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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

2014416일은 인디다큐페스티발 폐막일이었다. 영화를 보러 서울로 가는 지하철 TV화면에서 소식을 처음 접했다. 소식은 전원 구조라는 자막과 함께 였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본 신문기사에는 선거를 의식한 쇼일 것이다라는 덧글이 달려있었다. 그 날 내가 본 영화는 <액트 오브 킬링>이었다. 무차별적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피해자들이 증언을 꺼리는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사건에 대해 묻는 그 기묘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실종자는 백 명이 넘어있었고, 다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오니 실종자는 또 2백 명이 넘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은 먹는 것도, 웃는 것도, 숨쉬는 것도 미안했다. 에어포켓이나 골든타임이라는 이름의 기대는 부질없었고 간절한 희망을 품었던 그 시간이 사실은 죽음의 관전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나를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들게 했다. 나는 조문도, 헌화도, 촬영도 못한 채 몇 개월을 보냈고 J감독의 권유로 뒤늦게 힘을 내어 단원고 미디교육을 자원했다.

 

미디어교육-봉인된 기억, 기억의 사각지대

20149월부터 12월까지 단원고 방송반 학생들과 미디어교육을 했다. 모두가 웃고 있는 단체사진이 크게 붙어있는 방송부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했다. 잦은 만남이었지만 3개월 동안 그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송반에 2학년은 두 명만 남은 상태였고 그 중 한 명만 교육에 참여했지만 그 학생 또한 상담 때문에 수업에 자주 빠졌다. 어디서나 세월호 이야기를 하던 대한민국에서 단원고 미디어수업시간은 유일하게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곳이었다. 로맨틱 스릴러 영화를 만들어 시사회를 하고서 다음 교육 땐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는 말을 하며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처와 관련된 기억을 빨리 잊는 것이라 말하지만 망각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처와 관련된 기억을 공공의 장에서 증언하여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또다른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교육이었지만 단원고 미디어 교육은 기획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후일담처럼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장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는 거다. 미디어교사들은 완벽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고 그들이 구축한 영화 속 세상에 단원고의 현실은 1%도 섞여있지 않았다. 소품으로 잠깐 등장하는 핸드폰에 노란 리본이 붙어 있어서 저것만이 이 영화가 2014416일 이후라는 것을 드러내는 유일한 소품이겠다싶었지만 문득 그것을 깨달은 학생이 다른 핸드폰으로 얼른 바꿨다. 그들은 깔깔 웃으며 영화를 만들었고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재미있다는 말을 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자기 표현, 객관화, 치유…… . 그것은 그 시공간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던 거다.

 

세월호 미디어팀-기억의 작업

세월호 사건은 국가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었음에도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이야기되고 있다. 정부 측 이야기방식은 이렇다. 세월호 사건은 유병언과 그 일당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고 국가 재난 대비체계의 허술함이 문제일 수 있는데 종북, 좌익, 반국가세력이 대통령을 문제 삼으면서 국정과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해경 해체, 대통령의 눈물, 유병언 죽음 등과 같은 국면전환용 깜짝쇼들을 거치며 2014416일 직후의 국민적 슬픔은 저런 식의 이야기들 속에서 황급히 휘발되어버린 듯하다. 상황이 이렇게 비치는 데에는 정부 측 이야기는 무성하게 보도하면서 당사자들의 이야기에는 지극히 무관심했던 주류언론의 역할이 크다. 문화학자 엄기호는 기억의 패권을 쥔 자들에 의해 기억이 은폐되거나 왜곡되는 작업을 기억의 국가화라고 표현한다.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정부와 주류언론의 작업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저항은 거세었고 유가족들은 천막농성, 무기한 단식, 삼보일배, 도보행진 등을 꾸준히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세월호 사건이 기억투쟁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것은 사건과 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기억의 작업이 다양한 경험을 가진 다양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예술인들의 연장전’, 사진가들의 아이들의 방’, 글을 쓰는 사람들의 구술작업, 박재동 화백의 단원고 희생자들의 얼굴 그림과 사연 등등. 국민대책위 산하 세월호 미디어팀 활동 또한 그런 의미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미디어팀의 책임자인 김일란 감독이 더 풍부하게 설명할 것이라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K감독 덕분에 미디어팀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상처와 관련된 기억을 공공의 장에서 증언하여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것을 세월호 미디어팀 활동을 통해서 알아가고 있다.

 

262 씨네송이-함께 걷기

그러나 여전히 공공의 장에서 증언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이들이 있다. Y 감독과 함께 <세상이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늘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를 만들기 위해 유가족 인터뷰를 갔다가 안산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한 엄마를 만났다. 아들한테 미안해서 아직까지 분향소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러나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분향소 앞 대기소에서 하루 종일 리본을 만드는 그 엄마는 국민간담회도, 광화문 농성도 하지 못한다. 슬픔의 강도는 비교할 수 없지만 활동으로 외화시키지 못한 채 은둔해있는 유가족들도 많다. 이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262씨네송이이다. 이 작업은 현재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학생의 전 생애를 돌아보는 일이다. 유가족들은 초음파사진이나 돌사진을 보여주며 아이와의 첫 만남부터 성장의 시간을 회고한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돌아볼 때 부모들은 웃는다. 그리고 아이와의 마지막을 이야기할 때 부모들은 운다. 부모는 아이의 일생을 거슬러 올라가고 해당 창작자는 그 기억을 함께 걷는다.

모인 감독들은 만드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통일했다. 이들의 이름은 특별히 없다고 하는 게 맞다. 가족, 친구 등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부모들이 모은 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이미지화하는 사람.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아이의 생일날 틀어진다. 때를 놓쳐 생일날에 틀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생일을 계기로 기획되고 제작된다. 최근에 두 편의 영상을 만든 K는 이렇게 말한다. “첫번째 학생은 의사자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학생이고 기억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두 번째 학생은 사진도 별로 없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기뻤다.”

처음 시작할 땐 말을 잃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지만 숫자가 표현하지 못한, 이름이 담지 못한, 특별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와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은 작업자에게도 깊은 슬픔만큼이나 새로이 나아갈 힘을 준다.

 

남는 말

2014년 가을에 희생자 부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사람 앞에서 (유가족도 아니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자기만족적 행위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들 앞에서 가끔 운다. 공동체를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함께 기억하고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뒤늦게 함께 걷고 있다. 그래서 함께 울 수도, 가끔은 함께 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징검다리가 되어준 세월호 기록단 J감독과 세월호 미디어팀 K감독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도 나의 동료에게 그런 징검다리가 되고 싶어서 같이 가자 말하는 중이다. 씨네송이 작업을 나는 아직 하지 않고 있다. 만나고 싶은 꼭 한 사람이 있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한 사람의 작업을 하고 싶다.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어느 밤에 김일란 감독이 미디어팀에 들어오라고 하면서 이런 계획을 말했었다.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계속 기억하고 만나는 작업을 해보자

그 한 사람의 가족을 만나게 되면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계속 기억하며 만나고 싶다. 다큐멘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서는 해결만큼이나 듣기기억이 중요하다. ‘해결을 위한 다큐멘터리도, ‘듣기를 위한 다큐멘터리도, ‘기억하기 위한 다큐멘터리도 모두 필요하다. 지금은 다큐멘터리가 할 일이 아주 많은 시대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이 시대를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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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일 토론자인데..... 발제문을 못 받은 상태에서 혼자 이렇게 토론문을 썼다. 내일 완전 챙피한 상황이 벌어질까 두렵다. 근데 낼 아침에 일찍 나가야해서.....그리고 하루종일 수업이라서.....발제문만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슬픈 현실이랄까. 살다 보니 이런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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