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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값

1.

저번 주 금요일 강의가 나름 성공적이어서

새로운 곳들에서 강의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강연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경기도 차원의 큰 교육이었다.

복지재단대표, 도의원 등등이 와있어서 무척  놀람.

처음에 의뢰받기로는 내부 직원 교육이라고 해서

장애인식에 대해서는 선지식이 있다는 전제 하에 강의준비를 했는데

막상 가보니....

아니다 교육장에 도착하기 전에 교육참여자들이

강의준비를 하며 애초에 상정한 바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

길눈이 어두워 행사장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그래서 마을버스의 어떤 승객에게  "여기가 000 정류장이 맞나요?" 하고 물었고

그 분이 맞다고 해서 내린 후에 목적지가 같아서 동행하게 되었다. 

60대 정도되는 여성이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나의 강의를 들으러가시는 중.

"오늘 영화 보여준다고 해서 가요"라고 말씀하셔서 더 걱정스러웠음.

 그러니까 내 강의의 청중 중에는 일반 시민, 그것도 영화보러 오신 분들이  계신 거였다.

 

현장에 도착해서 원래 준비한 강의 앞에다 '장애코드로 영화읽기'에 대한 내용을 추가함.

강의 초입에 영화보러 오신 분들에게 양해의 말을 하고 오늘 강의의 개요를 다시 설명.

높으신 분들은 강의 초반에만 앉아계시다 가시고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남아서 영화까지 잘 보고 의견도 활발하게 말씀하셨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강의시간이 길어져서 

영화 본 후의 이야기나눔이 좀 짧아서 아쉽긴 했지만 분위기는 괜찮았다.

현장에서 네 분 정도 명함을 주시면서 강의요청을 해오셨고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분들에게 전화를 해야하는 건지 고민스럽.....)

그리고 어제 가평쪽 복지관에서 강의요청이 왔다.

전화하신 분은 아주 솔직해서 말하기가 편했는데

교육 취지 등을 말씀하신 후에 "강의료를 얼마나 드려야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수원강의도 아직 강의료가 얼마인지 모르고

통장사본과 신분증을 보낸 상태이니 얼마가 들어오는지 보고나서 알려드리겠다고 했다.

 

예전에 강릉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돌봄 관련 강의가 3시간에 60만원 정도였던 것같고

이번에 대전에서 비슷한 강의가 5시간에 631,350원

최근에 인디플러스에서 진행했던 씨네토크가 1시간에 270,760원(아마 30만원이었겠지)

그런데 나는 가평의 그 분에게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했던

강의 15만원, 원고료 15만원,만 말하고 말았다.

그 분은 내 얘기를 듣더니 너무 반기면서 "아 그 정도인 거예요?"라고 하셨다.

사실 사회복지공동모금 기준의 강의료는 너무 짜다.

정교수급이 시간당 10만원 정도이고

나는 겸임교수(라고 부르고 시간강사라 읽어야함)니 7만원 정도일 거다.

그래서 그 때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도 너무 강의료가 싸니까 미안하다고

원고료 15만원을 책정해서 2시간에 30만원을 줬는데

정작 써야할 원고가 A4 10장이라 진짜 죽는 줄 알았음.

어쨌든 가평사람은 내게 이력서를 보내라고 했고

나는 지금 수원에서 얼마나 들어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나의 멍청함을 다시 절실하게 깨달음.

돈이야 많이 받으면 좋고 적게 받아도 강의를 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때문에 물이 흐려진다는 거.

SJ감독이나 KS감독은 돈 문제에 당당하다.

나는 이 돈이 생활비이다,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얼마인지 값을 매기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나같은 사람 때문에 SJ감독같은 사람들이 욕을 먹는다.

최근에 SJ와 함께 일했던 피디를 만났는데

몇년 전 함께 참여했던 피칭 행사를 언급하면서

그 때 돈 많이 썼다고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트라우마같은 게 생겼다,라고 함.

나같은 사람 때문에 흐려진 물을 SJ감독님 같은 분들이 바로 잡느라 그렇게 욕을 먹는 거겠지

나는 정말 너무 멍청한 듯.

 

2.

내 이름 석 자를 친 후에 걸리는 글들을 지우고 나니

블로그 방문객 수가 대폭 줄었다.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하다.

14살에 갑자기 시작된 서울생활을 견디는 방식이 내게는 글이었던 것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없는 이유는 그 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긴 했지만 나의 내면에 들인 사람은 없었다.

평범한 사람, 그림자같은 사람, 존재감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무진장 많은 노력을 했다.

14살 이후로 나는 늘 세상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었고

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건 튀지 않은 거였다.

그래도 늘 새학기가 시작이 되면 성적 때문에 반장이나 부반장 후보가 되어야했다. 

나는 그냥 공부가 좋았다.

신문사이에 끼워져있는 광고지 뒷면을 수학문제 풀이나 영어 단어로 빼곡히 채우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안좋을 때 수학문제를 풀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과목 중 수학을 가장 못했고 그래서 내가 원하던 대학엘 가지는 못했지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르니까.

고2때 그렇게 멋모르고 부반장을 했다가 고생을 많이 했다.

반장은 공부에 방해된다고 자율학습을 빠졌고

그 시간을 책임져야했던 건 나였다.

학기가 시작되고 6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임원들 부모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 같이 가던 미화부장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그런 모임에 대해서 들어본 바도 없었고

그런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부반장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지만 

늘 어떤 이유 때문에 주목을 받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니 내게 친구 같은 게 있을리가 없지.

나의 내면은 늘 글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표현되곤 했지만

그것 마저도 나는 피했다.

돌이켜보면 10대의 나는 좀 외로운 존재였던 것같다.

하지만 한 번도 그렇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나한테는 그게 편했다.

월요일마다 있는 전체 조회 때 반장과 함께 아이들 줄을 세우고 나면

반장은 앞에 서고 나는 같이 설 친구가 없어 맨 뒤에 혼자 서있던 것.

그 정도가 내게는 불편했을 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게 더 불편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다시 그 상태로 돌아왔다.

5년 반의 대학생활은 내 인생에선 여전히 물음표다.

그 때의 나를 지금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글쓰기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첫 이름은 rmlist, 하이텔에서의 이름이다.

그후 진보넷 블로거 알엠을 거쳐 지금은 하루로 지낸다.

하이텔 시절, rmlist를 먼저 알았던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나와 rmlist가 너무 다르다고 놀라곤 했다.

오프라인의 나는 000, 석자 이름을 가지고

14살 이후 존재감없이 살고 싶었던, 튀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000는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어떤 맺힘이 남지 않기를 바래서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000의 내면은 충분히 괴팍했기에 그 내면이 배어나올까봐 조바심을 치며 

무난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쉬지않고 플레잉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000는 누군가 하루의 글을 오프라인에서 언급하는 일을 너무나 싫어한다.

하루와 000를 동시에 알고 있는 분들, 이 사실을 꼭 잊지 말아주세요.

 

3.

20대의 10년을 연애중독에 빠져 지냈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상대들이 있었다.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보다가

그 때를 연상시키는 구절을 만났다.

일주일동안 네 명의 남자로부터 고백을 받는 일.

그 구절을 읽고 나니 시절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외로웠던 거다.

인생을 바쳐 이룰 것같았던 혁명에의 꿈이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고

붉은 마음을 바칠 대상을 잃어버린 그들은

연애에 목숨을 걸었던 거지.

90년대는 외로움이 시대정신이었던 것같다.

그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나서 결혼을 했다.

내가 결혼한 남자는 20대 시절의 남자들처럼

노트 한 권을 연서로 빼꼭히 채우거나

반짝이는 황금빛 총알을 군대에서 가지고 나오거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거나

우리 집 창문을 보며 밤을 새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남편을 보며 사랑도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배웠다.

20대의 나는 사랑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무례했던 것같다.

나의 무례를 견뎌주었던 당신들에게 뒤늦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4.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이 단 한 개의 관계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단 한 개로만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서 조심하고 피한다.

나는 그 단 한 개의 관계로 귀결되는 것을 당연히 피할테지만

상대방은 어떨지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나의 호응이 그 관계로의 동의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20대의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시인이 만나자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고

시인은 DVD방에서 영화를 보며 술 좀 깨자고 했다.

나는 그 때 24살이었고 시인은 30대 중반이었다.

그는 정말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의심없이 따라갔다.

그 날 처음으로 가본 DVD방에서 시인은 내 몸을 만지려했고

나는 소리를 쳤고, 그는 입술에 검지를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 길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5시가 안된 시간이었다.

밀코 만체브스키 감독의 <비포 더 레인>을 고른 주제에 말이다.

 

시골에서 자랐고

서울에 온 후에도 동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담을 쌓고 지낸 나에게

그런 식의 사건 사고는 자주 있었다.

그런 소동을 겪으며

그리고 10년동안을 연애중독으로 보내며 

호감이 어떤 식으로 생겨나서 자라고 또 낡아가는지를 조금은 알게 된 것같다.

 

당신의 사인을 내가 읽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모른 척 했다.

다음 단계는 없기를 바란다.

 

다만 지금 걱정스러운 것은

어제 모른 척, 완곡하게 거절한 나의 태도에

당신이 보인 반응이다.

그 반응을 보며 당신이 오래 준비했다는 것을 알았다.

평상시와 다른 시간 배치, 

그리고 별일 아닌 것같은 제안.

첫번째 거절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다시 제안을 했다.

선약이 있다는 내 말에 당신이 보였던 침묵.

마음이 상했음이 분명한 그 눈빛.

 

내 일을 뺏지는 않기를.

당신이 그렇게 옹졸한 사람은 아니길.

꼭 그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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