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6/05/25

"우리는 더 강해져서 강하지않은 여자들도 살아가게 만들거야"

 
오늘 면담중에 Y가 해준 말이다.
별 일들이 많았던 20대에 그나마 내가 당하지 않은 일은 스토킹이다. 
 
잠깐! J가 내게 했던 일들이 스토킹이었나? 그애는 몇년간 끊임없이 구애를 하다 자기의 일기를 통째로 내게 보냈었다. 일기의 끝에는 시간이 지정되어있었고 그 시간에 모처에서(청량리역이었던 것같아) 자기를 기다려달라는 호소가 적혀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받은 게 그 시간이 지나서였다는 거지.  일기에 적혀있던 뜨거운 문구와 시간을 맞추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의 불균형때문이었을까... 그 사건 이후에 우리는 아주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 모 방송국의 무슨 본부장이 된 J는 가끔 푸른영상에 찾아와서 밥을 사곤 했었다. 
 
오늘 면담을 한 Y가 당하고 있는 일은 스토킹이 확실한데 내가 J로부터 당했던 일이 스토킹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Y는 끊임없이 문자를 받았고 나는 정기적으로 편지를 받았다. 스토킹과 구애의 차이는 무엇일까? Y의 스토커는 Y로부터 거절을 당한 후 가끔 울분을 토로하는 문자를 보내고 그 때문에 Y는 3층에 못 온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주를 기점으로 이젠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봤어.나는 J의 연서들에 대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고(혁명에 관심이 많았지 ^^) 너의 그 불타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학보사 친구로부터 네가 어떤 애인지, 네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전해듣기는 했지만, 도대체가 나는 너의 그 말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거다. 학보사의 J라는 애가 사학과의 하루라는 애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너의 그 열렬한 행동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애도 나를 알게 되는 그런 상황을 맞으면서도, 그래서 "네가 하루야?"라는 말들에 당황, 혹은 황당해하면서도 그냥 그뿐이었다. 언젠가 나의 동아리방에 네가 찾아와서 딱딱한 경어체로 인사를 했고 밥을 먹자고 했는데 밥을 같이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먹지 않았겠지. 너는 내게는 너무나 낯선 사람이었으니까.
 
우편으로 왔던 너의 일기에는 분노가 스며있었다. 네가 정한 시간에 네가 정한 장소에 나와있지 않으면 너는 네 마음을 거두겠다고 적혀있었던 것같아. 너랑 친해지게 된 건 어그러진 시간 때문에 수습이 필요해서 가진 만남 이후부터였다. 내가 학교를 떠나 잠적해있을 때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가끔 너는 나를 만나러 왔었지. 편안한 관계가 된 후 네가 전해주는 너의 연애사를 들으며 너는 어쩌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그런 식의 패턴을 선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늘 열렬하게 사랑을 말하고(다 짝사랑이었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통해하고(그런데 네 사랑은 말이나 글 외에는 실체가 없었어. 너의 불타는 마음의 대상이었던 나는, 정작 네가 누군지도 몰랐던 거야. 너를 만나야 네가 누구인지 알지. 너를 보았어도 우리 사이에는 공유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 또 그런데 너는 나중에 MBC <사랑의 스튜디오>에 나와서 모든 작대기를 독점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너는 나라는 실체보다는 네가 만들어낸 허상을 사랑했던 것같아. 실체가 없는 허상을 사랑했으니 네 사랑은 그렇게 열렬할 수 있었을 거야. 사실 너는 '사랑하는 자'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였던 거야. 그러니 <사랑의 스튜디오>에 나와서도 출연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플레잉을 그토록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거지.
 
오늘 Y의 고통과 곤란을 듣는데 J, 네가 떠올랐다. Y는 문자오는 게 두렵대. 그 남자가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서술한 문자를 보내는 게 너무 싫대. 지난 학기에 그 남자는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거기 여자주인공이 Y의 공책과 똑같은 공책을 쓰고 Y의 친구들이 이상하다고 전해올만큼 Y와 닮아있었대. Y는 그 남자가 너무 싫고 무서워서 휴학까지 한 터라 그 남자의 드라마를 보지 못한 거야.
 
문자와 종이편지의 차이일까? 우리가 같은 과가 아니라서 네 존재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는 순하고 그 남자는 성격이 거칠기 때문일까? 왜 그 남자는 스토커이고 너는 나의 친구인 건가? 
 
휴학까지 하며 그 남자를 피했던 Y는 오늘 내게 말했어. 그 남자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그 남자의
실명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다 알릴거라고. 그러면서 저 말을 들려주었다. 촬영하러 강남역에 갔는데 우느라 촬영을 못했대. 대신 저 말 하나를 얻어온 거야.
 
"우리는 더 강해져서 강하지않은 여자들도 살아가게 만들거야"
학교는 동아리 축제로 들떠있었고
Y와 나는 축제때문에 임시로 차려진 노상까페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기 전에 Y가 내게 말했어.
"선생님 때문에 여기 올 수 있었어요."
그랬겠지. 하지만 사실 나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어.
저번 주부터 Y가 들려주던 이야기의 상대남이 누구일까
나는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곤 했지만 묻진 못했어.
그런데 오늘 너로부터 그 애의 실명을 들었고
지난 몇 년간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그 남자와 간간히 상담을 했던 나는
그리고 수업이 늦게 끝나는 Y를 기다리다가 
도서관에 잠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그 남자를 만났넌 나로서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크고 맑은 눈동자에
수줍게 웃던 그 남자애와
Y의 이야기 속의 그 남자가 동일인이라니.
그 남자애는 바로 전에 뛰어와서 내게 싹싹하게 인사를 하며
내 또래 엄마역할이 필요하다며 자기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했고
나는 연기 경험이 없어서 연극하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는
그런 저런 대화를 하고서 웃으며 헤어진 직후였거든.
 
나는 그런 혼란을 애써 감추며
Y가 축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노상까페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 애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지금 나는 Y보다 강하니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힘을 내기로 한 Y가
정말 힘을 내기를 바랬거든.
 
그러면서 또 너를, 그리고 나를 생각했어.
네가 순했던 걸까, 내가 강했던 걸까?
너랑 같이 보냈던 밤이 떠오른다.
너는 복학생이 되었고 나는 바빴어.
과외가 끝난 늦은 밤에 제기시장에서 너랑 술을 마시다 차가 끊겼어.
까치주유소 근처의 새로 생긴 여관에 들어갔는데
옆방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어. 
왜 울지? 무슨 일이 있나? 
내가 궁금해하자 네가 말했어.
우는 거 아냐.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너는 나를 제기역까지 바래다주었어.
얕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보며 걷다가 너한테 물었어.
"너는 여자랑 자봤니?"
섹스라는 단어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던 시절이었지.
너는 웃으면서 말했어.
자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잘할 수 있을 것같아.
 
이런 기억까지 떠올려보니 너는 참 착한 애였던 것같다.
아니지 착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
그런데 당연하지 않은 행동들이
남과 여 사이에 너무 많이 일어난다는 게 문제인 것같아.
학교를 떠나고나서 내가 겪었던 일들.
손가락뼈가 부러지거나
응급실에 가서 나중에 증거자료로 쓸지도 모른다며 X레이를 찍던 일들.
 
J야, 내게는 네 전화번호가 없다.
늘 네가 찾아오고 네가 연락을 했으니까. 
나는 이제 사무실에도 잘 나가지 않아.
갑자기 너한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 때는 정말 몰랐는데 그리고 잊고 살았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은 20대에 뜻밖에도 네가 있었네.
잘 지내고 있는지 잊지 않고 살펴주는 고마운 네가.
너에게 나는 네 빛나는 20대를 기억나게 하는 사람일거야.
실망하지 않게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는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가며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내게는 소중히 아주 소중히 여겨지던 시간도
있었던 거야.
아마 너 때문에 내가 남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같고
그래서 그 후로 그런 일들을 겪어야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강해졌고 더 강해질거다.
그래서 강하지 않은, 강해져가는 내 아이들에게 힘이 될 거다.
꼭 그럴 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