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했을 때는 지하철 타지 않기

아아... 감탄사 일발 발사하고...

이 진보블러그에 술을 같이 논할 사람이 또 생겼다뉘, 감개무량이다. ㅋㅋㅋ

 

* 이 글은 독고다이님의 [추운 날 학교에서 벌벌 떤 사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날짜도 안까먹는다. 때는 1990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 듣겠다고 죄다 종로통으로 쏟아져 나오기 몇 시간 전. 그랬다. 그 날은 일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원통에서 군복무를 하던 ㅆ가 휴가를 나온 날이기도 했다. 한동안 휴가를 나오지 못하다가 거의 1년이 다 되어서 휴가를 나오게 된 ㅆ. 마침 판판이 노는 날이어서 대낮부터 이넘을 만나기로 했다.

 

점심때가 막 지나서 ㅆ을 만났다. 각자 점심은 먹었거나 말거나 아쉬운 것은 술이었기에 이넘을 데리고 일단 피맛골로 향했다. 예전(이라함은 고삐리 때)부터 잘 가던 주점이 있었다. 쥔장도 잘 아는 인간이고 특히 이 쥔장이 ㅆ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일단 가면 부담없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지금은 공사한다고 난리가 난 고쪽 말고 탑골공원 쪽 속칭 '봇대집(술집 안에 전봇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방향 골목길에 있던 주점이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무장지대 들락거리는 초병생활을 하고 있는 ㅆ은 그동안 술이 고파 허덕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별로 그런 것도 아니더라. 이넘은 군복무하면서 사단 스케이트 선수, 사단 사격선수, 사단 뭐뭐뭐 해서 벼라별 명목으로 특기병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술 마실 기회가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래봐야 군바리, 산 속 군대 안에서 마시는 술의 종류는 딱 두 가지. 막걸리와 두꺼비. ㅆ은 그게 항상 아쉬웠었던가보다. 그래서 싸제에 깔려있는 모든 종류의 술을 다 마시고 들어가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이번 휴가에 돌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점에 들어가 앉자마자 메뉴판 목록에 일렬 종대로 도열하고 있는 술의 품목들을 하나 하나 순서대로 시켜나갔다. 각 1병씩.

 

이놈의 동네는 겉으로는 속칭 학사주점처럼 포장을 하고 있지만 술은 있는대로 다 갖다 놓은 집들이 태반이다. 그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중 수퍼마켓에서 파는 정도의 술 종류는 물론이려니와 메니아들을 위한 각종 주류를 비치해두고 있었다. 쥔장이 또 친절하기 이를데가 없어서 떨어진 술 종류가 있으면 천리를 마다하고 가서 사다가 바치는 대단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갖가지 술을 다 마셔볼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병에 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병씩 앞에 놓고 지 양껏 따라 마시는데, 그넘이나 행인이나 술 한 병이 몇 분을 버티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불과 1시간 정도 지나자 병에 든 종류의 술은 메뉴판 항목 일체를 출격시켰기 때문에 병에 들지 않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쌀막걸리, 동동주, 인삼동동주, 조껍데기술, 기타 등등 이넘의 술집에는 막걸리 종류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구비되어 있었다.

 

큰 걸로 한 독씩 시켜 주거니 받거니 퍼먹다 보니 그것도 종류별로 한 순배가 끝났고, 해서 이번에는 입가심으로 생맥주... 생맥주를 마신 다음에는 다시 첨부터 시작... 이게 인간의 할 짓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두넘이 낮 1시경부터 퍼지르고 앉아 별로 이야기도 없이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예의 그 쥔장. 그날도 친절 발동한다. 지가 술을 내겠단다. 좋다고 했더만 비장의 양주를 들고 나온다. 외국 가서 사온거라는데 같이 마실 인간이 없어서 뜯지도 못하고 있었다는데 그건 좀 뻥인 거 같고, 어쨌든 이름도 모르는 양주를 개봉하여 또 한 병 순간 작살... 저녁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저녁먹을 시간에 계속 술이나 빨자고 하고 계속 술추렴...

 

저녁 7시 경이 되었는데, 이넘이 약속이 있단다. 행인 역시 연말이라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부모님의 신신당부가 있었기에 그럼 낼 또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그넘과 헤어졌다. 그리고 종로 3가에서 인천행 전철에 올라탔다. 술기운이 어지간히 돌고 있었기에 언능 집으로 돌아가 푹 자야겠다고 맘을 먹고 있었는데, 뭔 일이 터질라고 했는지, 그 연말의 북적거리는 시간에 전철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웬만하면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취기가 너무 올라와서 도저히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면 틀림없이 잠이 들 것 같았고, 내려야할 역은 구로역인데, 지나치면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리 아래 하체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듯한 허무감이 자꾸 몰려와 어쩔 수 없이 앉게 되었다. 안 자면 되지 머... 라고 했으나...

 

한강다리 건너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다음에는 그만 기억이 없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지금도 그 때만큼 숙면을 취해본 경험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아무튼 그렇게 잠이 들었었는데, 뭐라고 방송이 나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눈이 뜨였다.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계속 들리고 있었다. 아, 이런 줸장할...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면서 후다닥 밖으로 나왔는데, 아니 이건 생판 첨 보는 곳이 아닌가? 인천은 그래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 아는 역 주변 풍경인데, 이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붉그죽죽한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을씨년한 전철역은 지상이었는데, 도통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는거다.

 

휘청휘청 거리면서 표지판 있는 곳을 가서는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겨우 뜨고 쳐다봤는데... 의정부 북부역이었다. 이게 뭐여?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여? 취해서 잘 못봤나? 하고서는 다시 한 번 자세히 쳐다봐도 그저 의정부 북부 역이었다. 그렇다. 행인은 취중몽사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인천역까지 갔다가 다시 그 전철로 의정부 북부 역까지 왔던 것이다. 이런 환장할...

 

막막했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걸 어쩌면 좋은가... 어쩔 수 없다. 다시 전철타고 휑 하니 달려가는 수밖에. 마침 타고 왔던 그 전철이 다시 부천까지 간다고 행선지를 바꾸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그 전철을 탔다. 그리고는 처음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한참 가야하는데, 이번에는 좀 잠이 들더라도 괜찮겠거니 하고 맘을 편히 먹었다. 그 결과 역시 또 바로 잠이 들었다.

 

또 무슨 방송이 나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런데 그 방송 소리가 아까 들었던 방송 소리와 너무나 똑같은 거다. 종착역이란다... 아니, 도대체 이거 우째야 하는 건가? 밖으로 나와 보니 역시 종착역이다. 부천역... 환장할 노릇이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어떻게 집으로 간단 말이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환지 연말이라고 전철을 연장운행한다는 거다. 구로역까지 가는 마지막 전철이 남아 있었다.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는 무슨, 그래 나를 돕는 하늘이 이렇게 전철타고 뺑뺑이를 돌게 만든단 말이냐?? 암튼 막차라니까 얼른 줏어 탔다. 이번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게 되려 낫다. 어찌나 잠을 퍼질러 잤는지, 그렇게 퍼마셨던 술이 거진 다 깬 상태였다.

 

구로역에서 내렸는데, 그 다음이 문제다. 당시 집이 시흥이었는데, 전철은 다 끊겼지, 버스도 안 다니지, 수중에 돈은 떨어졌지, 연말연시 오밤중에 노숙을 하기도 거시기 하고... 별 수 없다. 걷자... 그래, 결국 구로역에서 시흥까지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고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걷다보니 그럭 저럭 집까지 당도했다. 그리고는 두말 없이 퍼질러 잠이 들었다. 물론 이튿날 아버지로부터 무진장 쿠사리를 얻어먹어야 했지만서두...

 

낮에 ㅆ을 다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통 이넘하고 몇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전화를 했다. 안 받는다. 벌써 나갔나?? 다시 전화를 했다.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 이넘이 벌써 나갔구나... 별 수 없다.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뭐 그 때 삐삐가 있었나, 핸펀이 있었나 말이다. 기냥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화가 왔다. 이넘이 약속장소에서 전화를 하는가?

 

"어디냐?"

"집이여"

"우리가 어디서 몇 시에 만나기로 했냐?"

"만나고 자시고 간에 나 오늘 못나갈 것 같다."

"왜?"

"어제 술을 너무 퍼먹었는지 아직도 오바이트가 쏠린다."

"쉑기, 군바리가 기름빠진 짬밥만 먹고 살다보니 술 많이 줄었는개비지?"

"그것도 그렇지만, 나 어제 골때려 뒈지는줄 알았다."

"왜?"

"전철을 잘 못 탔거등."

어라? 이 넘은 의정부 행을 탔었는데???

"어떻게 된 건데?"

"너랑 헤어지고 너랑 반대편에서 전철 탔잖냐?"

"그랬지."

"전철에서 잠이 들었는데..."

"..."

"깨보니까 인천역이더라..."

 

아, 쉬파 이넘이나 저넘이나... 어째 그렇게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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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2 00:43 2004/11/1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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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4/11/12 10:04

    * 이 글은 행인님의 [취했을 때는 지하철 타지 않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1.몇번이나 써먹었던 얘기인데, 난 옛날 옛적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거친 마지막 세대이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1. 푸하하하...내 친구들 얘기하고 흡사하네요...이대입구에서 술마시고 나서 142번을 타고 신림동으로 갔는데 수색으로 두번씩이나 되돌아간 어떤 놈들...그 얘기를 시간나면 한번 써야겠네요..하하하..

  2. 예전에 지하철 한번, 버스 두번을 갈아타며 출퇴근 했었는데, 한번은 술먹고 지하철 역 플랫폼에 앉아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니 제 앞에 의자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게 뭔가 한참 쳐다보니 제가 버스안에 앉아있는 게 아닌감요. 옆에 창문을 보니 논밭이 지나고 있고.. 한참 멍하게 앉아있다가 앞 사람에게 여기가 어딘가요? 물었더니 저희 집에서 딱 한정거장 지났더라구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떨떨함.

  3. hi/그래도 마지막에 탄 지하철 종착역이 구로였으니 망정이지...휴우..정말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대단하셨어요.
    네오/ 회귀본능아닌가요. 술 취하면 무조건 집으로 가는..^^;;

  4. 술먹고 혼자 기차타고 집에간다고 수원까지 가서 밤새 헤매던 게 생각나네요
    ㅠ_ㅜ..낮술 늘어지게 먹고 싶다..

  5. ㅋㅋㅋ... 그러게 술 마시고 벌어진 일은 누구나 다 겪은 것 같은 그런 일들이라니까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셔서 행인처럼 아예 술을 끊는 일들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아멘... 인샬라...

  6. 산오리는 술마시고 전철이나 버스 종점까지 너무 많이 가서
    다 기억도 못하네요.
    술 마시고 전철이나 버스 타기 정말 무섭죠...ㅋㅋ

  7. 저두 전철에서 순환선 두번돌기도 하고 한번은 수원행 탔는데 오이도역에서 눈을 떳어요. 도통 자는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다시 내려 몇시간을 잤더니 오이도 역이더군요. 이건 약과에요. 버스에서 그런적도 있는데 종점과 종점을 무려 5번 왔다갓다 했다는거 아닙니까. 젠장할놈의 술이랑께요. 다도 고 이야기나 함써볼까

  8. ㅋㅋㅋ
    형 얘기는 늘 너무 재밌어요 >.<
    꼭 시트콤 한 편 보는 기분. 후후

  9. ㅠㅁㅅ/ 수원행 탔는데, 오이도... 이건 거의 미스테린데요... ㅎㅎ
    정양/ 시트콤... ㅋㅋㅋ 그쳐 뭐,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살면 만사가 시트콤이에요~~~ *^^*