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지 원고] 돈놀이가 된 공놀이 - 미래에서 온 편지 14호 (2014.11)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는 “이 축구나 하는 놈아(You base footballer)!”라는 대사가 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정도가 되겠다. 최근 한국의 상황을 빗대자면, “이 덧글이나 다는 녀석” 정도일까. 그런데 하고 많은 표현 중에 셰익스피어는 왜 하필 이런 말을 욕설이랍시고 집어넣었을까?

셰익스피어가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16세기에 축구는 영국 민중의 오락거리였다. 잘 알려져 있듯, 당시의 축구라는 건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공을 몰고 들어가는 일종의 점령게임이었다. 공 하나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길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모든 주민이 뛰어나와 각축을 벌이기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물경 천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나와 아비규환을 벌인 일도 종종 있다. 이 와중에 규칙이라는 것이 따로 없어서 치고 박는 건 예사였고, 코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건 다반사였다. 13~14세기에는 이 공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사로 단검을 소지했다고 한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악명 높은 영국 훌리건의 뿌리는 이렇게 깊다.

셰익스피어보다 한 세기 전의 영국 시인인 알렉산더 버클레이가 축구를 “억센 촌뜨기들의 겨울놀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시골뜨기들에게 축구는 한 겨울의 여가활동인 동시에 넘치는 정열을 발산하는 공간이었고, 동네 간에 자존심을 건 한 판 전쟁이었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은 틈만 나면 상대방에 대한 분석과 전술구상을 하고, 일단 시합이 개시되면 연장질을 마다 않는 투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그저 머리 속에 축구만 생각하는 동네 왈짜들에 대한 못마땅함이 “이 축구나 하는 놈아!”라는 욕설로 이어질만하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축구에 환장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썩 좋은 건 아니다. 그 자신이 아스널의 팬이자 축구광인 영국 소설가 닉 혼비는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 외롭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라며 자조적으로 읊조릴 정도다. 공공연히 ‘축구팬들은 인간 취급 받을 자격이 없다’고 떠벌리던 마가렛 대처는 1985년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의 참사 당시 축구 때문에 훌리건이 생겼다고 비판했다. 사실 원정을 간 리버풀 팬들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대처의 발언은 축구를 하층민의 교양 없는 오락거리로 치부하는 상류계급의 인식이 20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대처가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신보수주의적 정책을 펴면서 탄광노동자와 항만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했을 때 그 여파를 몸으로 겪어야 했던 리버풀의 사람들은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급기야 리버풀FC의 응원단은 “We’re gonna have a party when Maggie Thatcher dies(마가렛 대처가 죽는 날, 우리는 파티를 열거야).”라는 응원가를 만들어 불렀다(유튜브 검색하면 나온다).

어쨌든 축구는 민중들이 중심이 된 하층계급의 문화였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규칙도 예의도 없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소란을 떨어대는 이 난장판이 탐탁지 않을 수가 없다. 중세의 왕실이 축구를 “무익한 스포츠” 혹은 “사악한 운동”으로 규정한 것이 뜬금없이 보이진 않는다. 상류계급은 축구 이외에도 얼마든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각종 문화적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교양을 갖추고, 어느 정도 재정을 동원하면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고고하게 즐길 수 있는 상류층의 눈에 축구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아수라장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부르디외를 원용한다면, 축구를 하느냐 아니면 고상한 취미생활을 하느냐로 철저한 계급적 분할이 확인되는 문화적 ‘구별짓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상류층의 입장에서 축구는 “싸움과 말다툼, 불화, 살인, 피를 부르는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벌이는 음모와 암살과 전쟁과 학살에 대해 이런 식의 평가는 하지 않았다.

이 같잖은 천것들의 광란을 지배층이 마냥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았다. 영국왕실은 14~16세기 약 300년에 걸쳐 축구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19세기까지도 대로에서 축구를 금지하는 법을 둘 정도였다. 축구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통제는 동서의 구분을 불문한다. 그 형식은 달랐지만 중국에서도 축구에 대한 제재가 있었다. 명나라의 시조인 주원장은 축구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를 어기면 발을 잘라버렸다. 지배계급은 소요사태의 예방과 유사시를 대비한 궁술연마 등을 축구금지의 이유로 내걸었다. 당시 축구가 가진 폭력성이나 비문명적 성격은 이러한 지배계급의 축구금지 정책에 훌륭한 빌미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조차 축구가 가진 순기능을 아예 무시하진 못했다. 지배계급이 하층민에게 가지는 적대감과 멸시와는 별개로, 폭압과 착취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민중들에게 축구는 일정하게 숨통을 틔워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축구의 종주국’ 하면 영국을 꼽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다. 물론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발을 이용해 공을 가지고 노는 운동은 영국에서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놀이는 로마시대까지 소급된다. 더 나가 우루과이의 좌파 지식인인 에두아르노 갈레아노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 1500년경에 중앙아메리카와 아마존 지역에 축구가 성행했다고 한다. 최근 중국은 원래 축구가 ‘메이디 인 차이나’였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동북공정에 버금가는 축구공정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축구종가의 명성은 현대축구의 틀이 영국에서 출발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장난을 친다. 민중들의 천박한 오락으로 치부했던 축구를 신사계급이 돌연 자신들의 유희로 편입시킨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 신흥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이 영국의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퍼블릭 스쿨’에 속속 입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민들의 오락이었던 축구문화가 상류층들에게 유입된다. 학교는 건전한 정서의 함양과 건강한 신체의 유지를 명목으로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양성화했다. 이 퍼블릭 스쿨의 졸업생들은 다시 대학으로 진학했고 축구 역시 퍼져나갔다. 당시 축구는 마치 한국의 동네마다 고스톱 규칙이 다른 것처럼 출신 퍼블릭 스쿨마다 규칙이 각기 달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일정한 규칙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케임브리지 룰(Cambridge Rule)’이다. 그리고 이 규칙이 발단이 되어 퍼블릭 스쿨 출신의 클럽대표들이 모여 영국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ion)가 태동한다. 결국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축구는 젠틀맨의 스포츠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초기 FA는 신흥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된 상류층 신사계급들의 클럽이 주축을 이뤘다. 예컨대 1857년 최초의 클럽으로 등록한 셰필드 FC는 회원 29명 중 11명이 공장주 또는 공장주의 아들이었다. 또한 신사계급은 하층계급의 직업적 참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이들에게 아마추어란 신사(gentleman)를 강조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축구를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즉 규칙을 갖춘 스포츠로서의 축구는 상류계급들의 사교의 장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최초의 FA컵 경기가 벌어졌던 1871~72년 시즌부터 1881~82년 시즌까지 장장 10년 간 우승팀은 모두 상류층 신사계급의 클럽들이었다. 즉 케임브리지 룰이 만들어진 1848년 이후 약 30여 년 간 근대 축구의 주류는 지배계급의 엘리트들이었고 민중의 팀들은 일정하게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클럽들이 무수하게 결성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촌동네에서 수십, 수백 명이 달려들어 벌어졌던 떼거리 축구(mob football)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자연히 와해되었다. 오히려 수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은 도시와 공장에서 여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규칙을 갖춘 축구가 오락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8년부터 노동자 축구팀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19세기 말에 160만이 넘는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축구클럽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1882년 당시 영국 축구협회에는 1천개 이상의 클럽이 등록되어 있었고 이 중에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축구클럽이 셀 수도 없이 산개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지성이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다. 랭커셔 정류장과 요커셔 철도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던 뉴턴 히스 FC가 맨유의 전신이다. 베르캄푸와 앙리가 주가를 올렸던 아스날은 런던 남동부 울위치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만든 팀이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런던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도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들이 모여 결성한 팀으로는 토트넘 핫스퍼를 들 수 있다. 18세기 영국 최고의 무역항으로 항만노동자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리버풀에서는 노동자들의 지지와 성원 속에 리버풀 FC가 흥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노동자들의 축구클럽은 드디어 젠틀맨의 전유물이었던 FA컵을 가져가고 말았다. 1882~83시즌 FA컵에서 ‘블랙번 올림픽 FC’는 북부지역클럽 최초로 그리고 노동자가 주축이 된 클럽으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주장이었던 워버튼은 우승컵을 치켜들고 이렇게 외쳤다. “이 컵은 두 번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섬유공장 노동자와 금속공장 노동자, 함석공, 술집 주인 등으로 구성되었던 이 팀의 우승은 축구가 노동자들의 운동이 되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이에 근거한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블랙번 로버스의 앰블럼에는 장미와 함께 ‘Arte et Labore’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기술 그리고 노동’이라는 의미다(‘예술과 열정’이라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틴어 본연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은퇴했지만 세계적 명장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글래스고의 조선소 노동자였고 그곳의 노조간부였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 때 습득한 사회주의적 가치들이 자랑스럽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한 경기장에서 자본가와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건 노동자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시간과 재정이 남아돌아 원할 때는 언제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노동자들은 일주일 내내 매일 12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 연습을 하기는 어려웠다.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공을 참으로써 임금을 받는 프로축구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급격하게 늘어나는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축구경기를 활성화하는 요소가 되었지만,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수익창출의 계기가 되었다. 클럽을 소유하고 경기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자본가는 울타리를 치고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지역 관중의 유치에 경기의 승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선수관리가 체계적으로 시작되었다. 애초 아마추어리즘의 순결성에 목을 맸던 FA는 돈이 오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했으나 물밑으로 금전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 골칫덩어리로 등장했다.

가난한 노동계급의 선수들은 급료를 받으며 경기를 뛰고자 했으나 자본가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입장료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와는 별개로 자본가들은 주급 상한선을 정하고 선수들을 공공연히 착취했다. 그럼에도 음성적인 수당지급이 성행했고 많은 구단들이 FA에 벌금을 물어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선수들이 클럽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게 막았다. 이러한 현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1902년에 들어와 본격적인 선수노조 결성이 이루어지지만 1960년대까지도 임금상한선은 유지되었다. 구단의 실력 차이가 자금보유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이 되고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의 몸값이라는 게 천정부지로 뛸 정도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스폰서가 달려들고 중계료로 떼돈을 벌 수 있는 메이저급 리그의 선수들의 이면에는 형편없는 연봉에 시달리거나 아예 돈이라는 걸 만져보지도 못하는 하위리그 선수들이 즐비하다. 선수들에 대한 불이익은 심심찮게 뉴스거리가 된다. 2006년 월드컵에서 토고 대표팀은 임금정산을 요구하며 본선경기 보이콧을 선언했을 정도다. 스페인축구 선수노조는 2010월드컵이 있기 전 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도 동참했다. 하위리그 선수들이 상습적인 임금체불이 주요한 문제였다. 하긴 최고연봉의 선수들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기라성 같은 선수들에 대한 스폰서들의 강압 또한 계속된다. 예를 들어 1998년 월드컵에서 외계인 제1호로 칭해졌던 호나우두는 나이키의 등쌀에 밀려 무릎부상임에도 출전해야 했다. 이 여파로 호나우두는 3년이라는 시간을 몸조리에 보내야 했고 이후에도 전성기의 실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구단 또는 스폰서에 의해 선수에게 돌아가는 불이익을 세간의 화제로 만든 건 단연 ‘축구의 신(이건 전적으로 필자의 견해다)’ 마라도나다. 이탈리아의 명감독 아리고 사키가 “그라운드에 선 그 자체가 혁명”이라고 칭송했던 마라도나가 “왜 축구선수에게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포효했을 때, 돈벌이로 축구를 전락시켰던 자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1998년 월드컵 와중에 코카인 복용 혐의를 들어 그를 그라운드 밖으로 추방시켰다. 공 하나에 세계가 열광하고 계산조차 어려운 초고액 스타 선수들의 연봉이 화제가 된다.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가 경기장을 비추고 선수들의 몸짓 하나에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모습이 연일 중계방송과 스포츠 뉴스를 통해 보여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추문으로 얼룩진 FIFA의 커넥션이 있고, 초국적 자본들의 돈벌이로 전락한 구단을 둘러싼 팬들의 갈등이 있으며, 허기를 참아가며 공을 차는 가난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있다. 마라도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세계 어디에서도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민중들의 집단유희에서 출발해 상류계급의 스포츠로 변신했다가 다시 노동자들의 오락으로 전환되고 끝내 자본에 장악된 축구의 역사는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만큼이나 극적이다. 근대의 축구는 그 자체로 자본이 되어갔고 오늘날 자본은 마침내 축구를 온전하게 상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축구는 자본과 상품이라는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대중의 열기, 자발성, 역동성, 그리고 투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에야 축구는 축구다워진다. 그 언제인지 모를 옛날 옛적, 어떤 사람들이 처음으로 공을 굴리고 발로 차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축구의 매력이 여기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원시로부터 이어진 전통에서 자본에 종속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민중의 유희로서 축구를 즐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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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43 2014/10/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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