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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1.

몇 번의 가편집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내내 부탁하던 것이 '담담한 내레이션'이었다.

구성도 그렇고, 연출자의 위치도 그렇고, 내레이션의 말투도 그렇고

남의 작품을 볼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분석도 하고 평가도 하면서

정작 내 영화를 만들 땐 적용이 안된다. 정말 신기하면서도 답답한 노릇이다.

담담하게 쓴다고 써보면 거칠거나 건조하다. 나름 마음을 들여다봐서 써보면 질척거린다.

 

분초를 다투는 이 마당에 어제 하루는 프롤로그만 붙이고 내내 다른 이들의 영화를 보았다.

이승준 감독의 <달팽이의 별>은 감독의 호흡이 어떻게 관객을 적응시키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이나 내레이션 없이 화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큰 사건이 없어도 등장인물들의 미세한 표정변화까지 읽을 수 있도록 관객들의 호흡을 정돈시킨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담담한 내레이션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약간의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아빠인 감독에게는 아마도 딸의 어린 시절을 담은 화면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와, 저걸 다 찍었네~!"라는 탄성이 나올만한 화면도 분명히 있었을 터인데.... 아낀다.

그래서 엄선된 소수의 화면들이 더 빛난다. 배울 점이 많은 영화다.

<스페이스 투어리스트>는 갑부 우주여행자와 로켓 폐기물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하나의 축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소재들이지만 이러한 선택이 이 영화를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로 머무는 것을 구해주었다. 멋지다.

 

<집으로 가는 기차>는 화면이며 긴 호흡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왜 대상을 받았는지 알겠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다큐멘터리는 시작보다 마무리가 정말 어렵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보다보면 어린 시절 우리 동네와 동네 언니들이 떠오른다.

현재의 지구 사람들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삶의 내용은 다층적이다.

한국의 70년대가 중국의 21세기와 겹쳐진다.

저가의 '메이드 인 차이나'에 담겨있는 그들의 땀과 눈물과 한숨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불평등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감독도 답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관객이 그 문제까지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영화는 발판을 마련한다.

세상엔 좋은 다큐멘터리들이 참 많구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느꼈다.

 

2.

이제 세 번째 편집에 들어서며 태도와 구조 자체를 뜯어고쳐야하는 상황에 직면해있다.

초반부는 숨이 가쁠 정도로 호흡이 빠르고 그래서 중반부는 지루해진다.

후반부는 닫힌 결말과 뻔한 정리로 허무하다. 이유가 뭔지 모르진 않는다.

사람들이 묻는다. '남편은 왜 안나와요?"

남편은 거의 매 화면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부부 사이의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내 인생은 한권의 책" 모드로 변해버린다.

말을 꺼내려하면 봇물처럼 쏟아져나와서 꽁꽁 닫아두고 있었던 거다.

그런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첫 애 낳을 때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수술을 해야 했던 상황이며 둘째애 낳을 때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몰라 매일매일 메모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휑해지는 마음으로 돌아보던 사무실 풍경이며, 세째 임신했을 때 격렬하게 남편을 증오했던 거며 이런 이야기들을 꽁꽁 묶어두고 이야기들을 펼쳐놓으니 감독님이 그런다.

"왜 이렇게 낭만적으로만 그리고 있느냐?"

 

할 이야기와 안할 이야기를 고르고 꼭 해야할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야하는 그 과정을 점프컷으로 생략, 생략, 생략하고 있는 거다. 가벼워지고 싶었으나 이건 허술한 거고 경쾌하고 싶었으나 이건 숨이 가쁠 정도로 빠른 거다. 다 풀어헤친 후에 다시 조각들을 맞춰가야 하고....그리고 숨겨둔 조각들도 꺼내야한다. 어제밤엔 엄두가 안난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오늘 아침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럴 때일수록 멀리 보지 말고 땅만 보고 가야한다. 구성안을 다시 짜고 한 컷 한 컷 붙여서 한 씬 한 씬 완성할 때마다 기뻐해야 한다. 

 

2주일만에 강화에 갔더니 내 키보다 더 자란 풀들로 집은 폐허처럼 변해있었고 냉장고의 음식들은 다 쉬었거나 맥이 빠져있었다. 벼리는 우울증에 걸렸는지 짖지도 않고 퀭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고 다롱이는 엄청 먹고 엄청 싸는지 집 주변이 온통 오물투성이다. 고추를 따고 벼리를 풀어주고 다롱이 집 주위를 청소하면서 정말 다음작품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이 너무 많기도 하고.....이번 내레이션의 한 대목처럼 "다큐멘터리 말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서울집은 밥통,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가 다 고장이 난 상태이다. 밥통, 냉장고, 세탁기는 에이에스기사를 불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과시간 중 일부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밥통은 가능하면 안 쓰도록 한 끼 밥만 압력밥솥으로 해먹고 냉장고의 소음은 참고, 빨래는 밤에 손빨래를 하거나 강화로 가져가거나 남편이 한다. 컴퓨터는 포맷을 하면 되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냥 중간에 스르르 꺼져버리면 다시 켜는 식으로 버틴다. 

 

하지만 이 시간은 곧 지나가리라. 하루하루 목표치를 잘 달성해서 겨울엔 강화에 가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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