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15 20:21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필자 : 고인환 날짜 : 2006.07.26
 
  이현용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난ㆍ쏘ㆍ공』으로 약칭)은 예닐곱 번 읽은 듯하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몇 안 되는 작품의 하나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고등학교 시절, 성장 드라이브 정책에 소외된 서민들의 애환과 사랑, 그리고 절망을 막연하게나마 인식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대학 시절 다시 읽은『난ㆍ쏘ㆍ공』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절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문학에 입문한 이후 여러 번의 기회를 통해 다시 접하게 된『난ㆍ쏘ㆍ공』은 사실과 환상, 내용과 형식, 현실성과 예술성,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과거와 현재 등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문제의식을 제공하였다.
『난ㆍ쏘ㆍ공』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소설이다. 노동문학은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노동의 소외에 정직하게 대면하고, 이와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소설은 ‘근대성의 성취와 근대 극복’(백낙청)이라는 우리 사회의 이중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지양(止揚)하지 못했다. 마르크시즘(과학)으로 무장한 노동소설은 근대 극복이라는 과제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바람직한 근대성의 성취에 대한 구체적 탐색을 등한시하였다. 이제 극단적으로 밀고 간 부분(근대 극복의 열망)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고, 미흡했던 부분(근대성의 성취)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난ㆍ쏘ㆍ공』이 1990년대 중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작품은 민중소설의 ‘타자’였던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현실과 꿈의 긴장된 언어를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노동소설의 리얼리즘에 모더니즘적 요소를 음각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성, 욕망, 무의식 등의 미시담론을 거부하기보다는 노동소설의 새로운 자양분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현실에서,『난ㆍ쏘ㆍ공』을 다시 음미해야 할 필요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난ㆍ쏘ㆍ공』의 연작 구성은 시대 현실을 다층적․입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각 작품들마다 이질적인 화자들을 등장시켜 시대 현실을 다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 중산층, 상류층 등 다양한 초점 화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출함으로써 서로 대화적 관계에 놓인다. 대화적 관계는 어느 한 쪽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야기되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대화적 관계는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소설의 모순된 운명을 체현하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고 있다. ‘현실 속에서’라 함은 리얼리즘적 조건을 반영한다. 시대 현실에 정직하게 응전하며 이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태도야말로 문학이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의 하나이다. 반면, ‘현실 너머를 꿈꾸는’ 서사의 운명은 시대 현실의 반영만이 문학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유토피아를 포착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상력 또한 문학이 겸비해야할 조건이다.『난ㆍ쏘ㆍ공』은 이 둘의 경계지점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산문적 현실과 시적 상상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으로 표출되는『난ㆍ쏘ㆍ공』의 미학적 특질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난장이’,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씨의 병’ 등의 상징적 언표들은 산문적 현실과 길항 작용을 하며 현실을 다차원적으로 인식하는 데 기여한다. 근대화의 찬란함 이면에 가려진 암울한 현실을 음각하는 이 작품의 미학적 세계관이 자본의 논리를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이 지점은 타락한 현실 세계와 아름다운 상상력의 세계 사이의 교차로 표출된다. ‘난장이’가 사는 마을은 상상력의 상승 작용을 통해 달나라의 세계와 연결되고, 달나라의 세계는 근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힘으로써 현실 속으로 추락한다. 이러한 ‘상승/하강’ 작용은 동화적 아름다움과 산문적 현실의 혼종, 즉 꿈과 현실을 교차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닌데, ‘희망→절망→승화’의 효과를 낳는다. ‘난장이’가 꿈꾸는 달나라는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없는 시적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꿈이 없다면 누구도 불구적인 현실을 견딜 수 없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길항 작용이 자족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고,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난ㆍ쏘ㆍ공』의 독특한 미학을 창출하는 것이다.
『난ㆍ쏘ㆍ공』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양자를 구별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이다. 이는 나와 너가 공존하는 사회를 실현하기가 불가능한 근대 사회의 모순과 절망을 표출하는 것이며,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사회의 불가능함을 온몸으로 웅변하는 일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노동문제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방법론으로 구체화되고 있으며, 이는 리얼리즘적 세계인식과 모더니즘적인 기법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데 기여한다.
이제 ‘난장이’의 아들이 품었던 의문을 오늘의 현실에 되비추어 보자.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집에 살 수 있고, 고기도 날마다 먹을 수 있’는가? 아버지(난장이)는 ‘나쁜 사람’인가, ‘좋은 분’인가? 대답이 망설여진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의 소외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인간의 무의식까지 상품으로 포장되는 근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난ㆍ쏘ㆍ공』의 생명력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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