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2
날샜다... 지금 이 시간까지 뭐하고 있는겨??
혼자 꾸역꾸역 밤 새는 날이면, 이상도 하여라, 어째 그렇게 잊혀졌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나느냐 말이다. 나이 먹는 증건감?? 옷~~!! 아니다. 아직은...
암튼 이 사무실에서 잠을 자보려고 했는데, 아니 이런 줴길헐... 침낭이 없어졌단 말이더냐? 도대체 누구냐? 거의 노숙폐인의 초입에서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후 수단이었던 침낭을 어떤 *%&^)(&*가 쌔벼갔단 말이더냐... 잠도 못자고, 이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침울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넘 생각이 났다... ㅋㅋㅋ
행인, 원래 좀 지저분하다. 콧구멍에 손가락 집어넣고 사방 휘두르다가 왕건이 건져내기가 취미인데다가, 목적물이 제대로 출구를 찾지 못할 경우 건더기가 빠져나올 때까지 킁킁 거리는 한편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다시 손가락 쑤시기에 돌입한다. 목욕을 두어달 하지 않아도 별로 불편함을 못느끼고, 겨울철에는 특히 샤워를 일주일 내내 하지 못해도 끄덕없이 버틴다. 방청소는 거의 이사갈 때 한 번 한다. 지난번 폭삭 주저앉은 책꽂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행인은 이모양 요꼴이었는데, 그넘은 행인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성이 좀 특이한 넘이었는데 기냥 ㄱ이라고 해두자. 이 ㄱ이란 넘은 옷매무새도 항상 단정, 행동거지도 항상 얌전, 주변도 항상 반듯, 암튼 행인과는 180도 다른 그런 생활을 하는 진정한 바른생활사나이였다. 뭐든 열심히 성실하게, 뒤로 미루는 법도 없었고, 그 성질나는 공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욕 한 마디 하는 걸 못봤다.
이렇게 겹치는 거 하나도 없는 ㄱ과 행인은 그런데도 희한하게 함께 잘 어울려 다녔다. 그건 전적으로 ㄱ의 너그러운 마음씀씀이 때문이었는데, 행인은 그넘의 깔끔에 대해 시간이 나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갖은 타박을 다 주었건만, ㄱ은 행인의 지저분함에 대해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넘이 또 술을 기가막히게 퍼먹는 넘이라는데 어울림의 맛이 있었다. ㄱ이나 행인이나 두주불사, 주종불사, 장소불문, 시간 무제한으로 술퍼먹는데는 또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넘에게는 아주 묘한 술버릇이 있었다. 바른생활 사나이... 이넘은 술을 먹은 후 보이는 추태 역시도 아주 예의 반듯하게 저지르는 능력이 있었다. 그게 어떤거냐 하면...
행인은 공장 내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이넘은 출퇴근을 했다. 시내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달동네틱한 동네였는데, 집들이 옛날식 단독주택들로 빼곡히 들어찬 골목에서 살았다. 녹색 철문이 달린 대문이 이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는데, 이 문 바로 앞에 전봇대가 하나 서 있었다. 이 전봇대에는 속칭 '아시바'라고 일컫는 쇠로 된 발걸이가 끼워져 있었다.
우리의 바른 생활사나이, 술에 만취해도 반드시 집에 들어가서 잔다. 기숙사 가서 같이 자자고 해도 절대 거부한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거다. 아아, 이 지극한 효성까지도 참으로 바른생활사나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바른생활 사나이는 집으로 간다. 집까지 잘 찾아간다. 잘 찾아가서...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문 옆 전봇대 앞으로 간다. 우선 웃옷을 벗어서 전봇대의 '아시바'에 잘 걸어놓는다. 그리고 셔츠나 면티 등과 바지를 잘 벗어서 차곡 차곡 갠다. 옷을 개서 전봇대 밑에 잘 정돈해두고... 양말도 산뜻하게 벗어서 돌돌 말아 전봇대 한 귀퉁이에 놓고... 전봇대 밑 바로 거기서 반듯이 누워서 잔다... 빤스만 입고...
바로 전봇대 옆이다. 몇 미터도 아니고 한 뼘 정도 떨어져 있다. 전봇대가 거의 담벼락에 붙어있는데다가 전봇대 바로 옆이 대문인데, 이넘은 꼭 술만 퍼먹었다하면 그렇게 전봇대 밑에서 바르게 잔다. ㄱ의 어머니께서는 아들넘의 술버릇을 잘 아시는지라 ㄱ이 좀 늦는다 싶으면 잠을 못주무신다. 차라리 기숙사 들어가면서 전화를 드리면 편히 주무시기라도 할텐데, 이 끔찍한 효자넘은 어머니 걱정 덜어드린답시고 어머니 심장을 아주 벌떡 벌떡 뛰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어머니께서 전화하신다.
"에구... 아무개냐?"
"어이쿠 어머니, 안녕하셨어여? 어제 또 뭔일 있었습니까?"
"그넘이 글쎄 또 그모양이지 뭐냐... 어제도 네가 술멕였냐?"
"같이 마시긴 했는데요, 일찍 들여보냈는데..."
"제발 그넘 술 좀 멕이지 마라..."
"예..."
큰 죄 지은 넘처럼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물론 ㄱ이 출근하면 행인이 닥달을 한다. 그럼 이 바른생활사나이, 그저 씨익 웃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전봇대 밑에서 자고 나면 한동안은 술을 자제했다. 솔직히 지도 쩍팔리지 뭐...
그러다가 때는 눈보라 몰아치는 1월 달이었다. 공정트러블 때문에 옥외에서 하루 종일 덜덜 떨어가며 일을 했는데, 이런 날은 의례히 술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ㄱ은 근무부서가 달랐는데, 행인은 생산과였고 ㄱ은 공작실이었다. 공작실은 기계전담부서였다. 그날 공작실과 같이 작업을 했기 때문에 또 자연스럽게 ㄱ과 저녁회식자리에 같이 앉게 되었다.
그걸로 끝날 위인들이 아니었다. 부어라 마셔라 얼씨구 절씨구 하다가 결국 또 그넘과 행인, 둘이 남게 되었다. 새벽 2시쯤 되었나 그랬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술집 문밖에 나오면 바로 술이 깨는 것같은 그런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해서 그넘 집 근처까지 가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날따라 ㄱ이 좀 오바해서 술을 푸는 바람에 이미 꼭지가 돌아있는 그런 상황이어서 오래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기숙사는 절대로 같이 가지 않을 넘이고, 혹시나 이 추운 날에 전봇대 껴안고 잘까봐 그넘 집 근처까지 왔던 건데, 생각할 수록 잘한 짓이라고 여겨졌다. 포장마차를 나와 그넘 집 들어가는 골목까지 왔는데, 자꾸만 이넘이 먼저 가란다. 택시잡는 곳까지 같이 나오겠다고 성화를 부리는데, 큰 길까지 나왔다가 정신 잃고 전봇대 밑에 퍼지게 될까봐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하고는 두번 세번 바로 대문 열고 들어가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날씨 무자게 추웠다...
이튿날 현장에 있는데 방송이 흘러나왔다. 빨리 중앙통제실로 와서 전화를 받으라는 거다. 뭔일인가 싶어서 허겁지겁 뛰어올라가 전화를 받았더니 ㄱ의 어머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아뿔사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이구, 이넘아... 그넘 술 좀 작작 멕여야지..."
"어떻게 된 거에요?"
"지금 XX병원 응급실에 와있다... 에구,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외출증을 끊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갔는데 회복중이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힘이 많이 드셨단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이넘이 또 늦으니 주무시지도 못하고 계속 서성거리셨단다. 그러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화장실을 가시려고 방문을 나서니 ㄱ의 방문이 그대로 열려있더란다. 빤스만 입고 자는 넘이라 항상 방문을 닫고 자는데, 문이 열려있다는 것은... 비상사태였다.
어머니, 화들짝 놀라 마당을 가로질러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열고 보니... ㄱ이 강시가 되어 있더란다... 옷 반듯하게 잘 개서 머리맡에 놓고, 코트랑 웃도리랑 벗어서 아시바에 사뿐이 걸어놓고, 양말까지 홀딱 벗어서 동글동글 개 놓고, 빤스만 입고 투탄카멘의 관뚜껑처럼 양 팔 가슴에 포갠채... 강시가 되어 있더란다...
오밤중에 엠뷸란스 부르고 난리가 났었단다. 병원 오는 동안 내내 몸을 주물렀는데, 완전히 냉동실에서 꺼낸 고기덩어리였다고 하신다. 어머니 표현으로는 벽돌같았다고 하시던데...
그리고서는 며칠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진 ㄱ이 회사출근을 하던 날, 하루 종일 쿠사리를 주던 행인, 지네 집 대문밖에서 동사할뻔한 친구를 위해 어한주를 사줬다. 물론 딱 한 잔만 했다. 더 했다가는 이넘, 또다시 전봇대 밑에서 바른 자세로 강시가 되어버릴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