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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편집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열심히 해서인지 매일 꿈을 꾼다.

이젠 꿈이 어떤 계시인 것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게 전혀 허황된 생각은 아닐 수도 있는 게 꿈이라는 게 잠재의식의 소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 인상깊었던 꿈.

 

1. 예쁜 골동품 시계를 선물받은 꿈

가끔 다른 이들의 다큐를 감상할 때면 핸드폰의 스톱워치를 눌러놓고 시간배분을 메모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액정 불빛이 무척 신경쓰인다.

화면만이 빛나야할 어둠 속에서 감독은 핸드폰 액정 불빛에 얼마나 신경쓰일까 하는 생각에

손바닥으로 가리고 시간을 적긴 하는데 그러다보니 신경이 분산된다.

시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손에 뭔가를 걸치는 게 거추장스러워 결혼반지도 하늘의 보물상자에있는 상황이니.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름다운 보석들로 치장된 작고 예쁜 시계를 선물받는 꿈을 꾸었다.

새것이 아니라서 더 기분이 좋았고 시간도 잘 맞아서 꿈속에서 난 너무나 기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첫번째 생각은 바로 전날 써치했던 내용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라는 것.

가장 중요한 장면을 오디오때문에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이어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장면들을 드물게본다.

앵두 어린이집 등원을 앞두고 바닷가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조개를 줍는 하늘, 모래를 파는 하돌, 그리고 모래 한 알도 신기해하던 앵두의 모습들이 찍혀있었다.

바닷가 장면이나 등산장면은 주인공이 누구든 <인간극장> 5부만 되면 등장하던 터라 별로였는데

또한 그런 걸 의도하고 바닷가에 놀러간 건 아니었는데

바닷가의 모래와 파도에 신기해하는 앵두의 모습은 맥락은 다르지만 뉴튼을 떠올리게 했다.

 

"...나 자신에게 비쳐진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소년이었다.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내 앞에 펼쳐져 있고,

나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가끔씩 동그스름한 돌과 다른 것보다 훨씬 예쁜 조개를 찾으며 즐거워했다."

 

며칠 후면 어린이집에 들어갈 앵두.

짠하고 안타깝고.....그렇지만 그 애는 손바닥에 붙은 모래알 하나에 기뻐하고

밀려오는 파도에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고 그 시간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 꿈 속의 예쁘고 유용했던 시계처럼.

 

99년에 나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실습으로 다큐 <육남매>를 찍고 있었는데

동생이 찍었는지 내가 살짝 찍혀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동생은 결혼을 위해 여친을 집에 데려왔었고 엄마는 나를 핑계로 동생의 결혼을 미뤘다.

그렇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나도 모르게 동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었던 시기.

연애도 작업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지지부진하던 시기.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어서 고작 머리색깔 하나를 바꿨던 그 시기.

 

중요했던 순간의 오디오가 날아가버림으로써

두 방법 사이에서 고민하던 구성이 선택의 여지없이 하나로 굳혀졌다.

특정 시기를 내레이션 없이 드라마타이즈드로 꾸밀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하일라이트의 오디오 소거로 맥없이 날아가버린 후

자전적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던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꾼 꿈.

꿈 속에서 나는 노란 머리를 한 채 체조복을 입고 체조를 하고 있었다. 보기 흉했다.

'스타일- 나와 카메라의 관계'에 있어서

개연성의 밀도가 떨어지는데도 '나-연출자'가 출연하게 되면 그렇게 흉해진다.

그런 흉한 영화는 최근에도 많이 봐왔다.

절제해야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3. 인쇄소의 네 그룹

대학의 선후배, 동기들이 모두 모여있는데 네 그룹으로 나눠져서 홍보물을 만들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는 다 달랐는데 내가 맡은 건 배우 김미숙이 새로 오픈하는 남양주의 커피숍이었다.

첫번째 그룹은 80년대의 전단 수준으로 아무 편집없이 그냥 인쇄를 하고 있었고

두번째 그룹은 종이를 오려 붙이는 말 그대로 종이 편집을 하고 있었다.

나는 hwp편집을 배운 바는 없지만 컴퓨터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더뎠다.

 

그러다 인쇄소의 사장으로 생각되는 이에게 다른 그룹들의 편집본을 보여주니

첫번째 편집본 정도라도 괜찮다고, 아주 좋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자리에 돌아와서 계속 더딘 컴퓨터편집을 하였다.

편집과 문서작업을 하면서 왜 나는 '김미숙의 커피'가 아닌 '남양주'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는지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지역에 대한 설명과 상권에 대한 이해가 전제가 되어야지만 이 커피숍의 장점이 살아난다고.

그리고 왜 '피칭'도 없이 곧바로 편집에 들어가는지 불만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하돌과 앵두는 내가 안고있어서 무사했는데 하늘은 다쳤다.

하늘이 차와 함께 날았다가 떨어진 후 나는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혹시 저 아이가 죽기라도 한다면, 장애라도 갖게 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하늘은 코 옆이 살짝 긁힌 정도였다.

다친 하늘을 안고 있자니 그동안 하늘에게 못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하늘이 이 정도라서 참 다행이다 생각하며 잠에서 깨었다.

이건 바로 어제밤 꿈이라서 좀더 생각을 해봐야한다.

 

참 많은 꿈을 꾸며 편집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영화는 나에게 늪이기도 했고 활력소이기도 했고 보물상자이기도 했던

나의 아이들과 나의 한때를 정리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번 영화를 잘 만들고 나면 나의 삶이든 나의 영화든 뭔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 기대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 영화를 잘만들어야한다.

세 개의 영화를 만들어오며 항상 생각했던 건

나에게 재능은 별로 없지만 그래서 잘 만들거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건 역부족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심은 네번째 영화의 시작 시점부터 내내 흔들렸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돌봐야할 가족들이 너무 많았고 카메라는 몸에 안맞았으며 촬영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실망하거나 절망했고 또한 스스로에 대해서 외면하고 싶어했다.

 

그럴 때 항상 부정적인 방향에서 나를 자극하는 김감독님은

"나이가 들수록 집중력은 더 떨어진다"면서 나의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리고 앞으로 더 심해질 것임을 경고했다.

역시나 그분의 말씀은 항상 맞다.

나는 2007년 촬영본을 한 달 전에 처음으로 써치를 했다.

촬영을 끝내고나자 출산 2개월 전이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번번히 촬영에 실패했던 출산장면을 드디어 찍긴 했지만

인권분만을 위해 조명을 거의 없앴던 분만실 상황과

빛에 취약한 A1의 처지의 결합으로 아기는 윤곽조차 없다.

 

출산을 하자마자 카메라를 들었던 가와세 나오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의 정체성을 제고해야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과연 다큐멘터리감독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생활인으로서 나의 가족들, 특히나 어린 생명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내 인생의 목표를 재정립해야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두세달 전의 그 고민들이 전생의 기억같다.

나는 여전히 다큐멘터리감독이고 아녜스 바르다처럼 쭈글쭈글한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싶다.  

카메라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이 장면들을 담아야하는데...' 하는 조바심을 느끼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인 것이다....

한동안 가증스러워했던 이 모습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가증스러워하는 건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볶임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가을에 꼭 를 세상에 내어놓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가능성은 절대로 생각하지않으려한다.

시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영화는 항상 이렇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속에서 만들어져왔다.

어떤 평론가는 내게, 아니 내 옆에 있는 내 아이에게 "니가 너네 엄마 영화 깎아먹은 그 애구나"라는

무서운 농담을 웃음도 없이 던졌지만 그래서 나의 영화는 항상 덜컹거리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쫓기지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미완성인 영화 한 편만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꿈까지 지배하는 나의 이 영화를 나는 가을이 오기 전에 꼭 완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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