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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릴 문화를 뺏지 말라

6월 5일 인권영화제. 며칠 전부터 우리 집은 오랜만에 들떠있었다. 휴일 전날이라 모처럼 여유있게 가족외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 물도 구경하고 영화도 보고 미디액트 화장실 갔다가 5층에서 거리도 내려다보고……. 아이들은 이런 저런 기대를 가지고 6월 5일 금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하루 전날인 6월 4일, 심상치않은 소식을 들었다.

 



 

노트북에 물을 쏟아 피로한 하루를 보내는 중에 오후가 다 되어서야 전화로 들은 소식, 인권영화제 불허! 이리저리 소식들을 찾아보니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이 “시국관련 시민단체들의 집회 장소 활용 등으로 부득이하게 시설 보호 필요성이 있어” 청계광장을 사용할 수 없다고, 그래서 “많은 이해를 구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한다.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 다른 신문들을 찾아보니 서울신문에는 “시 관계자는 “영화 상영작 다수가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이 영화제가 불법 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사용 승인을 취소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나와 있었다.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문득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2년 전에도 나는 이러고 있었다. 제2회 인권영화제가 열리던 홍익대 주변에서는 무차별 검문검색과 원천봉쇄가 이뤄지고 있어서 영화 보러 가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당시 스물 일곱 살이었던 나는 심리적으로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상태라 경찰한테 잡혀갈까봐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나는 그 때 학원강사였고(그것도 홍대 앞에서!) 내가 홍대에 들어가건 말건 경찰이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님에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위축된 채로 홍대 앞을 서성이다 집에 돌아왔던 것같다.

 


 

결국 제2회 인권영화제는 하루 앞당겨 조기종결되었다. 경찰은 대학당국의 시설물보호 요청을 빌미로 압수수색을 하였고 현주건물침입혐의로 집행위원장을 고소하였다. 인권영화제 집행위 측은 사전심의(검열)을 거부할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함께 연대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탄압을 받았었다.

 


 


 

내가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는 건 단지 그 기억 때문만이 아니다. 2005년 나는 사무실 선배와 함께 인권운동사랑방 10주년 기념 영상물을 만들었다. 10년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97년 홍익대에서의 사진을 보았다. 대학 측의 단전 조치로 발전기를 옮기던 선배들의 사진을 보며 ‘저 땐 저랬었지’하며 웃었다. 그건 정말 우리가 건너왔던 20세기의 낡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 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런데 2009년의 나는 불혹이 가까운 나이에 “영화 상영작 다수가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화제가 불법 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영화제 상영을 허락 못하겠다는 사태를 눈 앞에서 본 것이다. ‘민주주의가 죽었다’느니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간다’와 같은 흔한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이상함, 신기함, 한심함, 황당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내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스물 일곱 살의 내가 서른 아홉이 되고 없던 아이가 셋이나 생겨서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려던 광장이다. 그동안 나는 그 광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티바이크를 타며 도심투어를 했고 겨울이면 루미나리에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우리가 영화를 못 볼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자전거를 타든 사진을 찍든 영화를 보든 촛불을 들든 나와 내 아이들은 우리들의 광장에서 우리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할 수가 있다. ‘하이서울 페스티발’의 꽃분홍길 퍼레이드와 조선일보 주최의 루미나리에 축제를 즐겼던 것처럼 나와 내 아이들은 인권운동사랑방이 주최하는 인권영화제를 즐기고 싶다.

 

밤사이 상황이 조금 변해서 서울시의 입장이 ‘사용 불허’에서 ‘사용 승인’으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청계광장에 서는 일은 여전히 불안하다. 경찰이 언제 다시 차벽을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97년 홍익대에서의 공포를 나는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어쩌면 오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딸과 경찰을 좋아하는 나의 아들은 청계광장에서 많은 질문을 해올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지나왔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줘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들과 함께 그 곳에 서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겠다. 광장은 우리의 공간이다. “우리에게 광장을 돌려달라”는 외침은 “우리가 누릴 문화를 뺏지 말라”는 외침과 다르지 않다. 나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오늘 나는 아이들과 함께 청계광장에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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