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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일지

진정한 작업일지를 오늘 쓰게 됐군!

 

1.

아침에 엄마를 찍었다.

이 집에서의 마지막 농사일지도 몰라서

들깨단 묶는 엄마를 찍었다.

고구마순을 걷어놓은 고구마 밭도 찍었고

무거워진 고개를 숙인 수수도 찍었다.

촬영을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눈앞에서 소중한 것들이 휙휙 지나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작업실에 가야 한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내주기로 한 게 기억나서

다큐가 모아져있는 하드를 하드박스에 끼웠는데

하드가 돌지 않았다.

하드가 돌지 않는 걸 인식하는 순간

이런 일을 앞전에도 두 번 더 겪은 나는

숨도 조심히 쉬면서 다른 하드를 끼워보고

또 다른 하드박스에 다큐하드를 끼워도 보고

일대일대응의 다양한 옵션을 시도해보았다.

결국 하드가 망가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 그렇다면

그동안 하드가 망가졌던 게

컨테이너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던 거다.

컨테이너의 온도라든가, 불안정한 배선이라든가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동안 두 개의 하드가 먹통이 되었던 건

컨테이너에서/ 맥프로를 쓰는 환경에서였다.

나는 지금 안정적인 전원이 공급되는 강화고려역사재단의 사무실에 있고

매버릭을 운영체제로 하는 아이맥을 쓰고 있다.

그리고 하드가 먹통이 되었다.

그러면 하드박스가 문제인 건가.

페북에 사연을 올렸는데

사람들은 도시바라는 브랜드가 문제였다,라든가

레이드 어레이를 써야 한다던가

타임머신으로 백업을 해야한다,

와 같은 충고들을 한다.

고맙다. 그런데 내가 다 안다.

지금 내게 필요한 정보는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그리고 뭐라도 시도해본 적이 있는 사람

의 말이다.

하지만 하드는 망가졌다는 걸 불변의 사실로 전제한 후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준다.

어떤 이는 매일 작업 후에 하드를 집으로 가져가라는 조언도 한다.

세상에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다.

 

 

작업실은 너무 춥다.

학자들이 있는 곳은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든다.

노동자들이 있는 곳은 햇볕이 안 들어서 춥다.

처음에 배정받은 양지바른 곳으로, 학자들의 곁으로 

방을 옮겨달라고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추워도 여기 있는 게 낫다.

그제는 작업실 문에 열쇠를 꽂아두었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장난기 가득찬 눈망울로 

"내가 빼가면 어땠을까?" "그럼 운전을 못하니 집엘 못가지"

하며 와르르 웃는다.

추워도 나는 이 곳이 좋다.

 

2.

어제 밤에 전날 한의원 주차장에서의 공포를 얘기하니

남편은 왜 길가에 차를 세우지 않고 

위험한 주차장에 세우냐고 뭐라고 그런다.

 

왜냐하면........

어느 날, 나는 아침 일찍 첫번째로 한의원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호호 할머니라는 단어가 딱 맞는 할머니가

나보고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할머니는 나를 칭찬하셨다.

"참 머리가 좋아"

나는 갑작스런 칭찬에 어리둥절해서 

왜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차를 저만큼 앞에다 세워뒀잖아.

나는 아들이 태워다주는데 바로 앞에 내려야 덜 걷거든.

먼저 앞에 선 차가 있으면 그만큼 더 걸어야해서 다리가 아파.

아침에 왔는데 차가 저만큼 앞에 세워져있어서

아들이 바로 앞에 내려줘서 덜 걸었어."

다리 성한 내가 좀더 걸으면 

다리 아픈 할머니가 덜 걸을 수 있으니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그러니 당신도 가능하면 주차장에 차를 세워라.

 

그 얘기를 들려주니 남편은

그래도 밤의 주차장은 위험하니 밖에 세우라고 했다.

그날 내가 모자를 뒤집어쓴 사람에게 깜짝 놀란 날,

남편은 가지 않고 밖에 있었다고 한다.

나를 내려주고 출발하려는데 

누군가 내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고

그래서 남편은 차를 돌려 주차장 입구로 불빛을 비췄다고 한다.

 

아 맞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이 났다.

내가 내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를 켜는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싹 사라지는 걸 보면서

참 이상하다 싶었던 게

내 차가 광원인데, 내 차 앞에는 아무도 없는데

저 그림자 속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게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내가 오싹했거든.

 

머리가 쭈뼛 서는 경험을 하고서도

나는 그날 밤에 남편에게 아무 말도 안한 거다.

다른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잊었던 거지.

그리고 어제 밤에 그 이야기를 꺼내니

그제사 남편이 확인을 해줬다.

내가 본 게 헛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본 그 사람이 그냥 거기 서있었던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오다가 남편의 불빛 때문에 다시 돌아나간 거라고.

뭘까? 누굴까? 궁금하다.

 

3.

<디어 마이 프렌드>를 봐서인지

엄마한테 잘하고 싶어졌다.

엄마가 오늘 가신다고 해서

내가 모셔다드린다 했더니

바쁘니까 냅두라고 했다.

맞아 바쁘긴 해.

지금 밀린 일이......지금 뿐이겠어, 늘 밀린 일이....

그래서 엄마에게

그럼 강화읍까지만 오면 내가 강화읍에서 김포대학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께

했다.

엄마집에서 우리집까지는 버스를 세 번 타야한다.

엄마는 강화읍까지 가는 게 문제지 다른 구간은 다 편하고 괜찮다, 하셨다.

엄마가 워낙 단호하셔서

그냥 작업실로 왔는데

작업실에서 하드가 망가진 것을 발견하고 수습해보려고 노력하느라

아침 시간을 다 쓴 거다.

이럴 때 속상하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

이라 광고하고 또 모두가 그렇게 인지하고 있는데

정작 작업실에 와서는 몇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만 거다.

한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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