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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1. 후회

1주일 전에 전주에 다녀왔다.

전주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도시지만 새로 태어난 새끼 강아지에 빠진 아이들은

그냥 나혼자 갔다 오라고 했다. 서운한 척 했지만 기뻤다.

혼자 가는 여행은 오랜만이라서.

 

너무 늦게 예매를 한 탓에 선택의 여지없이 

2좌석 남은 시간대 열차의 표를 아슬아슬해하며 끊었다.

그래서 앉게된 문앞 자리.

옆자리 중년여성이 통화중이었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다 들리는 통화내용 때문에 살짝 절망했다.

지금 어디야? 시장봤어? 뭐 사러갔어?

질문의 구체성으로 따져본다면 내가 익산에 내릴때까지도 충분히 지속가능한 대화였다. 

이어서 권사님과 장로님이 언급되는 걸 들으며 살짝 긴장.

생각보다 통화가 빨리 끝나고 새우깡을 권해주셨는데 나는 눈길을 피하며 괜찮다고 했다.

그 분은 정말 친절하게 권하셨는데 나는 그 분이 그렇게 말문을 여신 다음에

교회 이야기하실 것같아 도저히 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사탄을 조심해야 해"라는 말이 일상용어로 나오시는 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한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김두식선생의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고 있었는데

본문 중에 나오는 기독교이야기를 이 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엉뚱한 궁금증을 느꼈고

계속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따가워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외투를 뒤집어 쓰고 잤다.

 그리고 익산에서 내렸다.

내린 후에 후회했다. 그 분은 그저 친절한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르는데.

보수적인 교단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는 큰언니 생각이 나서

마치 큰언니의 친절을 외면한 듯한 미안함이 한참이나 나를 괴롭혔다.

 

편협하면 마음이 굳세든지

우유부단하면 부드럽기나 하든지

이도저도 아닌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뒤돌아서 후회한다.

마음만 다쳐가면서.

 

2. 환승

전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타고 앉아있노라니 안내방송이 나왔다.

삼례, 전주, 오수..... 낯선 지명들을 듣고나니 그대로 방랑하고 싶어졌다.

20대 후반에 자주 이런 충동을 느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던 그 시기의 어느 날

한강의 <검은 사슴>을 보고나서 속초라든지 어둔리라든지 하는 지명들을 보다보면

의선을 찾아다녔던 인영의 여정이 생각나서

그렇게 강원도를 떠돌고 싶었었다.

나도 그렇게 인영처럼 떠돌고나면 인영처럼 마음이 굳세지지 않을까 바라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흔이 된 내가 전주행 무궁화호 안에서 다시 떠돌고싶은 마음을 느꼈다.  

나는 대학생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봤다. 

해남에서 서울은 항상 고속버스로 다녔고 기차는 엠티 때 처음 타봤던 것같다.

기차타기 말고도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못해본 일은 많았지만

내게 기차는 도시의 표상.

그래서 기차는  항상 내게 더 큰 세상, 혹은 그 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느껴진다. 

ktx에 비해 넓은 좌석에 앉아 빌로드천같은 의자의 옷감을 쓸어보면서

정말 떠나고 싶다는 생각.

며칠이고 유랑하고 싶던 그 마음.

 

3. 기다림

상영시간보다 한시간 일찍 전주에 내렸다.

15분 정도면 상영장에 도착한다고 해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역무원에게 전동성당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역앞 정류장에 서있는 버스를 가리켰다.

불은 켜져있는데 문은 닫혀있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려보니 운전사가 뒷쪽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내게 시간은 많았고 그 분이 편안한 밥을 먹기를 바랬다.

10분 정도가 지나는 동안 그 분은 밥을 먹고, 하차문 근처의 거울을 보며 입을 닦고

스프레이같은 것을 뿌리며 머리를 매만지고......

그러고도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참만에 문이 열려 그 분에게 전동성당 가느냐고 물어보니

그 근처까지 가지만 20분 후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래서 택시를 탔다.

 

4. 전주

전주영화제 때 돌아다녔던 그 거리가

축제의 시간에 바라봤던 흥청거리던 거리가

일상의 공간이 되어 낯설게 다가왔다.

올 봄에 문대표와 함께 서서 피칭을 하던 그 무대가 내 영화의 상영장이었다.

영시미의 반지가 사람이 별로 없다고 미안해했지만

전 말이예요, 울산까지 내려가서 한 명의 관객만 있던 상영도 지켜본 사람이라서 괜찮아요,

라고 반지를 위로해줬다.

작년에 익산에 미디어교육 때문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객석이 꽉 차지는 않더라도

사람이 많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익산과 전주가 행사를 같이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상영을 기다렸다.

 

4. 상영

배급사 트레일러가 뜨는데 기타소리가 났다.

다시 수정하면서 트레일러들의 오디오는 다 뺐는데....

수정편집본이 아니라 부산상영본이었다.

그 뒤로도 손을 더 봤는데....

영어자막이 있는 최초상영본을 보려니까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상영이 진행될수록 내가 붙인 모든 커트에 내 마음처럼 반응해주는 관객이  있어서 

불편함은 사라지고 수정안해도 될것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내가 전주든 울산이든 형편만 되면 가는 것이다.

90%의 쓴 맛을 견디고 나면 나를 기다려주는 10%의 단 맛. 그 강렬함.

그래서 편집 때마다 왜 내가 이러고 있나, 다시는 영화 따위는 안만들고 싶다, 라고 입술을 깨물다가도

상영이 되고 대화가 있고 그러고나면 거짓말처럼 다시 새 작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나의 직업, 나의 운명은 그래서 사랑스럽다.

 

5. 대화

지역주민으로 보이는 분들이 많아서 좋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에 고개를 끄덕여주시던 중년남성분이 쑥스러워하면서 물었다.

"제가 독립영화는 처음 보는데요, 12년을 찍었다고 하던데 어떤 댓가를 바라고 그런 일을 하세요?"

지난 여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막막해하며 걷는 동안, 그 시간동안

밤마다, 아침마다, 울고 싶을 때마다 생각했다.

상영 후에 관객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나의 꿈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완성만이 유일한 꿈이고 바람이고 희망이었다.

 

"제 영화를 끝까지 봐주시고, 이야기를 위해서 자리에 남아계신 분들 앞에서

이렇게 서서 이야기를 하는 이 순간, 이 자리가 제가 바라던 댓가입니다"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나는 울었다.

모더레이터가 <미친 김치>의 강지이감독이었는데 그 분도 같이 울었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우리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휴지가 없어서 소매로 눈물을 닦다가 또 서로 쑥스러워 하다가.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낭 내내 따뜻하게 바라보던 사람들. 다시 태어나면 결혼을 하겠냐고 진지하게 묻던 20대 후반의 여성관객.

내가 "유전자를 전해줬다고 해서 제가 아이들 인생을 책임져야햐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니

"그래요, 그래, 다 자기 복은 타고 나는 거예요"라고 맞장구를 쳐주시던 중년 여성.

그 따뜻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진다.

단맛은 참....너무나 진했다.

 

6. 귀가

전주에서 인천가는 버스를 타고 새벽에 도착했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버스가 더 빨리 와서 혼자 터미널을 돌아다녔다.

인천은 왠지 좀 무섭다. 문제는 인천이 아니라 새벽이라는 시간 탓일 수도 있지만

인천은 왠지 국제도시,라는 호칭 때문인지 국제적으로 무섭다.

인적없는 터미널을 돌아다니다가 어렵게 남편을 만나서 강화집으로 갔다.

가는데... 김포 가구단지쯤에  목줄도 없고 목걸이도 없는 개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혹시 우리 초롱이가 아닐까?

전날 밤에 초롱이 꿈도 꿨는데.

어쩌면 운명처럼 이렇게 만날 것에 대한  예지몽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그 개를 보러 가자고 하니 남편이

"개꿈이야. 저 개 만나려고 꾼 개꿈"

하면서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한다고 그냥 쌩 갔다.

어쩌면 초롱이였을지도 모르는데.

 

밤에 다시 초롱이 꿈을 꿨다.

초롱이 언니 이순이가 강아지 두마리를 낳았는데

그래서인지 자꾸 초롱이 생각이 난다.

초롱아, 너도 어딘가에서 새끼낳고 그렇게 잘 살고 있겠지?

그러길 바래.

 

7. 위로

며칠 후에 <워킹 맘마미아>라는 미술전시회에 갔다.

십 몇년 전에 잡지만드는 일 할때 항상 맨 마지막으로 글을 보내시던 선생님과 함께 갔는데

전시장을 돌아보고 차를 마시다가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시간에 너무 쫓겨서 제대로 마무리를 못했는데 다시 수정을 하려니까 엄두가 안나요"

선생님이 말해주었다.

창작자가 자기 작업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건 숙명이란다.

자랑스러워만 하는 사람은 좀 이상하지 않겠니?

그 부끄러움 때문에 진화가 있는 거야.

벌써 본 사람도 있는데 너무 많이 고치지 말고 이번엔 여기까지라고 그렇게 생각해.

만드는 게 중요한 거란다. 끊임없이 만드는 거.

그 부끄러움을 안고 끊임없이 만들어가면서 진화해가라.

 

나는 또 펑펑 울었다. 이번엔 휴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10월 부산영화제 이후의 상실감. 비틀거림, 조바심, 부끄러움, 자책, 그런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그날 나는 처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같다.

괜찮아. 이것도 다 거치는 단계인거고

아니 아르노처럼 나는 이번에도 만들고 나니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은 그런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시간이 나를 자라게 만들었고 이 부끄러움이 또 나를 밀고  갈 거고

그리고....

영화를 사이에 둔 만남과 이야기가 또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감독으로 늙어갈 것이다. 꼭 그러고 싶다.

 

** 자꾸 나의 글을 자기 말처럼 쓰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스토커일까? 따라쟁이일까?

아니면...도둑일까....

폐쇄적인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면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나는 그는 내 글의 어떤 부분들을 자기 말인양 쓰고 다닌다.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일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몇 번 부메랑처럼 돌아온 (원래는 내 것이었던) 그의 말들을 접하면서 

세상으로 열려있는 이 창을 닫아야하나 고민하기도 했고

실제로 몇달동안은 말을 가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는 것도 우습잖아.

 

당신, 아마 이 글도 보고 있을 당신.

내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살아가세요.

남의 기획과 남의 생각, 남의 말 훔치는 짓은 그만 하시고요.

다큐멘터리감독이라는 자리가

정치력만으로 버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까요?

당신이 너무 싫어요...그리고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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