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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3
    스키너 성찰일지
    나르맹
  2. 2007/11/13
    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나르맹
  3. 2007/11/13
    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나르맹
  4. 2007/11/13
    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나르맹
  5. 2007/11/04
    펌/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나르맹
  6. 2007/03/25
    제4장 교육의 역할 : 의사소통과 경험의 성장
    나르맹
  7. 2007/03/24
    제3장 평생학습 : 학습의 생명력
    나르맹
  8. 2007/03/24
    교사의 역할?
    나르맹
  9. 2007/03/24
    지금 나의 삶에서의 교육, 학습, 메타학습
    나르맹
  10. 1999/11/30
    나르맹

2008/05/29

아직 여행은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행을 한달쯤 한 사람처럼 몸이 지친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다 가서 부딪혀보고 그때 가서 준비해도 되는 것들도
많을것 같은데 미리미리 준비한다고 혼자 끙끙대다가 기운을 다 소진한 느낌이랄까.
어떻게든 비용을 줄여보려고 용을 써보지만 정작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돈은
쑥쑥 빠져나가고 결과적으로 괜히 고생만 했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다.

사람들 연락하고, 런던 도착해서 이동 경로 짜보고, 헤이스팅스 들어가서 어떻게
적응할지 고민하고, 이것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한 느낌이다. 휴우.

이제 환전만 하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대애충 끝날듯.,,,아 홈스테이 연락도 해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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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노트북을 새로 장만했다. 지금 돈도 안 버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어떤 심리에서 기인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작년에 동생이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날 밤이 떠오른다. 모레인줄 알았던 ㅁㅅ의 입대일이 내일이라니. 사실 ㅁㅅ가 군대에 간다는 사실이 새로운 게 아닌데,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리고 ㅁㅅ는 공익이라서 4주 후면 맘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데. ㅁㅅ가 병역거부를 한다거나 등등의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것도 아닌데. 오히려 어딜 가든 잘 적응할 거라는 모종의 믿음이 생기는 사람인데. 근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하다.

 

ㅁㅅ가 보내준 헨델을 들으며.

 

그냥 기분이 묘하다.

 

이제 딱 2주가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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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을 앞둔 요즘의 일상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까지 이제 약 3주 정도 남은 셈이다. 비자 발급 받는 게 못내 불안해서 도쿄에서 일찍 돌아왔더니 일상은 지루할 만큼 한가하다. 핸드폰을 습관처럼 열어보지만 하루에 한 통 이상 연락 오는 날이 없다. 여행 돌아온 직후에는 무언가 불안해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만 정작 만날 친구가 별로 없다. 대학에 처음 들어와 사람들을 만날 때, 선배가 되어 새내기들을 만날 때의 자신감들을 떠올리다보면 마치 그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극도로 방어적이 되었다고 해야할까. 일본 여행 가기 전까지도 종종 만나서 놀던 친구들인데도 지금 만나려는 생각을 하면 움츠려들게 된다. 그래서 익숙한 사람만을 찾게 되는데, 익숙한 관계에선 무언가 새로운 활력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함께 여행을 갔던 아랫집 사람들이 편하긴 하지만 여행 때 너무 붙어있어서 그런지 아직 그렇게 보고싶단 생각은 안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대문까지 나가는 게 귀찮아져버렸다. 결론은 혼자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거다.

 

비자를 접수하러 갔던 영국 비자 센터 머시기 하는 곳의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듣기론 파견직 비스무레한 한국인들이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라는데 들어가는 입구에서 온 몸을 수색당하고 가방마저 이 잡듯 수색을 당하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일본 들어갈 때 지문 찍은 것처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웬만큼 모른 척 지나가야지 하는데 내 가방을 하나하나 거칠게 뒤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곱씹을수록 아니꼬왔다. 소지품 검사의 법적근거가 뭐냐고 말한마디 해볼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지만 내 소심함에 쉽게 말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혼자 끙끙 앓거나 다른 사람에게 한풀이 하거나. 쨌든 비자 신청까지 하고 나니 요 며칠은 그냥 부웅 뜬 기분이었다.

 

영국가서 생활할 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인터넷으로 뒤지며 살까말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가격 비교도 해보고. 그러다보면 시간이 어느 새 훌쩍. 눈도 침침해진다. 이민가방을 뭘로 살지, 옷 신발은 뭘 들고 갈지, 머리는 어떡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피곤해진다. 아무래도 혼자 어딘가로 훌쩍 옮겨지는게 불안하긴 한가보다.

 

며칠 전에 천하장사 마돈나를 봤다. 이 역시 한참 쇼핑도 아닌 서핑도 아닌 것을 하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요즘 읽히는 책도 별로 없고, 예전에 다운 받아 놨던 영화 중에 골라서 보게 되었다. 효웅이 생각이 많이 났다. 떠나기 전에 여주에 한번 더 들러야겠다.

 

이번 주부터 일정이 약간씩 바빠질 듯 싶다. ㅁㅅ도 만나고 지영이랑 여행도 갔다오고 전없세 엠티도 가자면 가야하고 계속 만나자 만나자 못 만난 사람들도 봐야하고. 허허.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바쁘면 또 뭔가 불안해지고. 이 상반된 감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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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의 여파

 

 

정말 대책없었던 여행. 귀국 하루 전날까지도 어떻게 한국에 돌아올 지 결정을 못해서 고민하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 이외의 6명의 사람과 항상 함께 했던,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이동을 하던 여행.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개인들 여럿이 모여 공동체생활을 영위하는, 분위기가

좋을 땐 좋다가도 늘 잠재하는 긴장과 갈등(?)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는 순간에야

맛볼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

 

오사카로 가는 배 안에서 마시던 맥주와 소주, 오사카 도톰보리까지 걸어가서 먹었던 타코야끼,

교토의 비오는 거리, 정유진씨 방을 가득 메웠던 우리의 발냄새와 거기서 먹었던 맛있었던 차와 과자들,

교토대학의 학생식당 그리고 식민지기 교육 연구를 한다던 교육학 연구소 건물, 우리밖에 없었던 교토근교의 캠핑장, 비오는 날 힘들게 달려 도착했던 산골 오지의 어느 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맛본 가장 맛있었던 고로케 한입, 여행 시작부터 마지막 비행기에서까지 매일같이 마시던 맥주와 사케.

 

한국 시골 풍경과는 다른 일본 산천의 모습, 도로 주행 방향의 낯설음, 도처에 널린 콘비니와 그곳에서의 간단 식사, 한낮의 따가운 햇살과 새벽에 싸늘한 공기, 캠핑장의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 러브호텔의 음침한 분위기, 나고야의 유스호스텔, 도쿄로 기차를 타기로 하던 날 저녁 둘러보던 호텔들, 새벽에 도쿄 밤거리를 헤매며 숙소를 찾던 기억, 판다 세미나를 했던 클럽의 자욱한 담배연기, 어설프게 생맥주를 따라보던 기억, 막차 시간에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던 기억, 아침마다 일어나서 1층 슈퍼에 나가 로스를 쓸어오는 일, 아침마다 밥을 하던 용석과 나동 오리. 요요기 공원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홍대거리 혹은 신촌 뒷골목 분위기를 연상시키던 코엔지 거리, 남대문 시장을 연상시키던 우에노 어딘가쯤의 무슨 거리까지. 아 그리고 돈키호테에서 흘러나오는 로고송.

 

오늘 아침은 눈을 떴는데 옆에 아무도 없다. 내 침대의 정경에 낯설지 않은 건 여행의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일지도. 한편으론 오늘 하루 아무런 일정도 스케쥴도 없다는 사실에 자유로우면서도 무언가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여행의 기억에서 아직 온전히 되돌아오지 못했다는 반증일까.

 

함께 붙어있으면 조금 거리를 두고 싶던 사람들. 막상 이렇게 또 혼자 있으니 살짝 그립기도 한,

이 복잡한 심리구조. 이번 주말까지는 푸욱 쉬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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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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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 성찰일지

행동주의 심리학의 유용성을 믿는 사람들은 천 명, 만 명의 아이들이 있더라도 특정한 자극과 반응 그리고 강화라는 조건 속에 아이들을 ‘투입’함으로써 교수자가 의도하는 바대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 같다. 관찰가능하고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행동주의 연구에서 개인의 내재적 동기나 주관적 감정 들은 말 그대로 블랙박스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이론을 비판만 하기에는 실제 교육현장에서 갖는 이론의 유용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극들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다는 점에서 긍정할 수 있다면, 보통 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10세 전후의 아이들은 참으로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교사인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거나, 수업에 듣지 않을 때 그 아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츄파춥스 사탕 한 개일 때가 많다. 아이들의 반응에 따라 강화의 종류를 달리하는 토큰 기법의 효용성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교사가 특정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특정한 반응양식들을 토큰기법과 같은 행동주의적 접근을 통해 이끌어내고자 할 때, 정작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반응의 중요성이나 내재적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는 외재적 강화물에만 정신을 팔아버릴 때이다. 세부적인 스텝마다 강화를 제공하여 애초에 목표했던 최종적 학습목표에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 스스로가 특정 행동양식을 학습하고 표출하는 것의 중요성이나 의의를 모른다면 맥 빠진 수업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적절한 내재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실제 기대한 반응이 도출되었을 때 적절한 강화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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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 정보처리이론에서 정의하는 학습 혹은 교육
“학습자 외부로부터 정보(자극)를 획득하여 저장하는 과정”(127쪽),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학습한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새로운 지식)이 관련이 있는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홈구멍에 채워지거나 관련을 짓게 됨으로써 새로이 변형된 쉐마(schema)를 갖는 경우를 의미한다”(133쪽), “쉐마의 재구성 과정”(134쪽)

* 학습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 후에 더 나아가 교육을 “다양한 스키마를 갖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맥락상 타당한 것일까? 여기서의 스키마는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말 그대로 정보처리과정으로서의 기억에 한정된 느낌.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사물들에 대한 내 가능적 행동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신경계가 발달할수록 뉴런들의 수와 조합가능성을 더욱 증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더욱 넓아진다. 따라서 지각도 풍부(다양)해지는데 결국 ‘기억’은 단순히 암기력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양식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정보처리이론은 학습자의 능동성, 인식과정에서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분명 행동주의와는 대립지점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론이 학습전략으로 적용되면서 결과적으로 단기/장기 기억력을 높이기 위한 단지 하나의 툴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기억을 몸을 구성하는 일종의 정체성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두뇌에서 일어나는 기억력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요즘 내가 좋아하게 된 소설가 김연수가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의 현실은 “이제 불안을 갈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내면적 안전보장의 시대. 다들 더 높이 오르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전락하지 않으려는 시대”라고. 그렇다면 정녕 불안이라는 가치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어떤 스키마가 필요한 것인가, 우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한 개인의 가치관을 담아내기에는 정작 정보처리이론에서 말하는 스키마라는 개념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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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Piaget 이론의 세 가지 중요한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은 환경 내에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둘째, 지식의 발달은 이전의 인지구조로부터 새로운 인지구조를 건설하는 과정에 기초하며, 새로운 구조들은 환경에 지적능력이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셋째, 인지발달에 영향을 주는 근본 요소는 물리적 환경, 사회적 환경, 성숙, 평형화이며 이 중 평형화는 학습자의 자기조절과 자기수정 과정이다(교재 159쪽 참고).

Piaget 이론에 근거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학습자가 된다. 여기서 유기체란 신경계를 가지고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 세계와 직면하여 자극을 수용하고 이에 따른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때 종들의 진화 수준 혹은 우열성 여부는 신경계의 복잡성, 자극과 반응 사이의 텀 그리고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양식의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Piaget 이론에서 인간을 단순히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진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인간 학습에 대한 근본 가정 자체도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학습 더 나아가 교육을 규정함에 있어 더 이상 보편타당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벗어나서,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들이 경합하는 과정으로 학습을 규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지식의 선지자로서의 교사라는 전통적인 규정 역시 해체가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Piaget 이론에서 학습은 ‘정상적인’ 유기체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학습자의 자극을 촉진하는 존재가 꼭 교사로 한정될 필요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Piaget 이론이 교육을 고민하는 데 시사하는 바는 이성 중심, 지식 중심으로 학습을 규정짓는 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 특히나 근대적 교과지식의 학습과 이로 인한 안목의 형성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교육철학․교육과정학자들의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생리학적 접근에서 출발하는 Piaget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될 수 있는 교육의 개념은 결국 ‘삶의 방식의 변화로서의 학습’이며 이는 현재적 삶과 괴리되어 추상화된 지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교과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에서는 단순히 Piaget 이론만을 충실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뭇 사람들이 말하는 교육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 발달의 과정이 동화․조절․평형화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되었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인지 발달의 과정을 추동하는 자극은 어떤 기준으로 교육적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사(성인/정상인/국가)중심적 교육과정으로 인한 자극의 편파성을 문제삼는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은 아이들을 말 그대로 ‘방목’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초적 쾌락에 대한 유혹은 연령․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학습의 저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자극과 반응이 동시적인 유기체는 아메바인데 인간은 아메바가 되기에는 머리가 너무 커버린 존재들이지 않나. 자극과 반응 사이에 텀을 둘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반응 양식을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습에 있어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합하는 과정 속에서 학습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을 때 인간(배우는자)의 자율성은 어느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양자 모두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교육적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뜨거운(hot) 관계도 아니고, 쿨(cool)함이라는 명목 아래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행사하는 ‘방목’도 아닌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특히나 요즘 나에게는 더욱더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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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은 한 개인의 행동의 층위를 개인과 환경으로 이론적 분리를 시도한 후 한 쪽에 강조점을 두는 ‘행동주의자’나 ‘인간중심주의자’들과는 달리 환경, 개인 내적 요인과 행동이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가정을 하였다. 이 이론에서 학습과정은 학습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련의 인지적 과정이며 행동의 언어적․시각적 부호 획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교재 213-215쪽 中) 그리고 학습의 과정에서 관찰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실체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관계적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나’라는 정체성은 결국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정 부분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함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물론 좋아하지 않더라고 상호간의 관계가 시작되면 밉든 곱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치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과 이에 동일하게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는 일부 시위대의 관계처럼.


관찰학습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종의 자기효능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 관찰하고 아무나 모방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들게끔 하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일시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유의미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관찰 그리고 모방, 이 과정이 ‘학습’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그런데, 내가 요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누구)일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는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번뜩 스쳐간다.


한국에서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어떤 모델을 관찰하고 모방하게 되는가. 바람직한 모델에 관한 논의가 곧 교육과정논의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자신을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로 묘사되는 이순신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회자되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혹은 고액권 지폐의 인물에 ‘남편에 순종하고 자식들에게 인자한’ 신사임당이 선정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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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UCC의 감동, 원더걸스를 넘어서자

글쓴이 : 바리  

원더걸스의 ‘텔미’를 재연한 UCC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선유도 공원에 다녀왔다. 기분이 좋아 뛰어다니는 아이를 카메라로 찍었다. 사진과 동영상을 총동원하여 앞에서도 찍고 뒤에서도 여러 장 찍었다. 나뿐 아니라 공원 여기저기가 카메라를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눕거나 연인과 포즈를 취한 ‘설정샷’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퍼진 풍경이다. 이렇게 찍힌 사진들은 오늘이나 내일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라갈 것이다. 나도 짬이 되는대로 이번 외출에 대해 포스팅을 할 것이다. 특히 동영상은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다. 글보다 쉽고, 그림보다 생생하고, 무엇보다 소박한 연출자가 되어 찍어 올리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UCC다.


따지고 보면 이 재미는 PC통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PC통신 동호회에 처음 글을 올리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전까지 내가 만든 창작물은 모두 ‘과제’를 위한 것들이었다. 독후감, 그림일기, 백일장 …. 일기나 편지 같은 자발적 창작물은 아주 은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글을 발표한 것이다! 너무나 감격해서 내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조회수를 확인하곤 했었다.


감격은 나의 것만이 아니었다. PC통신과 인터넷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오래도록 인류가 기다려 마지 않던 미디어라 할 만 했다. 공공 언론이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인쇄물 출판 자체가 철저하게 통제되었던 왕과 종교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표현의 자유’가 선언된 것이 17세기였다. 그러나 4세기가 지나도록 표현의 자유는 형식적인 이름에 그쳐 있었다. 근대시민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언론과 출판 권력을 장악하였고 20세기 들어 대형 언론 기업이 등장하면서 언론 독점은 최고조에 달했다. 전세계 민중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독립미디어에 대한 모색이 활발했던 그때, 컴퓨터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인터넷에 감동받다


애초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소소한 행정 서비스를 위해 사용되던 컴퓨터 네트워크에 민주주의 기획을 접목시킨 것은 대중 스스로였다. 1986년 프랑스 학생 운동가들은 미니텔을 사용하여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93년에는 미국 산타모니카주의 활동가들이 지역 네트워크 PEN을 이용해 노숙인 편의시설의 확충을 요구하는 지역 주민과 노숙인의 주장(SWASHLOCK : Showers, WASHers, and LOCKers)을 시정부에 관철하는 데 성공하였다.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 농민혁명군 사빠띠스따가 인터넷에 신자유주의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연대를 호소한 것은 1996년이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시애틀 WTO 각료회의 반대 투쟁을 계기로 독립미디어센터(Indymedia center)가 설립되었다. 이무렵, 인터넷의, 인터넷에 의한 민주주의가 만개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빛나는 성과는 대중 저널리즘의 등장이었다. 신문과 방송국을 넘어, 이제, 대중은 스스로 언론이 되었다. 이메일과 홈페이지,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직접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에 의한 인터넷 사용은 저널리즘 관행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언론인이며 저널리즘이 어디에서도 가능한” 형태로 저널리즘 관행을 확대[하였고] … [이러한] ‘대중적 글쓰기의 민주화’ … 과정은 의제설정과 의사결정자로서의 저널리즘 역할의 잠식을 가져오는 것 같다.
<얼터너티브 인터넷>
 
 

최근에는 특히 영상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대중 창작물이 쏟아지고 있다. 텍스트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던 커뮤니케이션은, 영상물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즐거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성의 논리보다는 감성의 논리로 제작하고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와 동영상을, 대중은 특히 사랑하였다. 원소스의 의미를 비틀어 손쉽고도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는 패러디 문화를 사랑하였다. 대중적으로 창작될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UCC는 과거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대중적인 표현 매체이다.


대중 저널리즘의 의미는 단순히 대중이 직접 발화한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대중 창작물에는 위계적인 언론 권력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적 문화가 깃들어 있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팔십 노인부터 초등학생까지 갖가지 의견을 올리고 토론한다. 신문과 방송을 장악했던 권위적 편집진과 엘리트가 네트워크에는 없다.


지배적 언론 기업은 객관적 저널리즘을 표방하면서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체제를 공고히 다지는 데 힘을 쏟아 왔다. 이들이 주도해 온 언론 환경에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대중이 각자 자기 관점과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그 자체로 급진적인 것이었다. 2006년 8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폭격했을 때, 이제 우리에겐 CNN 뿐 아니라 블로그가 있었다. 레바논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하루하루 올리는 경악과 공포에 찬 일상 이야기 속에서는, 절대 전쟁이 게임처럼 보이지 않는다.


1993년 웹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일반 대중이 월드와이드웹을 쓰게 된 이래로, 불과 십 여 년 만에 언론 환경이 일대 격변을 겪은 것이다.

2006년 7월 16일 레바논 폭격 당시 마젠 케르바즈의 블로그에 올라온 그림
“어떻게 하면 이 소리를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자본과 국가도 인상깊게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성은 사실상 시장성과 다른 말이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급진성으로부터 유래되었던지, 시장성이 확인된 순간 철저한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다. 반자본주의 코드조차 소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놀라운 능력은 체게바라 커피잔에서 만날 수 있다. 상품이 되는 순간, 정치성은 사라지고 가격만이 남는다.


인터넷에 대하여 자본이 관망하던 시기는 짧게 끝났다. 인터넷에는 충분히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고 있고 그만큼 이윤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재구조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중이 일구어온 인터넷 점유는 자본의 재점유에 포섭되고 있다.


이때 기술은 정치적 과정을 위해서 선택되고 개발되고 사용되는 구성적 산물이다. 소위 ‘한국형 포털’의 득세를 보라. 한국형 포털은 분산형 월드와이드웹에서 놀랍도록 폐쇄적이다. 하이퍼텍스트를 넘나들며 서핑하는 네티즌을 자사의 사이트에 묶어놓기 위한 각종 기술과 인터페이스와 마케팅 기법이 동원되었고, 어느 정도 목표 달성에 성공한 듯 보인다. 한번 포털에 접속하면 메일, 카페, 블로그로부터 지식 검색, 뉴스 검색까지 원스탑으로 이루어지면서 네티즌의 클릭은 모두 광고수입의 원천이 된다.


서비스명

월 방문율

다음 한메일

68%

다음 카페

73.3%

싸이월드 미니홈피

69%

네이버 지식인

79.2%

네이버 블로그

84.5%

 

자료 : 코리안클릭 2007년 10월

우리나라 국민이 3회 이상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나날이 줄어 지금은 15개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권력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설립한 후 인터넷을 규제하기 위해 이런저런 모색을 해온 국가 권력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7년 정보통신망법(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과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통해 윤곽이 드러난 국가의 인터넷 규제 방향은 포털을 이용한 것이었다.


인터넷 실명제로 신원을 확인하고, 로그기록으로 각 이용자가 읽고 쓴 인터넷 활동을 추적한다. 이용자가 올린 글에 대해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사상 검증을 하고 명예훼손이라는 명분으로 기업 비판을 순화시킨다. 이 모든 것은 포털의 국가적 의무이고 따르지 않으면 처벌받거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포털에 가해지는 통제는 곧 대중에 대한 통제이다.


인터넷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인터넷 재구조화와 국가권력의 감시와 검열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터넷 이용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매스미디어에서보다 더욱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언론에 독자투고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까보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보다 더한 편집 검열을 넘어야 하지만.)


특히 이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비판적인 발언들과, 초창기 인터넷에 넘쳐났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다. 심지어 선거 시기에도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인 후보자, 정당 비평이 단속되고 있다. 빛 좋은 ‘참여’가 인터넷에서는 개살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시장성 있는 정보에 대한 소비, 연예 오락 정보에 대한 열람과 재연은 권장되고 있다. 연예인의 활동, 사생활, 드라마와 영화, TV 오락프로그램에 대한 글, 이미지, 동영상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재일뿐더러 포털의 탑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포털의 탑에 노출된 연예 오락 정보는 대중의 호기심을 다시 자극하며 클릭을 유도한다.


연예 오락 정보의 만개


선거법의 규제로 위축된 네티즌의 UCC는 요즘 원더걸스라는 소녀그룹과 그들의 히트곡 <텔미>에서 꽃피고 있다. 텔미 뮤직비디오 원본 뿐 아니라 가요프로그램 출연 영상, 동료 연예인의 변주 영상도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이에 대한 감상과 화면 캡쳐가 블로그와 포털 갤러리에 넘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벤트로부터 시작된 듯한 텔미 댄스 따라하기 UCC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생, 남학생, 일반인 뿐 아니라 군인, 교통경찰이라는 특수 계층(?!) 네티즌까지 손수 제작한 댄스 UCC를 계속 올리고 있다.


텔미 UCC는 즐겁다. 나도 포털에 들어갔다가 학생들의 텔미 UCC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수학여행 때 오랫동안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선보이듯, 그들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호흡을 맞춰 춤을 추고, 그것을 찍고, 올리고, 댓글을 읽으면서 환호했을 것이다.


원더걸스 뿐만이 아니다. 포털에 들어갔다가 이쁘장한 연예인 사진이 뜨면 무의식 중에 클릭부터 하게 된다.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연예인의 소식은 이웃사촌처럼 정답다. 특히 이용자가 직접 창작한 연예 오락 정보는 아마추어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자발성이라는 명목으로 한번 걸러진 연예 오락 정보는 노골적인 장사치의 것보다 참신해 보이고, 지인에게서 듣는 입소문과 유사한 신뢰성을 갖는다. 포털은 떡볶이 가게 수다처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즐거우면 안 되는가?


하지만 정신없이 클릭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연예 오락 정보는 철저한 상품이다. 네티즌의 소비는 설정된 것이다.


자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1970년대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자본이 정보화 전략을 선택한 이유는, 시장을 확대하는 한편 비시장 영역을 전유하기 위해서였다. 금융의 세계화와 시장 개방을 위해 국제적인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면서 동시에, 자본은 정보 상품을 발굴했다. 이를 위해 저작권이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유럽에서 18세기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작권 체제는 1994년에 ‘세계무역기구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최종협약안’(WTO/TRIPs)이 성립되고, 이어서 1996년에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저작권조약’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실연·음반조약'이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전세계를 아우르는 국제협약으로 확립된다. 대중적인 소설, 음악, 영화 등 저작물에 대한 이용자의 향유와 개작이 저작권 체제 하에서 통제되기 시작했고 출판사, 음반사, 영화제작사 등 대형 저작인접권자들의 강력한 ‘불법복제 단속’으로 ‘저작권 괴담’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자본은 동시에 이 신흥 시장을 육성하고 소비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연예 오락 정보는 단순히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 문화 상품들과 저작물에 대한 소비로 반드시 연결된다. 소희를 좋아하면 소희가 노래하는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소희가 등장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영화를 관람하고, 소희가 입은 옷을 입고 싶어진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저작권으로 어르고, 다른 쪽으로는 연예 오락 정보의 소비를 유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범람하는 연예 오락 정보 속에 모든 것이 연예 오락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즐거우면 장땡이다. 언젠가는 지나가는 유행가처럼 흘러가는 대중의 변덕을 붙잡기 위해 이미지로 어필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시장적 관계로 수렴된다. 정치조차도.


이미지만 남은 정치


현대는 이미지 정치의 시대이다. 여기에는 TV의 등장이 기여한 바가 크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정치 엘리트와 대중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잘생기고 옷도 잘 입고 농담을 잘하는 정치인들이 유력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정치과정의 이면은 추잡하기 이를 데 없다.


대중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정치는 정치인 개인의 외모, 캐릭터, 그리고 그 인물과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다. 정책과 이념, 그에 대한 토론보다, 정치인에 대한 시각적이고 극적인 사건이 부각된다. 노란 풍선과 청계천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대개 ‘설정’이다. 정치 정보가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락적으로 구성되고 정치인은 연예인화하고 있다. 대중은 정치 또한 다른 연예 정보처럼 소비하도록 조장되고 있다. 그 결과 *사모, **사랑과 같은 정치인 팬클럽의 경쟁이 게시판마다 넘쳐나고 있다. 팬덤 문화 속에서는 정치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특정 정치인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만큼, 반대편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증오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과 더불어 이미 예상되었던 경향이지만,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정치도 즐거우면 좋은 것 아니냐고? 내가 보기엔 재앙이다.


문제는 정치 엘리트에 의한 정보 조작과 왜곡의 위험성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 정치에서는 면대면으로 만나 토론하였다. 그러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전자적으로, 즉 비대면으로 참가하면, 이면에 있는 정치 관료들이 권력을 쥐고 정보를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자신들의 정책의 집행에 대중을 이용하거나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대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중을 동원할 때 민주주의는 잠식된다.


또한 이는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정치의 사사화(privatization) 경향을 강화한다. 정치의 사사화는 정치 활동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칭한다. 정치의 시장화 현상으로 인해, 공공 정책은 공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경쟁하는 개인과 집단의 세력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게 된다. 연예 오락 정보처럼 다가오는 정치는 공공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 문제처럼 다루어진다.


지금 등장하고 있는 대선주자들의 UCC는, 원더걸스 UCC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미지로 대중을 현혹하고 어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니, 설정과 이미지 조작으로 가득 찬 정치는 결국 ‘부드러운 전제 정치’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원더걸스보다 흉악하다.


‘설정’에서 벗어나자


정치가 소비되는 경향은 포털로 인해 확대강화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블로그와 우리가 창작한 UCC가 설정된 의제들 안에 갇히고 있다. 포털의 매끈한 판매대 주변에서 맴맴 돌다보면, 어느덧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포털의 탑에 올라가는 정보들은 수많은 대중들에게 주목받고 비슷한 다른 정보들로 네트워킹되고 풍부해지겠지만 ‘탑’의 경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시장에서 상품화될 수 없는 정보, 곧 이윤으로 연결되지 않는 정보는 갈수록 희소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과거 우리가 인터넷을 점유했듯이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약한 고리, 권력의 누수 지점을 다시 찾아내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강력한 고리는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정치적 조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정치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출근해서 일하는 일상은 자본의 생산 과정 그 자체이고, 퇴근해서 소비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재생산 과정이다. 일상의 성찰은 이 모든 과정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니다. 진솔한 이야기는 TV드라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창조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매체는 아직 뺏기지 않았다. 글도 좋고, 그림도 좋고, UCC는 더욱 좋다. 패러디와 재연, 여전히 매우 좋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재치는 원더걸스 UCC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요즘 블로그들을 돌아보다 보면, 매우 소비중심적으로 구성된 일상을 만나게 된다. 많은 포스팅이 텔미와 태왕사신기, 그리고 맛집과 쇼핑으로 채워져 있다. UCC는 TV에서 방송된 인기 드라마나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캡춰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대중적 관심사라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그것들만은 아니지 않은가. 블로그조차도 판매대에 올라 낚시질을 할 필요는 없다.


좀더 성찰적이고 급진적이 되어 보자. 학교와 회사를 통해 체제적으로 억눌려져 온 이야기를 끌어내는 연습을 해보자. 나의 비탄, 나의 무력, 나의 분노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나를 소외시키는 사회 구조까지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 관심을 넓히자. 성별, 장애, 성적 취향, 인종, 민족적 이유로 소외받는 이들, 무한경쟁의 시대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다른 정치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말자.


무엇보다, 의심해야 한다. 우리의 힘은, 주류매체에서 주도적으로 제시되는 견해와 가치를 의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포털을 벗어나자. 내 블로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도, 모든 사람의 블로그가 똑같은 공원에서 비슷비슷한 설정샷으로 채워지고 있다면, 우리는 탈출을 꿈꾸어야 한다. 실명제와 임시조치에 저항하길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재연하고 패러디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서도 안 된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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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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