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언젠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박상천과 박희태가 대담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논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대담에서 느꼈던 것은 둘 다 참 말을 잘한다는 것이었고, 격렬한 논쟁이 그토록 재밌을 수 있다는 거였다. 박희태에 대한 인상은 그 때 참 깊이 박혔더랬다. 매우 논리정연하고 함축적이면서 언중유골이 두드러지고 그러면서도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던 박희태였는데, 연로하신 몸을 이끌고 국민성공시대를 이끌어가시려 하다보니 혓바닥이 굳어버렸나 보다. 말은 하는데 말 같잖은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예산안을 거의 날치기 수준으로 통과시켜놓고 나서 박희태가 내뱉은 말은 이거다.

 

"우리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는 당이라는 것을 국민들께 보였다"

 

하긴 뭐 자유선진당과 합치면 개헌의석에 육박하는 몸집을 가진 데다가 청기왓집 주인장이 뒷배도 든든히 봐주고 있겠다, 뭔들 못하겠냐 만은, 그러나 이토록 오만방자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과거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계산을 두고 하던 그 명민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게 느껴진다. 저 발언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두고 공포에 떨지 않을 인민이 몇이나 될까? 흠... 생각해보니 많긴 하겠다. 이 정권이 칼부림을 하는 동안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부류들이야 한나라당이 "뭐든지 할 수 있는" 당으로 계속 살아남기를 바라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거니와 행인은 저 발언을 보며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이고 한편으로는 분노다. 그래, 저들은 이제 뭐든지 할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게 바로 두려움의 원인이고 분노의 원인이다.

 

"뭐든지 할 수 있는" 당의 수장은 기왕 달리기 시작한 거 끝까지 가보자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다. 삽질의 명수 청기왓집 쥔장의 뜻을 이어받아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는 일성을 쏟아 놓는다. 역시 박희태의 발언이다.

 

사람 망가지는 거야 시간문제이긴 한데, 하긴 뭐 박희태가 말빨이 있었다뿐이지 언제 제정신이긴 했냐만은, 해바라기처럼 정권의 은사만으로 한 생을 살다가 지난 10년 간 '풍찬노숙'한 아픈 기억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젠 완전히 갈 데까지 간 인상이다. 사람이 이정도까지 망가지면 그 땐 자리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당분간 그럴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박희태는 저 두 발언을 통해 드디어 확고하게 한국 땅의 인민들과 전쟁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말 그대로 선전포고다. 죽거나 아니면 알아서 기거나 둘 중 하나를 이 땅의 인민들에게 요구한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박희태가 아무런 꺼리낌 없이 저런 발언을 하더라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선전포고를 받게 된 인민들이다. 그냥 앉아서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들고 일어나 결사항전을 해야 할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였다. 지금 그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립을 지키고 있다가 어느 한 쪽에서든 떨어지는 떡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한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없다. 자각을 하고 있던 하지 않고 있던 간에.

 

박희태의 저 염치없는 발언은 불행히도 뒷탈에 대한 근심없이 튀어나온 말이다. 물론 그 자신감이야 하늘을 찌르겠지만, 자신의 발언이 선전포고라는 사실을 인민들은 모르고 넘어가지 않을 거다. 싸우자고 하면 싸워주자. 까짓거, 어차피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선전포고는 오히려 우리가 해야할 판이다.

 

그리고 박희태의 이 오만방자한 선전포고는 이렇게 기록되어 영구히 인민들의 입으로 전해질 거다. 그리하여 인민의 봉기가 '침략전쟁'이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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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15:17 2008/12/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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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8/12/16 23:43

    행인의 [기록] 에 억지로 관련이 될라면 관련될 수도 있는 글. 일반적으로 "삽"이라 하면 얇게 갈리고 둥근 타원형에 약간 뾰족한 쪽과 발로 밟을 수 있도록 약간 두텁게 말려 있는 쪽으로 이루어진 쇠붙이판과 긴 나무로 된 봉과 역시 나무나 간혹 쇠붙이를 말아 붙인 손잡이로 이루어진, 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뜨는데 사용되는 "연장"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삽"에도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