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위하여

논쟁을 위하여

0. 
논쟁을 피할 수 없다. 논쟁의 주제가 된 진보정치의 재편 혹은 재구성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논쟁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논쟁이라면 치열해야 할 것이다. 변죽만 울리거나 혹은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논쟁이라면 할 이유가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뒤집자면 어차피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정치와 전쟁은 승리를 목적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전쟁은 상대방의 절멸과 복속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다음의 기회와 부활의 전망을 남긴다.

논쟁은 정치의 한 부분이다. 전쟁이 아닌 정치. 그러므로 다수결 민주주의의 원리를 원용하자면, 정치로서의 논쟁은 51%를 획득하기 위한 전장이다. 다만, 여기서 51%를 얻는 그 이면에 49%를 내줘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한다. 단순히 내주는 것이 아니라 49%만큼 상대의 논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 
진보정치에 관한 논란은 양 극단에서 제기된다. 한 쪽은 타 정치세력과의 통합만이 생존의 길이 될 것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여기 이 자리 외에 대안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어차피 세력의 재편이라는 측면에서 정치과정을 논하는 바에, 그 전제로 통합이냐 독자냐를 선재한 채 이루어지는 논쟁이라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양 측이 이미 답을 내놓고 그 답만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남는 것은 입장의 확인 뿐이다. 거듭, 이러한 논쟁은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논쟁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치세력과도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칠 수도 있고 더욱 세분화할 수도 있다. 문제는 통합이든 분열이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전망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논쟁은 자신들이 보여주는 가치와 전망이 상대방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
과거는 미래를 위한 구상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선행된 사건에 대한 비난이 중심이 되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논의가 제기되자마자 2008년도 분당과 2011년 탈당사태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과거의 어떤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이미 일정하게 평가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경험이 지금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 예단할 이유도 없고, 일정한 책임에 대해 또다시 비판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때의 아픔을 일정하게 놓아두는 단계에서 논의는 발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3.
적대적 구획의 선명함은 자기 주장을 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논쟁의 발전에는 방해가 된다. 통합파, 분열파, 골수 독자파 운운하는 명칭을 상대방에게 붙이는 동시에 논의는 딱 거기에서 멈춘다.

탈당을 하라는 둥 가고 싶은 데를 가라는 둥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적으로 얼마든지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 또는 이성적으로도 일단 논의의 테이블 안에 들어와서 이야기하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아니라 어차피 나름의 답이 정해져 있는 대로 그냥 하라고 이야기한다면 논의는 진행되지 않는다.

이 경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양한 생각이 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예컨대 통합에 대한 주장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모두 독자파라고 몰아부치거나, 타 정치집단에 대한 판단의 선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통합파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결국 논의를 풍성하게 하기는커녕 극단의 주장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4.
개인적인 입장은 다시 정리할 터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진행할 논쟁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수준의 룰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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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0 13:08 2014/08/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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