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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3

하루님의 [] 에 관련된 글.

 

 

아주 어두운 글이니 가라앉은 이들은 그냥 지나가길.

 

일주일 전, 15년 정도의 시간을 건너서 누군가가 나를 만나러 왔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엄청 대단해보이지만 사실관계만 말하자면

대학 후배가 내게 전화를 했다.

서울에 올 일이 있어서 잠깐 보자고 했는데 점심 때엔 시간이 안되니

저녁시간을 잡았고...그리하여 묻어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개구장애 <엘도라도>

 

 



1.

나는 죽음이 무섭다.

수많은 죽음들을 겪어왔지만 내게 흔적을 남긴 두 존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 미사시간마다 '별세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의 아버지와 S를 위해 기도한다.

S는 같은 과 91학번 후배이다.

솔직히 나는 그애가 91학번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내게는 다 거기서 거기다. 간신히 후배와 선배, 그 경계만 남아있을 뿐.

 

그애는 같은 학회의 후배였고 함께 한 시간은 6개월을 넘지 않는다.

3월이었나, 학회 후배들이랑 술을 먹는데 그 애가 토를 하며 밖으로 나갔고

아마도 그애보다 더 술을 많이 먹었을것같은 나는

까페에서 화장실까지 놓여있던 그 자취를 손으로 치웠다.

나는 그 때의 그 기분을 지금도 기억한다.

내 아기들의 토를 치울 때 더럽다 느끼지 않는 것처럼

20대의 나는 그애의 토가 전혀 더럽지 않았다.

그 땐 내가 취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그애가 나한테 그런 존재였다고.

나의 아기들만큼 사랑했고 아끼던 존재였다고.

이런 평가는 후에 덧칠하는 거라 진실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애는 여름에 죽었다.

그렇게 떠나보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남의 과외집을 다니고 선배의 방에 얹혀지내던 그 여름에

그 애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그애를 보러갔었다.

그냥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애는 의식이 없었다.

방학 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노동일을 하던 그애는

무슨 줄을 풀다가 3층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철근이 송송 돋아나있던 아래에 떨어져 그애는 크게 다쳤다 했다.

 

나는 과외가 있는 날은 가지 못했지만 틈틈히 그애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애는 갑자기 죽었다.

죽은 후에도 건설사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해 장례는 쉬이 치러지지 못했다.

그애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냥 멍멍했다.

장례식장에서 그 애의 엄마를 보았다.

까맣게 탄 얼굴에 주름이 많았던 그 애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학비를 혼자 벌어서 다니던 애라고.

막내였던 그애. 그 애의 형들은 깍두기 머리에 배바지를 입고 다녔다.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우스개소리를 해주기도 했었다.

너무 심심해서 벽에다 머리를 텅텅 부딪혔던 이야기.

보상을 위해 장례를 며칠 미루던 그 시간동안

그애의 형들이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기도 했다.

 

울음은 갑자기 터졌다.

화장터에서 타고 나온 그 애의 자취를 보았다.

사람이 그렇게 깨끗하게 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날릴 듯한 가루. 골반 께에만 남아있던 몸의 흔적들.

멍멍하게 바라만 보다 어딘가로 가는 영구차 안에서

나는 갑자기 울음이 터졌던 것같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흐느낌에서 시작되어서

걷잡을 수 없이 통곡을 하는 나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던 것같다.

나중에 차에서 내리자

남도 어딘가에서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그 애의 깍두기 머리 형이

"언제 만나서 밥 한 끼 하자"고 했다.

축제 같았던 그 애의 장례식 내내 우스개소리만 하던 그 애의 형.

 

2.

97년은 참 힘든 시간이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짤렸고

나는 그래, 지금이 기회야, 라는 기분으로

푸른영상 자원봉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독립이라는 것을 했다.

한 칸 방을 전세로 얻었지만 공과금이며 생활비가 없었던 시절.

늦은 밤, 은평경찰서 앞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는 러시아에 전화를 했었다.

언니, 내가 처음으로 백수가 되었는데 돈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말이야 

방 구하느라 생활비가 없다. 나한테 100만원만 빌려 줘.

먼 데 사는 언니가 돈을 보내줬다.

그해 겨울을 나는 언니가 보내준 돈으로 살았다.

 

그러다 대학 선배를 만났다.

감히 멘토라고 부를 만큼 나의 길잡이였던 언니.

그 언니가 내게 연락을 해왔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긴 얘기를 했다.

과외 몇 개를 하면서 생계를 꾸린다길래

"저도 한 개만 소개해주세요" 라고 했더니

언니가 그랬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들다"

 

힘들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여유가 없다는 건 마음 안에 완충지대가 없다는 거고

그래서 그런 시기의 일들은 깊은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 때 그 말에서 내가 맺었던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보았다.

과외 한 개를 나눠 가질 여유조차 없는 얄팍함.

 

하지만 나는 달랐을까?

 

3.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S의 사정을 알았다.

주름깊은 그애의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까운 아들, 내 착한 아들...통곡을 할 때

처음으로 그 애의 사정을 알았다.

 

그 때 나는 휴학중이었다.

학교 다닐 마음도 없었고 다닐 여력도 없었다.

자퇴를 하겠다는 내게 엄마가, 울면서, 엄마가

"내가 능력있는 엄마였다면 니가 이러겠냐.

학비도 못 대주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겠냐" 며

자책하며 통곡할 때 짜증이 나서 자퇴조차도 못하면서

휴학을 한 채로 나는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내가 그 애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내가 그 애에게 과외를 소개해주었더라면

내가 그 애하고 머리를 맞대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할 수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애는 뙤약볕에서 노동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친 몸으로 노동일을 하다가 3층 건물에서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어쩌면 지금 살아서

15년만에 나를 찾아온 또다른 S처럼

변해버린 모습으로 하지만 공유하는 기억 때문에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어색해하며 또 적당히 반가워하며

우리들의 빛나던 20대에 대해서 추억을 나눌 수도 있었을텐데.

 

죽고나서야 그 애의 사정을 알았던 나는

가끔 그 때 그 시간이 못 견디도록 후회스럽다.

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만났을까?

왜 사람을 그런 식으로밖에 만나지 못했을까?

왜 나는...

 

 

4.

일주일 전에 시작한 글을 이제사 마무리하다.

늦은 밤, 차가 끊긴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다 내리는 비를 보았다.

아스팔트에 쉴새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좀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집으로 왔다.

맺다 만 이야기,  귓가에 맴도는 여운들.

사무실에 돈은 바닥났고

우리는 MB 5년 동안 살아남아야한다는 이야기를 우스개처럼 했다.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을 방법들을 교환하고

떠나버린, 혹은 떠나보낸 연인들과의 실패한 연애의 원인을 진단하다가

지금 옆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확인도 하고

그러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뿔뿔히 집으로 향했다.

 

떠나간 것은 떠나간 대로

잊혀진 건 잊혀진 대로

그렇게 흘려보내며 살아가야 한다.

너무 깊이 빠져드는 건

또다른 후회의 시간을 만들 뿐이니까.

지금 내가 숨쉬는 공기 안에서

또다른 후회를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

 

어제 포츈쿠키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가장 빛나는 것이라고 느끼는 건 당신의 실수"

이런 비슷한 문구가 나왔다.

현명한 포춘쿠기.

오래도록 끼고있었던 개구장애의 '엘도라도'의 가사처럼

아주 오랫동안

"내가 떠나온 그 푸른 바다가 가장 빛나는 곳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과거에만 머물러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지금을 느끼며 산다.

다만....

잊을 수 없는 나의 후배에게

S야,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후회하지는 않고 싶다고

그러고 싶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이러고 있다.

이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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