭)이 남자를 부를 때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개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아무개형'이란 호칭이나 지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형'은 대체로 관계만을 담는다. 그래서 '형'이란 호칭을 쓰는 어떤 경우는 문제 있는 관계일 수 있다. 남자가 남자를 '형'이라고 부를 때, 진짜 형이니까 그러기도 하고 정말 사적으로 친해서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공적인 관계도 갖는 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형'이란 표현은, 남자들끼리 '형-아우'라는 '마초동맹'이 형성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이가."
얼그러진 인간 관계 때문에 애초 가족 관계에서 파생한 호칭('언니'는 애초 가족 관계에서 나온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렇게 쓰인다)은 그 맥락과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언니'가 비하의 의미로, '오빠'가 여성을 포박하는 의미로, '형'이 마초동맹의 의미로, '누나'가 야릇한 불륜의 의미로 쓰인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관계에 빗댄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호칭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려운 것이다. 이 어려움도 모르고 정신 못차리는 인간들은 싸가지 없이 막 불러댄다.
어쨌든 이런 어려움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님', '~씨' 따위의 표현이다. 무성적이고 나이 관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호칭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님'은 PC통신 시절부터 많이 쓰이기 시작해서 지금은 인터넷에서나 기업이 손님을 부를 때 널리 사용한다. 블로거들도 아마 '~님'을 선호할 듯하다. '~씨'는 함께 일하는 공간에서 널리 퍼진 듯한다. 그런데 문제는 직위가 낮아서 직위명이 호칭으로서 뽀대나지 않는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하게 되어 하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호칭이라는 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으면 좋으니 사람들은 직위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공적인 관계에서는 무난하다. 하지만 직위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건 권위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특히, '직위+님'이 호칭으로 쓰일 때 그렇다. 그냥 직위만 호칭으로 부를 때는 권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직위만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에도 듣고 있는 제3자의 입장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다. '자리'라는 것 자체가 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말을 놓을 수 있는 관계라면 'ㅇㅇ아', '야'로, 존댓말을 써야 하는 입장이라면 'ㅇㅇ씨'로 불리는 게 좋다. 'ㅇㅇ님'은 너무 존대하는 것 같아 부담된다. 직위를 호칭으로 불릴 때도 가끔은 어색했다.
참, 남을 부르고 내가 불리는 것도 힘들다. 뭐가 우리들 사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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