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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하돌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마을버스를 탔는데

장애인센터 다니는 회원분이 앉아계셨다.

처음엔 몰랐다.(내가 모르는 얼굴이라)

나는 맨 뒷자리에서 두번째에 앉아있었는데

맨 뒷자리에서 첫번째에 회원이 앉아있었고(자폐성 장애가 있는 듯)

맨 뒷자리에는 젊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한참을 오다 보니 여성이 "왜 이래~!" 했고

얼른 뒤돌아보니 센터 회원이 그 여성을 보며 웃은 거다.

나는 처음 보는 회원이었지만 용기를 내어서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회원은 앞을 보았다.

차안의 사람들도 나를 보호자로 생각했는지 조용해졌다.

그렇게 잘 오는 듯 했는데

장애인센터에 도착해서 마을버스에서 내리려는 순간

그 회원이 일어서더니 뒷자리 여성의 허벅자에 얼굴을 묻은 거다!

그 여성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회원의 몸을 떼어내고 여성분에게 죄송하다고 사과 했다.

솔직히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얼른 내렸다.

 

 

 



99년에 이 곳에는 두 채의 양옥집이 있었고 장애인센터만 살고 있었다.

마당엔 꽃도 있었고 개도 두 마리나 키웠다.

공간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잘지냈었다.

그러다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가 세들어있던 고시원이 철거될 위험이 처해지자

상도동 쪽에 새로이 건물을 지으려했지만 주민들이 도로를 막아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주민들은 말했다고 한다. "저기 꽃동네 같은 데 가서 살아라"

 

결국 우리가 살고 있던 장애인센터 건물을 허물고 5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각각 다른 곳에 있던 위기가족 공동체 살림터와 청소년쉼터' 행복한 우리집'이 함쳤고

그 돈으로 건물을 지었다. 많은 분들이 후원해주었고 모자라는 돈은 대출도 했다.

건물을 지을 때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장애인센터가 주민들에게 어필한 게 있어서(사람들이 착하다....등등)

모두가 반대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곳은 섬같은 존재이다.

 

쓰레기를 치우고 간 날은 항상 주인을 알 수 없는 음식물 쓰레기가 널려있다.

이 곳엔 사람들은 많이 살지만 살림집은 많지 않다.

3,4층 살림터 분들은 공동취사를 하기 때문에 쓰레기 불법투기를 할 일이 없다.

쓰레기봉투 값을 아끼려는 동네사람들이 슬그머니 집앞에 갖다놓는다. 

아침마다 장애인센터 회원들은 청소를 한다.

나는 가끔씩 분이 나서 CCTV를 달자고 해보지만 센터 선생님들은 그냥 웃는다.

 

이런 상황에서 센터회원의 행동은(그의 이름을 제이라고 해보자) 위험하다.

우리는 언제든 쫓겨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이른바' 혐오시설이기 때문이다.

<봉천9동>을 찍어서 장애인센터 회원들이 신문에 났다.

동장이 전화를 했다. "왜 동네이름을 써서 집값 떨어지게 하느냐?"

동장의 의견이 아니라 한 주민이 그랬다며 영화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MB정부는 장애인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정부의 기준은 딱 하나다.'능력있는 사람에게는 살 길을 열어준다'

이제 장애인보호작업장도 일정정도 생산성 있는 곳만 살아남을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보호책을 내세우지만

그곳 또한 '기업'이라는 본질 때문에 기본적인 생산성을 담보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보호작업장도 좀더 경증의 장애인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좀더 경증, 좀더 경증.....

갈수록 장애인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은 더 슬프다.

비슷한 장애정도를 가졌더라도 교육받은 이들은 좀 낫다.

많은 부모들이 집에서 끼고만 있다가 몸집은 커지고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장애인센터에 머물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하지만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집 앞 도로에 드러누워서 "죽여라" 하고 있었다.

그 분은 잘생긴 아들이었고 부모들은 오랫동안 기대를 가지고 오냐오냐해왔으며

그 분은 자해를 통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켜왔다.

5미터 높이의 축대에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지겠다"라며 센터 선생님들을 협박하던 날

센터 선생님들은 너무 위험해서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한다.

 

그날 그 회원의 어머니는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라 아들을 데리려온 것이었다.

수많은 시설에서 쫓겨나고 쫓겨나고 쫓겨난 그 회원은

또 쫓겨나는 줄 알고 집에 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자기 몸을 던져가며 버텼고

결국 센터는 그 회원을 퇴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단다.

부모들이 교육시키지 못한 몫을

학교도 아닌 보호작업장 이 곳에서 감당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제이라는 회원은 여러 번 마을버스 안에서 여성들에게

성추행이라고 이름붙일만한 행동을 해왔다고 한다.

내가 목격한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행위들이 잦을수록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센터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자폐성 장애 자녀들의 부모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갈 데가 없다고 한다.

작년 미디어교육을 하면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자폐성 장애인과

그냥 집에서 데리고만 있었던 자폐성 장애인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며 우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진 못해도 같이 울고 싶은 적은 많았다.

아이보다 더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힘들더라도 자신 아닌 누군가와 함께 머물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제이의 부모는 제이가 그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절대로 '성추행을 할만한 애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180cm가 넘는 거구이고 멀쩡한 얼굴을 가졌다.

그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성인 남성일 뿐인 것이다.

누구도 그 사람의 태도를 장애라는 이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제이가 왜 그러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유와 무관하게 그는 성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처음에 나는 제이의 웃음에 대한 그 여성의 반응을 보고 착잡했다.

제이가 그 여성의 허벅지에 무릎을 묻기 전까지 복잡한 심정이었다.

지적 장애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반가워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보낸다.

세상에 대한 경계가 없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처음, 제이도 그런 거라고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항상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 또한 그렇게 20대를 지나왔다.

거구의 남성의 웃음은 분명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제이의 장애를 얘기해줘야 하나 말아야하나....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

갑자기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여성의 맨 살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센터 선생님들이 한숨을 쉬었다.

주의를 줘도 혼을 내도 말이 가 닿지가 않는다.

출퇴근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든지

결국은 퇴소를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99년,처음 장애인센터 촬영을 시작할 때

이 곳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남편은 센터 회원들과 평생을 같이갈 방법을 찾으며

특용작물 재배도 알아보고 세차사업도 알아봤다.

하지만 민간사업자로서 남는 것은 빚 뿐이었다.

기본적인 생산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장애인고용장려금은 반으로 삭감되었다.

결국 10여년 동안의 실험과 노력을 포기하고 보호작업장이 되었다.

 

보호작업장이 되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보호작업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산성을 담보해야 하고

2~3년 주기로 회원들이 교체되어야 한다.

 

이제 이 곳에서는 평생 함께 가야한다는 말을 쓰지 못한다.

<친구-나는 행복하다2>의 클라이맥스는

"그래도 함께 가야지요.가족인데"라는 엠의 말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제 그런 감동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곧 떠나야만 하고 또 새로운 이들이 머물 것이다.

그렇게 이 곳은 누군가에게는 정거장처럼

또 누군가에게는 섬처럼

그렇게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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