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四字成語)
직전에 올린 글(그놈 얼굴(들))에 트랙백이 걸렸다. 새벽길님하고 SadGagman님이 걸어주신 글들인데, 기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글타래를 따라 가서 보고야 말았다. 항상 이렇게 시작되는 거다. 처음엔 걍 트랙백 걸린 글이나 볼 요량으로 들어갔다가는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특히 SadGagman님의 forget the radio 팟캐스트는 강추. 연쇄살인범 얼굴공개논란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돋보인다. 언제 한 번 후배들 인권강의 시간을 만들어 강연을 의뢰해야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면서 김창룡의 글과 표창원의 글을 비롯해 각 신문사의 입장도 둘러봤다. 결국 강모의 얼굴마저 봤다는 거 아닌가? 세상 일이라는 것은 의도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 하긴 뭐 그 얼굴 봐봐야 5분도 안 되 기억도 나지 않더만.
김창룡과 표창원의 입장에 대해선 저 두 분 블로거의 글들을 읽거나 들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고, SadGagman님의 설명에 대해 별도로 더 내용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묘한 것은 이 두 "학자"의 자세다. 표창원에 대해선 일단 한 수 접고 시작한다. 이분 성향이야 워낙 잘 알고 있었던 것인데다가, 언제나 검경친화적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룡은 언론정치학이라는 것을 강의하고 있나보다. 그런데 이 언론정치학 학자가 내놓는 범죄자 신상공개의 원칙이라던가 그 내용은 전혀 '원칙'적이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 원칙적이지 않은지에 대해선 SadGagman님의 방송을 들어보라.
표창원이나 김창룡의 글과 발언을 훑어보면서 생각나는 한자성어가 있었으니 바로 "곡학아세(曲學阿世)"다. 공부가 덜 된 사람들이 짧은 지식을 가지고 썰을 풀다가 자빠지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곡학아세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때는 걍 "삽질한다"고 한다.
배울만큼 배우고 알만큼 아는 데다가, 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여 장안의 화제를 만들거나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이 배우고 익힌 원리와 원칙을 교묘히 비틀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할 때, 그 때 곡학아세라고 한다. 곡학아세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삽질로 제 정체성을 표현하다가 제 발등을 찍는 아해들에겐 한 번 씨~익 하고 썩소를 날려줌과 동시에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독거려주면 된다. 그러나 곡학아세를 하는 사람들은 경우가 다르다. 이들은 원리와 원칙을 죄다 알고 있는 터에 이를 비틀어 설파함으로써 귀얇은 사람들을 홀린다. 궤변임에도 궤변같지 않아서 혼란을 야기하고 때때로 대중의 지성을 마비시켜버린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가 강모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내건 이유는 바로 이 곡학아세를 근거로 한 견강부회다. 남들의 이야기를 지들 좋을대로 해석하고 지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끌고 가는 거, 이게 견강부회인데, 적어도 한국 언론을 과점하고 있는 양대 언론사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사회에 유익한 목탁노릇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곡학아세나 견강부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행위들이 결코 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곡학아세나 견강부회나 모두 사익을 추구하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부글거리는 여론에 편승하여 제 위상을 높여보려는 학자들의 태도가 곡학아세로 나타나는 것이고, 지들 찌라시 판매부수와 홈페이지 클릭횟수를 높이기 위한 꽁수를 가지고 벌이는 행위가 견강부회인 것이다.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이 벌이는 곡학아세와 견강부회는 결국 그 사회를 좀먹어 들어간다. 올바른 가치관이나 원칙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입맛에 따라 언제든 변질과 변형이 가능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국민성공시대"라는 해괴한 시대담론이 판을 치게 되는 거고 위정자들의 폭력과 폭정이 정당화되게 된다.
예컨대 김창룡이 말하는 바,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권리만을 보호한다"는 것. 이것은 살인의 권리나 폭력의 권리 같은 것은 법으로 보호되는 권리가 아니라 범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법언이다. 강모의 얼굴사진을 공개하느냐 마느냐와 관련되어 논의될 사항이 아니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강모의 연쇄살인행각은 법이 보호할 가치를 가진 권리의 행사가 아니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강모가 처벌을 받기 전까지 강모의 신상일부는 법이 보호해야만 하는 가치다. 따라서 알만큼 알만한 김창룡이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권리만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일부 언론사의 연쇄살인범 얼굴공개를 옹호하는 것은 원칙을 교묘히 비트는 곡학아세의 전형이다.
이런 곡학아세가 득세하게 되면 앞으로 구멍가게에서 500원짜리 빵을 훔친 좀도둑의 신상조차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새로운 '법원칙'이 나오게 될 근거가 마련된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같은 찌라시들은 다시금 "전문가가 그랬다더라"라는 식의 글질을 해대며 지들 밥벌이를 위해 이를 이용할 터이고.
장삼이사들조차도 세 명이 입을 맞추면 없던 호랑이가 시장판을 활보하게 된다. 하물며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의 입은 그래서 더 무서운 거다. 시대가 하 수상하니 곡학아세와 견강부회가 판을 치게 되고 원리와 원칙이라는 것은 왜곡되어 버린다. 그러다보니 철거민의 생명과 생존권을 담보로 하는 악덕 재개발이 판을 치지만, 일부 학자라는 인간들과 찌라시 언론들은 본질은 외면한 채 제3자 개입이니 배후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결국 자본과 권력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덕분에 지들은 떡고물을 얻어먹고 있는 거다.
새삼스레 딸깍발이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렇게 잘 난 분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찍찍 뱉어가며 대접받는 것은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차라리 내가 절키보드를 하는 편이 훨 낫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