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욕나온다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소위 좌파 혹은 진보라고 하면서 전혀 그런 가치지향과는 먼 이야기를 마치 진짜배기 좌파 혹은 진보의 입장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웬만하면 그냥 넘길려고 해도, 이런 사람들보면 욕이 튀어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오늘 또 그런 현상을 겪는데, 프레시안에 올라온 김명신의 글을 보다가 그렇게 되었다.
"음악, 미술, 체육이 위험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의 공동회장씩이나 하고 있는 김명신은 교과부가 제시하는 소위 미래형 교육과정에 대해 비판하면서, "조화로운 인격체 양성"이라는 교육의 대명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다가 급기야 '사회적 교육과정 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정부의 새로운 교과과정이 입시위주의 교육을 강화해서 교육현장을 황폐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야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런 우려가 MB정권에서만 나왔나? 과거 세칭 '이해찬 세대'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수행능력이 떨어졌다는 둥 어쩌구 하면서 혹평 일변도였고, 그 와중에도 입시교육의 문제로 모든 비판은 집중되었었다. 새삼스레 "MB형 교육과정!" 운운하면서 느낌표까지 붙여주는 센스는 왠지 구리다.
아닌 말로, 대한민국에서 교육운동하신다는 분들, 내가 아는 한 극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민교협이고 전교조고 무슨 학부모 모임이고 간에 교육의 궁극적 단계를 '대학'이라는 학제에 맞춰두고 운동이란 걸 해왔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들의 교육운동이라는 건 기껏해야 "내 새끼 대학 잘보내기 운동"의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대학은 누구나 원할 때 언제든 자신이 목표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12년 간 초중고를 마친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이 이상한 구조다. 이 이상한 구조에 대해서 교육운동하는 활동가들이 문제제기한 것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거의 거의 거의 거의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교육운동이 "교육"운동인지 교육"운동"인지 헷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김명신의 이번 글 역시도, 구구절절히 입시준비하는 학생들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얼핏 보인다만,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질문만 남게 한다. 어차피 고교졸업생의 90%에 육박하는 숫자의 학생들이 바로 대학진학을 하는 마당에, 어떤 교과과정이 만들어지고 어떤 입시제도가 도입된다고 한들 지금의 교육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김명신은 이번 정부의 교육과정개편안이 궁극적으로는 "고교생활을 학원처럼 입시준비만 하고 끝"내게 만들 거라고 주장한다. 이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거다. 그렇게 고교생활을 걱정하시지만 말고, 교육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적 학력차별철폐운동을 먼저 펼쳐보심이 어떤가 하는 거다.
'청년실업'의 문제가 부각되었을 때 발견한 웃기는 사실은 그 '청년'들은 대졸자들이었다는 거다. 한국에서 문제가 된 '청년실업'에 대학학력 미만의 청년들은 열외인간취급을 받았다. 한때, 상고 졸업해서 은행에 취업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는데, 불과 20년만에 은행창구직원들은 죄다 4년제 대학 졸업자들로 대체되었다. 국제기능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얻은 공고생들이 사회에 나갔다가 사환취급만 받다가 결국대학진학으로 방향을 돌리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요새 조선일보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아닌 말로 한국 교육운동하시는 분들이 조선일보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다. 조선일보의 숨은 목적이 뭐든 간에 이렇게 조선일보는 아젠다를 선점하는 능력이 있다.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단순 오퍼레이터 노릇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애들이 죄다 대졸자가 되어 있는데 눈높이를 낮추라는 뜬금없는 소리만 해대는 이명박이나 마찬가지로, 도대체 18세 이상이 되어서도 캥거루처럼 자식을 품고 있어야만 하는 이 희한한 구조에 대해선 왜 교육운동하시는 분들이 말씀이 없을까? 이 와중에 무슨 핀란드식 교육이 어쩌구 저쩌구... 핀란드에서 고등학교 졸업한 애들의 9할이 바로 대학진학하던가?
그러다보니 김명신의 이번 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냉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으로 모든 시간을 다 보내는듯 하지만 정작 그 청소년들의 장래보다는 대학진학에 더 신경을 쓰는 교육운동. 까놓고 이명박 정권의 교육부와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판에 무슨 얼어죽을 '사회적 교육과정 위원회'? 솔직한 심정으로 이야기하자면 같잖다. 정말 같잖아보인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작업(논문) 끝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한국 교육운동이 가지고 있는 이 기괴함에 대해 분석해보는 거다. 사회적 학력차별에 대해선 적극적인 문제제기 하나 없으면서 교육운동이라고 하고 있는 분들의 정신상태를 들여다보고 싶다.
할일 정말 많구나... 게으른 것이 한이다.
정신상태 들여다봐야 정신만 사나워질듯...ㅎㅎ 담달에 저 공연해욧! 함 보러 오시지욧!
일단 경축~! 허본좌 콘서트보다 10배, 100배 더 성황을 이루실 거라고 믿습니다. 저도 가서 응원하죠. ^^
빨리 논문부터 써야겠네.
교육제도(교육과정을 포함한)와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둘 중 하나를 더 중요한 문제로 보는 건 아니겠지? 효과적으로 차별하기 위해서 교육제도가 이 모양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을 해소하기란 어렵지. 둘이서 아주 짝짝꿍이 잘 맞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현 교육운동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는 영 아니지만 대체로 교육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꽤 의미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긴 한데... 물론, 주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포지션이 의심스러운 점은 있지...
사실 행인이 얘기하는 '교육'에 대해서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는 게 있다는 얘기. 교육운동, 혹은 진보진영이 생각하는 교육의 상에 대해 나도 씹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한데 가끔 행인 생각은 뭘까 싶기도 하고...
둘 다 중요한 문제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첫째로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학력차별에 대해선 쌩까고 있다는 것과 둘째로 저학력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은 사회적 학력차별과 교육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거, 이게 가장 큰 문제. 결국 운동의 주체가 누구냐, 혹은 당사자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될 듯.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과포화상태인 교육운동의 대당차원에서 학력차별철폐운동쪽에 더 힘을 실어줘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여. 까놓고 초중등 교육에서 필요한 건 어떻게 하면 잘 놀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만 제대로 가르치면 된다고 봐. 개별적 관심에 따른 전공의 심화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두면 되는 거고.
쉬운 얘기로 수학공부 하고 싶은 녀석이 수학공부를 위해 대학에 가면 되는 거라는 거지. 치킨집 사장이 꿈인 아이에게 왜 수학성적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주냔 말야...
행인님 올만에 댓글 남기고 가네요 ㅎㅎ
저도 이쪽으로 먹고 살 처지라 그런지 남일같지 않네요.ㅠ_ㅠ
행인님의 말씀은 잘 알겠는데 사회적 학력차별이 폐지된다고 하는 순간 갑제옹이 졸도하실듯 ㅋ
지금 교육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의 기능을 정상화 시키고 노동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현실은 비정규직ㅠ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출구에 미친듯이 매달리는 지도 모르겠네요
반갑습니다. ^^
좁아지는 출구에 미친드시 매달리는 현상을 출구의 개선으로 풀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어버린 것 같아요. 이미 대졸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학력간 임금차별 철폐같은 것을 내놓아봐야 별로 시의성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로요. 오히려 지금은 다양한 출구를 제시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교육운동이 이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운동이 그냥 현존출구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네요. ㅠㅠ
완전 공감.
확실한 예로 일제고사 폐지 외치는 분들이 자식, 제자 혹은 주변사람들 성적이나 대학걱정 하고 있는거 보면 참=_=; 물론 그 심정들을 아예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무튼 잘 읽고 가요 ㅎㅎ 행인은 완전 건강한 구라쟁이(ㅋㅋ) 같아요ㅋㅋ
감사합니다. ㅎㅎ 건강한 구라쟁이로 남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심돠!!
일제고사 말이 나와서 말인데, 주체들의 관심이 대학에 몰려 있는 한 일제고사를 안 하더라도 경쟁제일의 상황으로 청소년들을 몰아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이런 웃기는 상황을 건드려줄 수 있는 구라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제가 보기엔, 이런 문제는 꼭 교육운동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위 운동 주류라는데 속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내세우는 운동 주제와 관련된 상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체화하지 않는 것 같아요. 상에 대한 것은 자기조직 홍보 팜플렛 만들때만 겉치레로 필요할 뿐.. 단순히, 현재 권력에 반대하고, 현 시대에 당장 귀가 솔깃할만한 대안(?)이라는걸 만드는데 온 힘을 쏟을 뿐.. 너무 싸잡아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겪어본 봐로는 그렇더군요. 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할 시간에 언론플레이 방법을 더 연구하고 시도하는게, 조직의 성장(?)에 당장 더 도움이 되니까..
그렇죠. 물론 어려운 이야기긴 합니다. 예컨대 커피를 좋아하는 행인이 공정무역 커피를 그닥 즐겨하지 않는 것 역시도 노동과 환경에 대한 가치관을 체화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반성은 하지만 잘 안 된다는... ㅠㅠ
정치조직의 입장에서는 당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정치조직을 견인하는 운동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겠죠.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구요.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