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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싸개들

오래 전 글을 옮기다 보니

그 때는 무료였던 강풀 웹툰 <무빙>이

유료가 되어버린 걸 발견.

 

2015년 8월 27일 


아버지 제사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산의 엄마를 모시고 먼저 오빠네집으로 갔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난 후 아빠와 함께 
세면도구, 여벌 옷 등을 챙긴 후 
저녁에 광명 오빠집에 오기로 했다.

 

은별은 매일밤 내게 묻는다. 
"엄마, 나 이불에 오줌 싸도 돼?
엄마, 엄마 몸에 오줌 싸도 돼?
엄마, 엄마 머리에 오줌 싸도 돼?"
매일 밤마다 똑같이 이 세마디를 묻는다.
나는 그 때마다
응 괜찮아
이불은 빨면 돼.
엄마가 씻으면 돼.
아무 걱정 말고 자.
세 아이를 키우니 이 정도는 이제
능숙하게 견디고 대처할 수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열살 때까지 소변을 못 가려서 
집안의 골치거리였고
닭모래집의 껍질이 효능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는 동네에서 닭을 잡으면 그 집에 찾아가서 
그 껍질을 얻은 후 바삭하게 구워서 가루를 내어 먹게 했다. 
하얀 백지에 싸인 가루와 갈색 엽차잔.
늘 먹는 건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억지로 억지로 먹었다.
어쨌거나 그 뒤로 오줌싸개 신세는 면했지만
잠을 깊이 자지는 못한다.
밤에 두번은 화장실엘 가야한다.
신기하게도 화장실은 꿈에 스미어
꿈 속의 나는 항상 뭔가를 하다가 갑자기 오줌이 마렵게 된다.
꿈 밖의 내가 얼른 화장실엘 다녀오면 문제가 없는데
만약 얼른 잠에서 깨지 못하게 되면 
화장실엘 갈 때까지 꿈 속의 나는
화장실을 찾아 헤맨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나는 이제 오줌싸개가 아니다.

 

말년의 폭력 때문에
정말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가
사실 이렇게 다정했던 적도 있었는데.
제사상을 물리고 나면
6남매가 모여앉아(러시아언니가 빠져서 대부분 5남매지만)
아버지 얘기를 하다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좋은 기억들이 많다.
장에 갔다 오시면서 사오셨던 번데기.
겨울 초입이면 아버지가 내복을 
식구 수대로 사오고
그러면 엄마가 하얀색 실로 이름을 수놓았었다.
늘 어둡고 축축하게만 여겨졌던 유년기에
사실은 따뜻한 기억이 곳곳에 숨어있다.

 

얼마 전에 엄마와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가 사왔던 내복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그 때 강화는 정말 가물어도 너무 가물어서
논에 물 대는 문제로 살인사건까지 났었다.

"이 지역이 원래 바다였는데
막아서 농토를 만들었어. 
근데 가뭄이 너무 심하면
저 아래 가라앉았던 짠 기가 올라와서 벼가 타죽는대.
기억도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일상의 물결이 흘러가고나면
저 아래에 묻혀있던 기억들이 올라오는 거지"

 

분위기가 뭔가 숙연해지는 찰나,
엄마는 "해남 우리 논도 바다 막은 데 있었는데.
여기는 막은 지 얼마 안됐나보네.
우리는 왜정 때 막았어"
(엄마, 강화는 고려시대 때 막았는데...)
우리 엄마는 뭔가 숙연해지는 기분을 못 견뎌 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오랜만에 아버지제사에 화기애애한 대화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실에서 은별이는 또 다짐을 반복했다.
엄마, 이불에 오줌 싸면 어떻게 해?

 

늘 그렇듯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엄마가 빨면 되니까 걱정 마.
은별아 엄마도 열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쌌대.
이불에 오줌싸는 건 그럴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기 전에 쉬하고 푹 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은별이는 방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엄마, 우리가 엄마 속옷도 가져왔으니까
엄마도 오줌 싸도 돼.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자"

그래 고마워

 

아버지 제사날 강풀 <무빙> 41화 아버지 편을 보았다.
강풀의 아버지에게도
나의 아버지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아버지, 평화를 빕니다.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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