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3권 폐지하자고?
행인의 [정명(正名)운동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에 별 관련은 없으나 곁들여 생각해볼 만한 거랄까
간만에 열폭한 관계로 잠시 블로깅을 멈추리라 생각했건만, 오지게 살떨리는 몇 개의 보도를 보고나니 손가락이 지 쏠리는 대로 키보드를 달리려 한다. 이것도 병이면 병이겠지만, 새삼 의문스러운 것은 도대체 상식이라는 넘은 어디로 출장을 갔기에 대~한민국 땅에서 대면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우선 눈길을 끌었던 기사는 이거다.
박기성 노동연구원장, "개헌시 노동3권 제외 고려해야" - PRESSIAN
박기성 노동연구원장, "헌법서 노동3권 빼야" - 한겨레
박기성이가 노동연구원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던 그 순간, 이미 그가 뻔질나게 뻘소리를 해댐으로써 인민들의 타는 가슴에 불을 지를 것이라는 것은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터다. 게다가 그의 뻘소리가 어제 오늘 들려왔던 이야기도 아니었고, 자유기업원이나 경총, 전경련 등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주절거리던 소리들인지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드디어 그들의 개념상실한 돌출발언들이 단지 한줌도 되지 않는 무리들의 뒤담화 수준에서 벗어나 정치지형 자체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다는 거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뻘소리에 대응할만한 같은 무게의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세력이 없다는 것. 세력은 커녕 카운터펀치가 될만한 꺼리조차 내놓은 적이 없다는 것. 개헌의 문제가 항상 예사롭지 않게 주의를 끌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노무현의 원포인트 개헌이나 이명박의 소폭 개헌 주장은 비수를 감춘 닌자의 위장술이다. 통치구조에 한정된 논의처럼 보이는 이들의 개헌론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정권을 뒷받침해주거나 혹은 그들을 내세워 배후를 조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 특히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강화, 이를 위한 경제정의조항의 폐지와 함께 언제라도 저들에 의해 주장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동3권의 폐지였다. 헌법의 기본권 장에서 노동3권은 굉장히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기본권은 전적으로 기본권의 주체를 개인으로 상정하고 있음에 반해, 유독 노동3권이라는 기본권은 그 자체가 개인을 주체로 함과 동시에 집단적 권리로서 보장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왜 노동권에 대해서 이러한 집단적 권리를 보장하는 가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바로 그런 측면에서 헌법상 노동3권의 보장은 이 규정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적 맥락과 가치를 함께 부여잡고 있는 규정이다.
당연히,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특히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이 조항이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다. 개헌논의가 생길 때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조항의 위력을 상실시키기 위해 준동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개헌과 관련하여 아무런 카운터펀치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
가장 적절한 것은 사적소유권 절대의 원칙을 헌법에서 소거하는 거다. 예를 들어 왜 노동자의 대표들은 헌법 제23조제1항의 폐지를 요구하지 않는가? 헌법 제23조제1항은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보장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어차피 제2항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고, 제3항은 재산권의 수용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헌법 제23조에서 제1항은 없어도 되지 않는가?
물론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되면 아마 "자유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좌빨들을 척결하자고 생난리가 날 거다. 그런데 웃기지 않은가?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극단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노동3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데 세상은 그닥 생난리까지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제119조 제1항에서 "기업"이라는 단어를 빼자고 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공산당이라는 레떼루가 제까닥 붙을 거다. 제126조는 어떤가? 이 조항은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걸
"국가는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수립하고 국민경제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에 준하여 적절히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있다"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나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어 보안법으로 처벌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 노동3권을 폐지하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보안법처벌이 불가능한가? 그 발상 역시도 국가존립의 체계를 뒤흔드는 발상인데.
박기성의 발언에 대해 민주노총 위원장 임성규의 반박은 그래서 처량한 수준이다. 기껏 하는 소리가 "헌법적 가치" 운운이다. 무슨 헌법적 가치인가? 오히려 차라리 이 기회에 이따위 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헌법 제23조제1항 폐지, 헌법 제119조제1항에서 "기업" 삭제, 헌법 제126조를 사회국가이념에 충실하도록 전면 수정, 뭐 이렇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깔끔하게 제33조의 제2항(공무원의 3권 제한)과 제3항(방산업체 단체행동권 제한)을 없애자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보니 박세일이 "진보는 정책이 없다"는 뻘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한겨레가 제목을 기이하게 뽑았다. "진보는 정책이 없고 보수는 철학이 없다."
물론 박세일의 발언 중 일부를 카피로 뽑았겠으나, 바로 이렇게 정명(定名)을 해주는 순간, 그동안 암암리에 시중에 나돌았던 "진보는 정책이 없다"는 설이 정명(正名)이 되어 버린다.
이 기사에는 [인터뷰 전문]이 딸려 있다. 그 인터뷰 전문을 보면, 박세일은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에는 정서적 진보는 많은데 정책적 진보가 약하다"라고 주장한다. 한겨레는 자신들의 카피가 어떤 사회적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가서 무릎꿇고 가르침을 청해야할 수준이긴 하다만, 어쨌든 박세일의 말을 보면서 느낀 점은, 도대체 박세일은 진보의 정책들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하고 있길래 이따위 소리를 대범하게 지껄이느냐 하는 거다.
아닌 말로 진보가 정책을 이야기할 때 니들이 들어주기는 했니? 언젠 진보가 정책이 없어서 깨졌나? 박세일의 대담 전체를 훑어보면 이건 전혀 상황을 뒤집어놓고 있다. 진보가 정책이 없고 보수가 철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수는 알량한 정책으로 지들의 철학을 불도저처럼 밀어부치고 있는 반면, 진보는 지들 철학조차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하는 정책선전으로 일관했던 것이 현실이다.
최소한 박세일이 진보가 이룩한 업적이라고 주절거리고 있는 그 정책들, 예컨대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FTA가 어디 진보가 한 건가? 결국 박세일의 관점에서 진보는 DJ정부와 참여정부 정도인데, 까놓고 말해 이들 정권들을 진보정권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진보주의자들은 다 혀깨물고 뒈져버려야 한다. 사실 그래도 속이 시원치 않을 정도긴 하다만.
개헌론이 주장될 때마다 우린 반대요~! 지금은 시기상조요~! 하는 소리만 해대는 동안 저들은 구체적으로 헌법 경제조항들의 전면적 수정은 물론이려니와 노동3권을 아예 없애자는 말을 공공연히 해왔다. 이게 무서운 것은, 원래 잔펀치에 맛이 가는 것처럼, 구조체계의 재편이 동반되는 개헌정국에서 반드시 이들의 발언에 무게가 실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헌법이 바뀌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주장은 헌법의 규정들 안에서 해석의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철학이 공공여하게 드러나도록 자신들의 정책을 선전선동할 수 없는 한, 진보는 항상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누가 노동3권 없애자 그러면 발끈하다 끝나고, "진보는 정책이 없다"는 소리가 나와도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강하게 들이받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쟤네들은 지들 할 소리 다 하고 산다.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체제 자체를 그렇게 바꿔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일반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은 이제 그 본래의 의미마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된다.
"공세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도록 좌파라는 사람들 역시 뭔가 드러나게 이슈파이팅을 해야할 거다. 혹시 혁명을 위해 지하에 숨어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행인의 [노동3권 폐지하자고?] 에 관련된 글. 국회의원들 앞에서 조폭처럼 허리를 굽힌 박기성을 보면서, 자식에게 미국국적 포기를 종용하며 의원들을 대상으로 전화로비를 펼쳤던 정운찬을 연상한 것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사람을 얼마나 비굴하게 만드는가 하는 점이었다. 국회의원 나부랭이 몇이서 국감장에 출석한 박기성에게 소신을 바꾸라고 하는 것 역시 웃기긴 마찬가진데, 아닌 말로 그 자리에서 노동3권을 운운하며 박기성을 다그쳤던 의원들 중 몇 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