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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고 싶은 아름다운 이 길

함께 걷고 싶은 아름다운 이 길
새 기획연재 [육아일기 '아이가 희망이다' 류미례 편 ①]
 
새 기획연재 [육아일기 '아이가 희망이다' 류미례 편 ①]
저출산 대책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르면서, 젊은 부모들의 좌우충돌 양육 현장을 릴레이 ‘육아일기’형식을 통해 소개해 출산과 육아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류미례 감독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99년 영화 ‘동강은 흐른다’의 조연출로 2002년 제27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중편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년 서울 여성영화제 옥랑상, 2004년 서울여성영화제 본상을 수상했다.
 
류미례 감독

며칠 전 사무실로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이 찾아왔다. 그녀는 최근 임신을 했고 그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었다. 마침 점심 때라 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제가 지금요 임신하고서도 작업 잘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중이예요” 라고 말했더니 다들 웃었다. 남성들이거나 독신여성들 뿐인 사무실에서 아기엄마는 나 혼자 뿐이다. 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던 2000년에는 세 명의 임산부가 더 있었다. 사람들은 축하의 말과 함께 “너네 좀 이상하다”며 웃음을 보냈지만 우리들은 함께 행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푸른영상 사무실에 아기 엄마는 나 혼자 뿐이다. 함께 했던 그들은 현재 모두 전업주부가 되어있다. 내가 서있는 이 길을 지금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걷고 있다.

나는 독립영화인이다. 비디오로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결혼이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이 직업인 여자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정신지체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 때의 나를 가끔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 생각이 없었거나 정신이 없었거나…. 아니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용기백배해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번째 영화 만드는 중에 한 임신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나 내 친구들의 엄마에게 우리의 존재는 남편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학창시절엔 대학을 보내기 위해 공부만 시켰고 대학 졸업 이후에는 학교가 직장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들은 엄마의 정성을 먹고 자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차려진 밥상이 있었고 옷장을 열면 세탁된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내게 생애 최초의 좌절을 느끼게 했다. 나와 똑같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왔을 남편은 결혼을 하자 내게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했다.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할 정도로 남편은 무뎠다. 아니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가 말이 통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임신을 했다. 내 나이 서른의 일이다. 나는 그 때 내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은이와 한별이. 한별이는 하루 종일 잘 자다가 하은이가 놀이방에서 올 시간이면 깨어난다.


스물여덟에 시작한 다큐멘터리. 늦깎이로 들어선 그 길에서 나는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임신은 기쁨만큼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푸른영상의 다큐멘터리들은 1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획, 구성, 촬영, 편집의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야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막 기획을 끝낸 내 영화를 접을 수가 없었다. 계획대로 진행했고 영화의 완성과 아기의 탄생은 아슬아슬하게 일치했다. 작업 막바지, 부른 배를 안고 촬영을 하고 있으면 내 영화의 주인공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뱃속의 아이가 보낸 신호 "엄마 너무 불편해…"

정신지체인으로 분류되는 그들. 그러나 내게는 그저 조금 다른 친구일 뿐인 그들은 봉천동 비탈길을 함께 걸으며 내가 넘어질까 봐 걱정을 해주었다. 촬영보다 힘든 건 편집이었다. 만삭의 임산부에게 운동은 필수적이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예정일을 걱정하며 나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전자파 차단 앞치마와 동전으로 무장을 하고서도 나는 아기한테 미안했다. 틈틈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편집 작업에 몰두하느라 운동할 시간을 놓치면 아기는 배속에서 꽁꽁 뭉치는 것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엄마, 너무 불편해. 몸 좀 펴주세요’

2001년 7월 5일. 첫 아이 하은이가 태어나던 날이다. 그 즈음의 스트레스를 잊을 수가 없다. 랜더링(편집명령어를 컴퓨터가 실행하는 과정)을 걸어놓고 집에서 잠깐 눈을 부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다운되어있는 컴퓨터. 출산 전에 마치지 못하면 영화는 엎어지는 것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와의 씨름으로 지쳐가면서 나의 스트레스는 아기한테까지 영향을 미쳤다. 7월 5일 새벽 6시. 양수가 터져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아기가 태변을 보았다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기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변을 보기도 하는데 아기가 태변을 먹게 되면 정신지체장애를 갖게 될 확률이 크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두말없이 수술에 동의했다.


"아가야 내게 와 줘서 너무 고마워"

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두고두고 미안하다. 마취과 의사를 따라 수를 세다가 정신을 잃었다. 걱정스러운 엄마의 얼굴이 마취에서 깨어난 내가 처음 만난 모습이다. 그리고… 아기를 만났다. 사랑스러운 내 아기.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자주 내 아기를 상상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서도 기대감이 컸던 그 시간들. 그런데 처음 본 아기 얼굴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아기처럼 친숙했다.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머물러있던 꽃 한송이가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전의 나는 막내였던 탓인지 아기들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그 연약함이 두려웠다. 안기조차 겁이 나던 그 연약한 생명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열 달을 한 몸에 머물면서 아기는 문득 나와 함께 있었고 가끔씩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내게 와 줘서 고맙다. 고맙다, 아가야”
 
2001년 7월 5일 태어난 하은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는 자주 내 아기를 상상했다. 그런데 처음 본 아기 얼굴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아기처럼 친숙했다.

나의 아기는 장미꽃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배냇짓을 했고 가끔 웃기도 했으며 재채기도 했다. 그 작고 연약한 생명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충만감을 주었다.

조그마한 입으로 젖을 빨려고 낑낑대는 그 어린 생명은 살아가는 게 유일한 할 일이었고 나는 그 애를 책임져야하는… ‘엄마’였다. 마취가 풀리자 그 아픔은 엄청났지만 나는 내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했다. 탄생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무기력하게 몸을 열어야했던 나. 갑자기 엄마의 몸이 열려서 내 아기는 얼마나 놀랬을까? 나는 그 미안함 때문에라도 젖을 꼭 먹여야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젖을 빨고 힘을 꿍꿍 주며 응가를 하는 아기는 정말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나도 열심히 살고 싶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움직여야했다. 며칠 동안 누워만 있다가 내 힘으로 침대에서 내려와야 했을 때 그 첫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럽다고. 이 고통을 다 겪어내면서도 따뜻하게 웃고 넉넉하게 즐거울 수 있었던 선배 엄마들이 위대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엄마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류미례 감독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 '22일간의 고백' 조연출로 다큐작업을 시작했으며 2002년 '친구-나는 행복하다2'로 제27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중편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년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 2004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하은이와 한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게시일 2006-01-10 14:1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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