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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릭스

함께 보고 싶은 영화-‘장애인’은 어떻게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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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6 02:01 입력
 
계간 계간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함께웃는날 vol 17   |  2013년 봄호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장애인’은 어떻게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_ 토드브라우닝(Tod Browning) 감독의 「프릭스(Freaks) 」
 
류미례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 푸른영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장애·여성·가난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다. rmlist@hanmail.net
 
 
 
시대를 앞섰거나 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소위 ‘저주받은 걸작’들이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려는 토드 브라우닝(Tod Browning) 감독의 「프릭스(Freaks)」처럼.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주로 상업영화들이었다)를 소개하기 위해 영화사를 훑다 발견한 영화이다. 「세기말의 ‘이상한’ 영화사상 베스트 일백 편」이라는 글을 쓴 김홍준 감독은 「프릭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이 글은 장애인영화 칼럼니스트 모임 ‘유토피아’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2008년 『에이블뉴스』에 기고했던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최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활동가 루인의 글 「괴물을 발명하라: 프릭, 퀴어, 트랜스젠더, 화학적 거세 그리고 의료규범」(『성의 정치, 성의 권리』, 자음과 모음, 2012)을 읽고 큰 배움을 얻었고, 덕분에 5년 전 글의 문제의식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프릭 관련 내용은 루인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또한 함께 토론하며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카자 실버만을 내게 알려준 페미니스트 스승 마사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서커스의 구경거리로 살아가는 ‘프릭’들이 이룬 공동체가 사악한 ‘정상인’의 악행에 복수하는 이야기. 신의 ‘변덕’으로 태어난 ‘기형’의 인간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역할을 연기하였다. 당연히 그로테스크하지만 시작 몇 분을 참아낼 수 있다면 주인공들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눈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영화.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포털 검색창에 ‘프릭스’라는 단어를 쳐보니 2002년에 개봉했던 거미영화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 거론하려는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다. 1932년에 만들어졌던 영화, 당시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이 기절하여 실려 나갔던 영화,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30년 동안이나 상영이 금지되었던 수수께끼 같은 영화. 바로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프릭스」이다. 

프릭쇼, 지배규범의 한계를 은폐하는 유희 

장애-퀴어 이론가 엘라이 클레어(Eli Clare)에 따르면 프릭으로 불리는 이들은 각각 다른 유형으로 프릭쇼의 배우로서 활동했다. 즉 ① 백인 장애인과 비백인 장애인 ② 미국으로 납치되었거나 노예로 팔려 온 비백인 비장애인 ③ 미국의 비백인 비장애인 ④ 시각 경험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차이가 있는 비장애인. 예를 들어 수염 난 여성, 뚱뚱한 여성, 매우 마른 남성, 인터섹스 등. 의 네 가지이다. 그들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전시물이었다.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연구자이자 인권활동가인 루인은 이러한 프릭쇼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관객들이 자신과는 다른(달라도 너무 다른) 프릭들의 몸을 보며 자신은 규범적이라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관음증 의례는 지배 규범의 한계를 공유하고 은폐하는 ‘유희’였다.” 

「프릭스」는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하여, 공중 그네를 타는 미녀 곡예사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저신장장애인 한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스를 비롯해 막간극을 하는 장애인들을 바보 취급하던 클레오파트라는 한스가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결혼을 승낙한다. 그녀는 괴력을 가진 애인 헤라클레스와 공모하여 한스에게 조금씩 독을 먹이는 수법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그 음모를 눈치 챈 한스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폭풍우가 치는 밤 두 사람에게 반격을 가한다. 

무대에 선 프릭을 구경하며 놀라고 공포를 표현하는 걸 즐기던 비장애인 관객들은, 그러나 그렇게 볼거리로만 존재해야 했던 프릭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그 상황을 참아내지 못한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세간의 혹독한 악평을 받았고 영화관들이 줄줄이 상영을 중지하면서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구역질을 하며 극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비장애인 관객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영화는 30년 동안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샴쌍둥이, 저신장장애인, 상반신만 있는 남자, 두 팔이 없는 여자, 양성인간 등, 그저 쇼의 볼거리로만 인식되던 프릭들이 선명한 캐릭터로 등장해 완전히 새로운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을 비장애인관객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낯선 몸을 새롭게 각인시키다 

실제로 당대를 풍미했던 서커스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프릭스」의 장애인들은 그동안 봐왔던 어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심각한 기형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부모와 가족의 사랑은커녕 인간적인 대접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엘리펀트맨」의 주인공과도 다르고, 과학자 아버지의 실험에 의해 태어난 「프랑켄슈타인」과도 다르다. 「엘리펀트맨」에서 장애인은 서커스쇼의 볼거리가 되어 비장애인들에게 스스로를 ‘정상인’이라 여기며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가하면 「프랑켄슈타인」의 장애인은 ‘정상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냄으로써 동정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피조물은 그의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나는 모든 사람이 달아나고 부인하는 이 세상의 오점, 괴물인가?”라고 묻는다. 선한 행동을 했음에도 감사의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없고,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이 돌에 맞는 사건들을 거치며 피조물은 그 모든 현상들이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몸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슬퍼하고 그리고 절망하고 만다. 

반면 「프릭스」는 기존의 장애/비장애 구도를 완벽하게 뒤집는다.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는 금발에 멋진 미모, 괴력과 멋진 육체를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악마적이고 비열하다. 반면 장애인들은 약한 자를 돌보고 불의를 응징한다. 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발견할 수 없다. 손이 없어 발로 식사하거나 다리가 없어 손으로 걷고 사지가 없어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모습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낯선 존재들에 대한 호감과 믿음이 생겨난다. 그들의 세계는 비애나 동정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들은 즐겁고 당당하며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익숙한 구도의 전복 

저신장장애인 한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피로연 장면에서 이러한 입장은 명확히 드러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동료 장애인들이 “We accept her. One of us(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커다란 술잔을 돌릴 때, 잔을 받아든 클레오파트라는 “이 더럽고 불쾌한 병신들”이라고 욕하며 자리를 뜬다. 그장면은 굉장한 심리적 충격을 던진다. 즐거운 축제의 자리에서 장애인들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민 손은 당당하다. 그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권리,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을 축복해주는 환영회 자리를 더럽고 불쾌하게 깨뜨리는 존재는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이다. 여태껏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었던 수많은 가치들은 그렇게 가볍게 깨져버린다. 금발, 아름다운 얼굴, 관능적인 몸매와 같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은 장애인 공동체의 건강한 기운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떳떳하고 당당한 장애인들의 자신감은 우리를 낯선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의 결말, 장애인 공동체의 성원들은 손과 발, 입을 이용해 흉기로 클레오파트라를 새롭게 조각한다. 악마적 심성의 노예가 되었던 아름다운 육체를 훼손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방식으로 클레오파트라를 해방시켜준다. 「프릭스」의 주인공들은 당당하다. 영화는 그동안 ‘정상’이라는 이름에 눌려있던 낯선 매혹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준다. 그 충격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새로운 보기를 위하여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큰애 하은이를 임신했을 때 산전검사에서 다운증후군일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두 번째 검사를 했을 때 확률은 더 높아졌다. 한 달을 울고 다니다가 나는 나의 내면에서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이런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지적장애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만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나의 내면에, 그 무의식에, 장애는 천형이라는 전통적 인식이 그토록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애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무의식을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장애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시선의 권력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보는 자/보이는자’의 이분법에서 ‘보는 자’는 끊임없이 권력을 행사하며 ‘보이는 자’를 대상화한다. 그리고 그 눈은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다. 장애는, 낯선 몸은, 규범적 세계에 섞일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선택하는 비장애인들의 기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일단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장애인들을 본다. 다르기 때문에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르기 때문에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저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며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장애를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전 과정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지켜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결국 장애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 전제로부터 감동도 오는 것이다. 그렇게 장애는 인물의 특성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 관객들은 장애인 캐릭터들에게서 ‘사람’보다는 ‘장애’를 도드라지게 본다. 세상 유일한 존재의 고유한 가치를 정상/비정상의 구도속에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프릭스」의 가치는 이러한 시선 권력을 깨뜨린다는 데에 있다. 「프릭스」에는 개별 주체들 간의 세세한 차이는 무화시킨 채 단지 프릭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단일 집단으로 인식하던 기존의 시선이 없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즉 보임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를 강조한다. ” 카자 실버만 식의 보기는 개체들이 각 각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설파한다. 그리고 우리는 「프릭스」를 통해 그 현실태를 본다. 「프릭스」가 구축한 시공간의 구조에서 우리는 단지 90분만을 할애하고서도 시선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프릭‘들’이 아닌 각자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과 사연들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토드 브라우닝 감독이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든 것은 당시 유행에 따라 가출을 해서 서커스단 생활을 경험했던 유년기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 우리들은 소위 ‘프릭’이라 불리는 그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은 그렇게 ‘한 사람’이 된다.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즉 보임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 바로 「프릭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선물이다(그 선물의 가치를 공유하고 싶은 독자는 docurmr@gmail.com으로 의향을 알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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