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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전철역 대기의자에 앉아 김밥을 먹는다.

수업이 끝나면 늘 점심을 먹긴 하는데
오늘은 다음 일정 때문에 먼저 나왔다.
같이 먹으면 밥을 천천히 먹기가 힘들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천천히 먹다가
신부님이 나를 위해 말을 걸어주신다는 깨달음에
주위를 둘러보니 빈 접시를 앞에 두고
모두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먹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처럼 다음 일정이 있는 날은 
이동 중에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으면 된다.
운전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게 되면서
이동 중에 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걷고, 먹고, 읽고, 쓴다.
 
송도교육이 끝나면 C가 늘 검암역까지 바래다주는데
어제는 우리의 처지? 혹은 운명? 
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다.
올 한 해는 일의 가닥을 잡는 해로 잡았다,
어떤 일을 거절할지, 어떤 일을 받아들일지
기준을 잡기가 힘든 한 해,
라고 말을 하니
C가,
그게 어디 올 한 해 뿐이겠냐고 그런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남.
 
지금 말고 다음에,
여기 말고 저기에,
파랑새가 있는 건 아닌데
늘 그걸 잊는다. 
아니다 그런 상상이 오늘을 견디게 하지 않나?
 
병원치료가 끝나간다.
"올 한 해는...."이라는 전제로
누군가한테 부탁하거나
관용을 요청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는 행동인 것같다.
병원선생님께도 비슷한 요청을 했었는데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내가 병원중독으로 가고 있는 것같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고나면 뻐근하고
과로하면 피곤해. 너만 그런 거 아냐.
치료는 끝난 거야"
그래도 끝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끝이 아니니
선생님 말씀 따라 열심히 살아야지.
 
한약봉지가 바뀌었는데
뜯기 힘든 재질이라 
원래 봉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함.
특혜가 없는 게
특권층이 없는 게
우리 병원의 장점이지.
우리 병원이라고 말할 날도 얼마 안남았네.
 
"어린이 머리 부딪친 후"로 검색하다가
옛날 내 글을 발견.
놀라운 건 
지금하고 똑같다는 거다.
그러니까 C의 말이 맞는 거지.
지금이 아니고 다음에
여기가 아니고 저기에
새로워진 내가 있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는
부질없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도 나는 내 몸에 배인
근거없는 낙관,을
버리지 않겠다.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치료가 끝나면 나는 완전 건강해져있을 것이고
무거운 장비를 양껏 들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촬영을 하고
그렇게 얻은 화면들로 열심히 편집을 하며
보람찬 하루를 마감할 거다.
그리고나서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나면
말끔한 몸과 마음으로 새 날을 맞게 되겠지.
그리고 올해 안에 영화도 완성할 거고.
한치 앞만, 내디딜 발 자리,
그만큼만 보고 가는 거다.
 
늘 같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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