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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쓰기

 

사무실 Moon이 우리의 동료 June이 사무실 정리 의향을 비쳤다고 다급히 메시지.

아무래도  다음 주에 사무실에 가봐야할 듯.

2001년, 대학생일 때 사무실에 들어왔으니 15년동안 같이 지냈구나.

남의 결혼에 대해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June이 결혼할 때 안타까웠다.

Moon의 결혼이 없었으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살아가려면 결혼 조차도 조직화하는 마음으로 해야하는 거야....

라는 말을 그 둘에게 끝내 해주지 못했다.

 

 

사회지도급 인사를 부모로 둔 D선배의 경우, 강렬한 만남으로 빈민작업을 시작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며 봉천동 주민이 되었다.

사상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D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나 또한

'자발적 가난'에 매료되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단어에 대해 예전 내영화의 주인공 IH는 불쾌감을 표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냥 가난해. 가난할 뿐이야. '자발적 가난'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당신들은

가난하지 않잖아"

 

그래, 가난하지 않았다.

유년은 가난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가난하지 않을 수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대학동창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한 남자들과 결혼을 했고

나의 가족들도 내가 그러길 바랬다.

나의 첫 소개팅 상대남은 우리학교 의과대 부학생회장이었다.

85학번이었던 그 선배는 무척 자상했고 부드러웠다.

소개팅 후 집으로 몇 번 전화가 걸려왔다던데

엄마는 과 선배인 줄 알고 매번 그 선배에게

"얘가 맨날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선배에게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건 정파가 달라서였다. (하하.... ^^;;;;;)

우리 정파에는 남자가 정말 없었는데 어쨌거나 같은 정파남자랑 연애했고

그 남자가 제대한 후 채였음.

그 애의 아버지는 나와 그애를 불러놓고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했었는데

그 애는 그런 길을 선택한 듯.

제대 후 얼마 안있다가 94학번 영문과 여학생을 사귀었다지.

예의가 없었어 걔는. 관계에 대한 예의도, 사랑에 대한 예의도.

정리를 원했으면 순순히 헤어졌을텐데. 삐삐로 이별통고를 하고 말이지.

나중에 그 둘은 나란히 9급 공무원과 은행원이 되었다 한다. 

뭐 잘 살고 있겠지.

늦게 군대를 간 우리 정파의 다른 남자애가 휴가를 나왔다가

학교에서 자취를 감춘 내게 전화해서 물어봤었다.

"어떻게 된 거니?"

나도 잘 모르겠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 하니

답답했는지 그애가 알아본 게 저 위의 내용.

노동운동하겠다고 울산으로 내려간 친구를 

군복입은 그 애와 함께 만나러 갔었는데

울산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실연하면 여자입장에서 손해보는 기분인데 그런 생각 하지마.

그냥 끝난 거야."

 

그래 그냥 끝난 거야.

실연과 함께 학교 혹은 운동과 관련한 모든 인연을 끊었다.

연애남이 그립다거나 그와의 이별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쉽게 끝날 관계였다면 나도 내가 좋아했던 남자를 사귈 걸,

하는 후회가 너무 커서 관련된 모든 장소, 모든 사람들을 보는 게 다 힘들었다.

뭐 그 후로 인터벌연애라고 부를만한 연애를 몇 번.

인터벌연애라는 건 요즘 돌아다니는 뉴욕발 신조어인데

나는 벌써 93년에 인터벌연애를~ 호~~

   

 

결혼은 M선배와 할 뻔 했었다.

엄하고 까다로운 우리 오빠가 M선배를 마음에 들어해서 결혼준비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M선배는 나의 다큐 선생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느라 소수정예강좌를 들었는데 거기 M선배가 있었다.

M선배는 삼성을 다니다 영화를 하겠다고 그만 둔 상태였는데

M선배의 엄마는 "너만 M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말을 자꾸 반복했다.

결혼계획은 무산되었고  우리는 오래 힘들어하다가 헤어졌다.

 

M선배와 헤어진 후 오빠나 언니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세계의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먼저 결혼한 대학 동기들도.

고시 패스 혹은 대기업맨들.

그렇게 만난 남자들은 나쁘진 않았다.

아니 다 괜찮았다. 

적당히 진보적이었고 사려깊었으며 젠틀했다.

사실 한 두번 만나고 말았으니 나쁜 인상을 받을 틈이 없었지.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더이상 그런 자리에는 나가지 않았다.

내 결정에 대해 오빠가 이유를 물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파트너에 대해서도 어떤 역할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그런 역할 수행 못한다. 나는 다큐멘터리 만들면서 살겠다."

오빠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가 연극배우와 만나는 경우도 봤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세상이 그 사람을 다 설명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오빠, 대학 캠퍼스를 거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만남이란 게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의 집안이 어떤지를 따진 후에 이뤄지는데

그렇게 성사되는 만남이라면 처음부터 기대가  있지 않겠어?

오빠는 그렇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나는 M선배의 엄마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모든 삶은 다큐멘터리에 맞춰졌다.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남편과 결혼한 것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평생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살 수 있을 것같았다.

가난같은 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는 내 한 몸을 건사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니까.

게다가 남편에게는 부모도 없다.

남편에게 부모가 없는 것이 내가 선택한  조건은 아니었다.

내게 남편과의 만남을 추천하던 남편의 동료들이(그러니까 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이)

"우리 부제님 어때요?" 하던 그녀들이

어느 날 술을 마시며 속내를 들려주었다.

우리 부제님은 가진 게 없고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당신이 그에게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 라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렇게 16년.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그건 선택에 따르는 댓가이니 감수하며 간다.

 

사무실 동료 MOON의 결혼 후 나는 몇 번 안타까워하며 말했던 것같다.

"너의 아내에게 우리의 생활수준을 확인시켜줘"

독립다큐멘터리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을, 옷차림을, 취미를, 기호를, 조절하는 일이다.

하지만 MOON은 그러지 않았다.

상류층 부모가 제공했던 삶의 ATTITUDE로부터 많이 벗어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MOON은 고군분투한다.

알바나 교육자리가 생기면 제일 먼저 MOON에게 양보하는 것도

그런 MOON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JUNE이 결혼한다 했을 때 우리는 다 말렸다.

나는 이미 MOON으로도 충분했다.

얘들아..... 결혼은 사랑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저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결혼해서 사랑하게 된 것 뿐.

 

MOON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JUNE이 사무실을 그만 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그걸 알아.

독립다큐감독으로 15년을 살고서 이제 그만 두면 어디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올 한 해, JUNE에게 여러 자리를 소개해줬지만 JUNE은 번번히 떨어졌다.

인터뷰자리에서 면접관의 마음 하나 잡지 못하면서 바깥생활을 버틸 수 있을 것같아?

가지 마라. 가지 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제는 모두 떠나버린 사무실 여자 후배들은 D선배가 

"결혼을 하려면 하루처럼 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주곤 했다.

그 말이 맞아.

결혼과 작업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조직해야해.

그게 우리 운명이야......

 

나는 과연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찬찬히 고민해볼 일

 

근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즈미 타테이시가 온다!

하지만....

어제 메일 받고 지금 들어가보니

벌써 매진....(은 아니고 2층 구석자리 몇 개만 남아있음....ㅠㅠ)

https://youtu.be/rt2mOtZcj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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